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5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레모네이드 같은 걸 시킬 걸 그랬어.
아나스타샤는 목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근질거리는 무언가를 느끼며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갈증이 나서 온 카페이건만, 이 커피는 마시면 마실수록 더더욱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에르네스트에게 그거 한 모금만 달라고 하면 줄까? 아마 주겠지. 하지만 저 애도 저걸 다 마시고 싶어서 주문했을 텐데, 나누어 받으면 누구 한 명도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버릴 것 같아.
목이 말라 죽는 건 한 사람이면 족하지.
“…….”
시니컬한 생각을 하던 아나스타샤는 그런 스스로가 꼴불견이라 생각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마침 나온 웃음에 섞어서 조금 더 활기차게 목소리를 조절했다.
에르네스트는 분명 잘 해내고 있다. 그 방식이 종종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있었지만, 그것도 아나스타샤의 기준에서 그러할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멋지네 그런 거.”
타티아나는 기억을 되찾으면서 어딘가 다른, 하지만 피아니스트로선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순수한 경의를 담아 곡을 바쳤다. 헌정이라고 하는 그 행위는 음악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표시이리라.
그때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어떤 기분으로 있었는지 떠올려보았다.
분명 기뻤고 축하도 해줬지만 그것을 순수하다고 말한다면 거짓임을 느낀다. 그녀는 양가적인 감정에 혼란스러워했다.
의지할 무언가 없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타티아나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 눈빛에 아나스타샤는 약간의 착각과 희망 등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뜨고 그녀를 돌아보는 타티아나의 눈빛엔 가지런하게 정돈된 고요함만이 자리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을 마주하자마자 아나스타샤는 그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자그마한 희망이 사그라듦을 느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처럼 순수하게 축하해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에 지긋지긋함을 느꼈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 보면, 그때 에르네스트만이 진지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뭐…… 글쎄.”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웬 칭찬이냐는 듯 시선을 슥 피하더니 괜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컵을 들어 남은 것들을 한 번에 마셔버리곤 시원스레 말했다.
“작곡은 배우면 돼. 아무나 할 수 있어.”
“아하하, 말은 바로 하자. 화성학은 아무나 배울 수 있지만 작곡은 아니야.”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데. 누구나 각자의 음악이 있을 테니까.”
“그거야 그렇겠지만. 난 별로.”
아나스타샤는 손을 흔들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절대로 에르네스트처럼 할 자신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내 그림은 다 맞춰도 보여줄 수가 없어.’
퍼즐류에 굉장히 강한 아나스타샤는 현실에 뿌려진 퍼즐을 맞추는 것도 잘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거의 모든 퍼즐 조각들을 다 알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모르는 것까지도.
그게 그녀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를 수 있는 에르네스트가 부러울 뿐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아나스타샤가 나서서 자초한 일이니 이제 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후회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글생글 웃으며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차라리 쿨해지란 말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
루슬란이 에르네스트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타티아나가 기억을 잃고 불안정하게 있었을 땐 가족으로서 그녀를 무조건적으로 보호해야 했을 테니 루슬란은 에르네스트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더라도 일단 경계선 밖으로 밀어내야 했다.
반대로 그 덕분에 아나스타샤는 경계 안에서 마치 가족처럼 대우받을 수 있었고.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가 되돌아온 후, 에르네스트는 직접적으로 그녀를 지켜주기까지 했다.
오늘 보니 루슬란의 심경에 변화가 있었는지 같이 온천까지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데, 그건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따라 해 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루슬란도 그 애의 기억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고.’
그 이야기를 대신 하지 않은 까닭도 분명했다.
에르네스트가 그것까지 감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루슬란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나스타샤 역시 기억에 대해 알리겠다던 타티아나를 뜯어말렸을 때, 직감적으로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말 정확했다.
아나스타샤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들 중에 가장 잘한 일이 그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나중에 죽기 전에 말해줄까.’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타티아나에게 듣자마자 이건 네가 차라리 모르는 편이 이 애를 대하기에 나을 것이란 걸 느끼고 가로막았다는 걸 아니?
‘그리고 그렇게 판단한 시점에서 이미 난…….’
당시엔 혼란스럽기도 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한 부분도 많아서 정리가 잘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본능과 직관에 의거하여 움직여도 좀처럼 잘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설령 그것이 그녀 스스로에게 불리해지는 일이라 하더라도.
‘어쩌겠어. 이렇게 태어난걸.’
너무 잘난 것도 죄라니까.
잘하는 것이 많고 좋아하는 것도 많아서 때때로 손해를 본다. 아나스타샤는 이런 상황을 익숙하게 느끼면서도 약간은 씁쓸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과 상념을 억누르며 다시 커피를 입에 물었다.
갈증 해소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이 쓰고 단 이상한 물에는 대신 카페인이라는 좋은 성분이 들어 있다.
그것은 머리를 보다 빠르게 돌게 해 주고 원하는 표정을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준다.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타티아나는 작곡엔 관심 없다고 하니?”
“글쎄, 생각이 없어 보이진 않아. 분명 하자면 잘할 테고. 그 애의 음악적 영역은 나도 미처 다 아직 모를 정도로 넓으니까. 언젠가 한번 시켜보고 싶기도 한데.”
지금도 에르네스트는 순수한 호기심과 열의를 느끼는 음악가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는 타티아나 역시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음을 아나스타샤는 안다.
그걸 망가뜨리려고 하는 미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테다.
***
소치 시내를 돌아다니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즐거웠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부터 관광으로 유명했던 도시답게 이곳엔 정말 없는 것 없이 즐길거리들이 많았다.
우리가 차량을 타고 맨 처음 도착한 곳은 덴드라리 식물원이었다.
1892년에 세워져 백 년도 넘은 장대함이 우리를 맞이했다. 러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식물원이라는 명성답게 굉장히 컸다.
겨울이라서 볼 수 없는 것들도 많았는데, 그럼에도 하루 만엔 도저히 다 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승우는 식물원에 흥미가 꽤 많은 것 같았지만, 지금 함께 움직이는 발렌티나나 류보비, 아나톨리, 사샤는 사실 대충 보고 가고 싶은 눈치였다.
때문에 우린 적당히 시간을 타협하여 다음으로 넘어갔다.
걸어서 소치 시내를 구경하며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소치 예술박물관이었다.
그리스의 신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 건물 자체만으로도 정말 멋졌는데, 안의 소장품들도 하나같이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여섯 명 모두가 만족하는 장소였기에 우린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슬슬 식사하러 갈까요?”
“그럴까?”
“어디서 먹을래? 점심은 내가 사도록 할게.”
“오, 진짜?”
자신도 이 즐거움의 일부분을 부담하겠다는 한승우의 말에, 모두들 이 불쌍한 유학생을 한 번 등쳐 먹어보겠다고 알고 있는 가장 비싼 음식들을 이야기했다.
물론 한승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웃으며 대꾸했지만.
“그럼 우리 햄버거 먹으러 갈까?”
“…….”
역시 그는 만만치 않았다.
더 말해봐야 아직 러시아어는 잘 모르겠다며 능글맞게 굴 것이 뻔했다.
이젠 그런 자신의 약점을 무기로 쓸 정도로 한승우는 이곳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게 한 번에 모두를 얌전하게 만든 한승우는 해변에 있는 리비에라 공원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모두를 데리고 갔다.
아침에 시내로 나가서 놀자고 하고 나서 인터넷으로 어떻게 찾아낸 것 같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훌륭한 레스토랑이라서 깜짝 놀랐다.
살짝 까다로운 발렌티나부터 가장 어린 사샤까지 모두 만족할 수 있었다.
그 후 마지막으로 차량을 타고 간 곳은 아들레르에 있는 아쿠아리움이었다.
“디스커버리 월드 아쿠아리움? 이거 미국에서 투자한 건가?”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와, 저기 봐.”
핀잔을 주는 것과 탄성을 지르는 것 어느 하나 놓칠 수 없다는 듯 발렌티나는 잔뜩 들떠 있었다.
물론 그녀만 그런 건 아니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나 역시 아쿠아리움을 좋아한다.
일전에 갔었던 크로커스 시티의 오셔너리움이 생각났다. 거기도 이름처럼 정말 거대하고 멋진 곳이었지만, 여기도 그에 못지않게 만만찮았다.
아크릴로 된 아쿠아리움 터널 아래엔 포토존이라 할 만한 구역이 있었다.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있는지 줄을 서서 찍고 있을 정도였다. SNS를 열심히 하는 발렌티나 역시 얼른 사진을 찍어서 올릴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근처를 서성이며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정확하게 내 쪽으로 향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약간의 기시감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상대편에서 날 알아보고는 주저하며 다가왔다.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성분이었는데 그 태도가 정말 조심스러웠다.
“그, 혹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친구분들과 계시는 것 같은데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정말 팬이라서 그런데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알아보게 된다는 건 몇 번 겪어봐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도 겪었던 일이었는데 그땐 큰 소동이었다. 하필이면 음반 가게 앞이어서 관심있던 사람들이 잔뜩 몰렸던 것이다.
다행히 이번엔 대부분 아쿠아리움에만 관심이 있지 내겐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난 얼른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물론이죠. 어디에 해 드릴까요?”
“아, 잠시만요. 수첩이 있어요.”
아쿠아리움에서 갑작스레 볼 줄을 몰랐는지 허둥지둥하는 모습이었다. 난 차분히 내 가방에서 사인펜을 찾아 꺼냈다.
사인을 몇 번 하다 보니 만년필로는 크게 하기가 어려워서 새로 가지고 다니게 된 것이다.
언제 필요하게 될 줄 알고 사인펜까지 가지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내겐 심히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쓰게 되니 잘 되었단 생각이 든다.
팬 서비스 역시 연주자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에르네스트를 보며 배우기도 했고.
이름을 묻자 스베틀라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이름을 담아 사인을 해 주자 그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수첩을 꼭 쥐었다.
그리고 나서도 그녀의 눈에선 열기가 식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진짜 가보로 삼을게요.”
“그건 좀…….”
“저기…… 그런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씀하세요.”
“사진도 괜찮을까요?”
그냥 찍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렇게 부탁해오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물론이죠.”
“아, 그럼 잠시만요…… 옆에 서도 되죠? 와, 가보가 두 개나 생기겠어요.”
아마 집에 가보가 백 개쯤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중 하나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어주고 나자 듣기에 낯부끄러울 정도의 찬사가 잇따랐다.
물론, 뒤에 이어진 음반에 대한 칭찬은 듣기 좋았지만.
“늘 응원할게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친구분들과 즐거운 시간 되세요!”
“감사합니다.”
방송도 음반도 먼 곳까지 퍼졌다는 걸 알긴 하지만 모스크바가 아닌 소치에서 이런 일을 겪다니…… 날 만난 그녀도 신기했겠지만, 나 역시 신기한 기분이었다.
짧은 팬 서비스를 마치고 나자 살짝 떨어져 있던 친구들이 다시 다가왔다.
“언니, 방금 팬이었어요?”
“저번에도 그러더니…… 너 진짜로 유명해졌구나?”
나보다 내 친구들이 어쩐지 더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진짜로라는 말을 쓰기엔 조금 그렇지 않나?
하지만 어색해하는 나와 달리 잔뜩 들뜬 류보비가 내 팔을 이끌었다.
“나도 사진 찍어달래야지. 괜찮죠? 네? 응?”
“우리 다 같이 서자.”
“난 뒤쪽에 서는 게 낫겠지?”
아쿠아리움을 등지고 자리를 잡아보겠다고 북적이는 친구들을 보며 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