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44화 (944/1,277)

##  944화

1층에 위치한 카페에선 약간의 디저트와 음료 등을 제공하고 있었다.

만약 이곳이 호텔 같은 곳이었다면 굉장히 비싼 값으로 판매 중이었겠지만, 여긴 베르체노프의 별장이다.

초대받은 손님들이라면 그냥 테이블에 앉아 있기만 하면 웨이터가 와서 메뉴판을 보여준다.

그 메뉴판엔 가격이 적혀 있지 않았다. 주문만 하면 가지고 와 준다. 무한정으로.

에르네스트는 온천에 들어갔다 나온 참이니 청량음료를, 아나스타샤는 커피를 주문했다.

주문한 음료들을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와 말하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런 예상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가볍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그녀는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에서 구태여 복잡한 이야기들을 꺼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영민한 그녀의 눈치는 이미 에르네스트와 루슬란이 같이 있는 걸 본 순간 많은 걸 알아챘겠지만, 그만큼 견고한 그녀의 참을성은 많은 걸 막아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항상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을 한발 앞서 나가곤 했다.

그건 일종의 배려였지만, 에르네스트는 가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미술관 갔었니? 거기 되게 좋았지?”

“제목이 하나도 없어서 잘 모르겠더라고.”

“그래도 좋은 건 알아봤어야지. 타티아나의 음악이 인정받은 걸 봐. 작품만으로도 심미안 있는 사람들은 알아본다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내 미술적 심미안이 문제다?”

“응.”

“그럼 차라리 그렇게 짧게 말해.”

이걸로 편하다면 그냥 시간만 같이 보내도 괜찮은 일일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발끈하기도 하고, 아나스타샤의 장난을 받아주기도 했다.

잠시 후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두 사람은 마른 목을 축였다. 그래 봐야 두어 모금 정도일 뿐. 하지만 그 정도면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아나스타샤가 자연스럽게 다음 에르네스트가 간 곳을 짚었다.

“그다음에 온천에 간 거야?”

“그랬지.”

“타티아나가 좋아하겠다.”

“……어?”

생각지 못한 말에 컵을 내려다보고 있던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들자 아나스타샤는 왜 그렇게 반응하냐는 듯 이어 말했다.

“유황 온천이 몸에 좋단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애는 널 온종일 온천에 넣고 싶어 했어. 몰랐니?”

그 말이었나…….

에르네스트는 다시 컵을 들었다. 그렇게 잠깐 시간을 번 사이 아나스타샤의 말들을 돌이켜보았다.

애초에 타티아나가 이 여행을 준비하고자 한 목적은 깁스를 푼 에르네스트의 휴양에 있었다.

친구들을 초대하기로 한 건 그다음에 말이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을 타티아나는 잊지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에르네스트의 편의를 생각했고, 또 회복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 했다.

에르네스트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다른 친구들에게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어쩌면 타티아나를 조금 불안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말을 들어보면 아나스타샤도 옆에서 느낀 바가 없잖아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보면 온천에 들어갔다 나온 건 잘한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나중에 돌아올 그녀를 생각하면서 아나스타샤에겐 짧게 대꾸했다.

“온종일 들어갈 순 없대. 한 번에 20분. 하루에 2번.”

“와, 그렇게 독해?”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그런가 봐.”

그게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단지 필요한 횟수가 있다면 앞으론 되도록 채우는 편이 나을 것 같단 생각을 할 뿐이다.

아나스타샤는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단지 그가 겪은 일들을 한 마디로 설명할 뿐이다.

“아무튼, 그 애가 원하는 걸 루슬란이 대신 해줬구나.”

그런 의도였나?

그냥 눈에 띄었길래 말을 걸고 데리고 다녔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정말 타티아나를 위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루슬란이 자신을 무작정 싫어해도 별수 없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에르네스트는 살짝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말했다.

“혼자서도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에이, 그래도 재미있었잖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네 진짜.”

“왜 말이 안 돼?”

아나스타샤는 이미 여러 가지를 상상해 놓은 것 같았다.

그 생각을 열어볼 수도, 그 생각 중 어떤 것이 맞다고 가르쳐줄 수도 없는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컵을 입에 댈 뿐이었다.

그런 그를 보던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그래도 남자 둘이선 어색했겠네. 루슬란이 좋은 이야기 많이 해 줬니?”

정말 많이 고른 말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에르네스트는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그녀에게 전할 말이 떠오르진 않았다.

“그럭저럭.”

“그게 뭐니?”

“별 이야긴 없었어. 그냥…… 지금 놀러 나간 애들 사이에 왜 끼지 않았는지 그런 거.”

턱을 괴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그 말을 듣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나름대로 배려한 거라는 걸 루슬란도 알아주면 좋을 텐데.”

“…….”

그녀는 거의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부상을 어지간해선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 그리고 타티아나가 신경 써주는 것이 과하지 않길 바란다는 것도.

그러면서도 그것을 삐뚜름하게 보지 않고 곧게 보고 칭찬해온다.

에르네스트는 그 칭찬을 그대로 돌려줄 필요성을 느꼈다.

“너도 그런 거야?”

“뭐가?”

“애들이랑 시내로 가지 않은 거.”

“음, 난 그냥 오늘은 좀 피곤해서.”

별것 아니라는 듯 아나스타샤는 둘러댔지만 분명 비슷한 이유일 것이란 확신이 든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컵을 흔들거리다가 문득 두 사람을 더 떠올렸다.

루슬란이야 타티아나가 친구들과 자유롭게 놀도록 자리를 피한 것에 가깝다치더라도…… 리처드는?

항상 리처드는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세상 달관한 것처럼 굴다가도 무언가에 꽂히면 마치 자기 일인 양 달려들고, 또 그러면서도 이번처럼 그냥 어울려도 될 땐 슥 빠져버리고.

“리처드 녀석도 피곤했던 건가?”

“글쎄? 너랑 나랑 둘이 남겨두기 좀 그랬던 것 아닐까.”

“……뭐야 그게? 그럼 지금 어디 있는데?”

“자기 방에 있겠지?”

아나스타샤도 살짝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카페 입구 쪽을 바라보며 에르네스트는 중얼거렸다.

“그럴 거면 나가지. 영국에서 왔으면서.”

“메시지 보내 볼까?”

“뭐 그러던가.”

어차피 점심 식사 때가 되면 그를 불러내어 같이 식사를 할 예정이니 조금 일찍 나오라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셋이서 뭘 할지 정해진 건 없었지만, 두어 시간 정도 보내는 데엔 별문제 없다.

에르네스트는 아무 생각 없이 의자 뒤로 몸을 늘어뜨리며 그녀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지금 아나스타샤는 묻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이 분명했다.

에르네스트는 그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꽤 길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녀는 결코 필요 이상으로 선을 넘는 일이 없었다.

어차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이 장소와 때를 따지는 건진 모른다.

다만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혼자서만 생각하는 것들이 너무 깊진 않았으면 할 따름이었다.

때문에 이야깃거리를 생각하던 에르네스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루슬란에게 듣고도 마땅한 답을 생각해내지 못해서 일단 한쪽 구석에 밀어놓았던 일이었다.

타티아나와 가까이 있는 아나스타샤라면 에르네스트보다 잘 알지도 모른다. 혹시나 싶은 생각에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아나스타샤.”

“뭐니?”

“하나 물어보자.”

메시지를 다 보냈는지 스마트폰을 놓고 다시 고개를 든 아나스타샤가 그를 바라본다.

에르네스트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사각형을 그리며 말했다.

“작년 초에 우리 무슨 일 있었었지?”

아나스타샤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질문이 너무 러프했던 것 같다.

“뜬금없네. 작년 초라니?”

“그…… 루슬란이 그러더라고. 작년 초에 타티아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듯이.”

루슬란의 말은 타티아나가 그를 의식하게 될 만한 이유가 그 근처에 있을 것이라는 의미였었지만, 그걸 정확하게 말할 순 없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대체 무슨 질문을 하냐는 듯 눈을 치켜뜨며 따져물었다.

“너 바보니? 무슨 일이 있었잖아. 그것도 큰일이. 그 애 혼절했었던 것 기억 안 나?”

“아니, 그건 기억하지 당연히. 그런데 그게 전부지?”

“응?”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아서. 뭔가.”

막연한 느낌으로 대답하자 더 화낼 줄 알았던 아나스타샤는 수그러들었다.

그러더니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마치 스스로의 생각을 끊어내듯 테이블을 툭 쳤다.

“나도 하나 물어볼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일이 좀처럼 없는 그녀였지만, 이번 물음은 사실상 질문이 아니었다.

“너…… 그 후로 타티아나가 조금 바뀐 것 같다는 거, 혹시 못 느끼니?”

그 말을 듣고 나니 지금까지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들이 조금 확실해졌다.

루슬란이 물어봤던 것 역시 이 의미였다는 것을.

에르네스트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특별함은 절대 모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특별함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져서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바뀌었겠지.”

“겠지?”

“한 계단 더 수준 높은 곳으로 향한 거니까…… 당연히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지. 난 그 애의 음악이 다시 깨어난 뒤로 거의 완전해졌다고 생각해.”

그 전의 타티아나도 이미 몇 번이나 되는 계단을 오르며 성숙하고 깊이 있는 음악을 가꾸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 초 위클리와 뒤풀이 파티에서 한승우의 연주에 대답하듯 나선 타티아나의 음악은 그야말로 기존의 모든 것을 초월했다.

그 후 타티아나는 피아니스트로서 완전히 새로워졌다.

그 어떤 물리적 한계도 그녀를 가로막지 못했고, 그 어떤 감정과 인격이라도 완벽하게 묘사해냈다.

초인적이라는 말은 자주 쓰이면서도 대부분은 그저 극찬의 의미에 가깝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단어 그대로 의미의 초인적인 영역에 닿아 있었다.

타티아나가 음악적 진리를 일부 이해하고 있음은 자명했다. 어떠한 깨달음이 그녀의 경지를 끌어올려 놓았다.

그건 에르네스트도 끝없이 추구했던, 아득히 높은 수준의 피아니즘이었다.

이후 에르네스트가 그녀에게 헌정한 곡의 첫 악장은 그런 면을 여실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음악의 신을 연상했을지도 모른다. 에르네스트는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도 그 부분을 꿰뚫어보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때문에 그녀는 쉽게 수긍했다.

“그래, 그렇겠네. 그렇게 되었었지.”

역시 생각이 크게 다르진 않다고 생각하며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응. 맞아.”

“그럼 작년 초 일은 역시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었던 거네.”

피아니스트로서 굉장한 도약을 해낸 타티아나는 거기에 경의를 표하는 에르네스트의 곡을 가지고 무대에 올라 리사이틀까지 훌륭하게 해냈다.

루슬란은 그 일련의 과정을 보며 아마 생각했던 바가 있었으리라.

대충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동의하리라 생각했던 아나스타샤는 이제 와서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뭔데?”

“아니야, 그냥…… 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타티아나에게 곡도 써서 헌정했다는 게 대단해서. 부럽기도 하고.”

뭔가 미묘한 어투였다.

그녀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숨기는 것을 그녀가 묻지 않는 것처럼, 그 역시 그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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