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6화
마지막으로 들른 쇼핑센터에서 나오니 하늘은 붉어져 있었다.
처음 계획을 잡고 시내로 나올 때부터 시간을 정하길, 해가 질 때까지만 있다가 돌아가기로 했었다.
오빠가 정해주거나 한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정했던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 같은 건 아니었지만, 딱히 어겨가면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 생각은 비슷했는지, 이만 돌아가자고 해도 이견이 나오진 않았다.
차에 오르자 발렌티나가 발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오늘 재미있었어!”
아직까지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듯한 그녀를 보며 난 미소를 지었다.
발렌티나는 소치에 몇 번 와봤다고 하면서도 심드렁해하지 않고 활기찼다.
처음 보는 건 처음 보는 대로, 봤었던 건 자신이 알려주겠다며 기세 좋게 앞장서며 모두를 세심하게 챙겼다.
만약 그녀 없이 10학년이 나와 한승우만 있었다면 밋밋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는 둘째 치고 난 재미있는 성격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아이들 입장에선 견학 나온 느낌이지 않았을까.
솔직히 우리가 계속 높은 텐션으로 시내를 관광하며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발렌티나 덕분이었다.
“바다는 차갑고 스키는 탈 줄 몰라서 어떠려나 싶었는데, 그냥 이렇게 다녀도 좋은데? 그렇지 않니 얘들아?”
“전 소치가 이런 곳인지 몰랐어요.”
“저도요!”
하루 종일 높았던 그녀의 텐션에 감화된 듯 다른 아이들 역시 떠들썩하게 즐거워했다. 그 분위기에 한승우도 편승했다.
“나와보길 잘한 것 같네.”
“응. 사진도 많이 찍었고 말야. 이거 볼래? 아까 찍었던 건데.”
“어디?”
“네가 찍은 것도 보여줘.”
한승우와 발렌티나는 스스럼없이 서로의 스마트폰을 바꿔가선 찍었던 사진들을 보았다.
물론 모두 같은 장소에 있었으니까 같은 사진들이 찍혀 있겠지만, 찍는 방향이나 세팅 등이 차이로 드러난다.
별 반응 없이 사진을 휙휙 넘기는 한승우와 달리 발렌티나는 첫 장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스마트폰 화면에 빨려들어갈 것처럼 얼굴을 10cm도 안 되게 붙이고는 한참이나 보았다.
귀신이라도 찍혔나 싶어서 발렌티나의 행동을 보고 있는데,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확 하고 들더니 한승우에게 보던 걸 내밀었다.
“와, 뭐야 이거? 엄청 잘 나왔네! 나 이거 보내줘!”
“정리해서 싹 한 번 올릴게.”
“아니 지금 당장!”
몇 초라도 못 참겠다는 듯 발렌티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이니 나도 덩달아 조금 궁금해졌다.
아까 보니까 구도가 안 나온다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찍기도 하고, 난간을 타넘기도 하면서 정말 진심으로 임하던데…… 그 결과물이 고생한 만큼 잘 나온 모양이다.
내가 찍어놓은 사진들도 많았지만, 솔직히 그게 한승우의 것보다 나을 것 같진 않았다.
어떨까 싶어 기웃거리고 있는데, 한승우는 발렌티나의 부탁을 딱 잘랐다.
“지금은 안 되겠는데.”
“어? 왜?”
“나 데이터 없어. 그러니까 와이파이 되는 곳에 가면 보내줄게.”
“…….”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이라 발렌티나도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대신 그녀는 몇 장만 골라서 바로 보내줄 순 없냐고 협상안을 제시했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보낼 사진을 고르는 사이, 난 나대로 생각이 많아졌다.
별장까진 얼마 걸리지 않는다. 일단 온종일 밖을 다니다가 돌아가는 것이니 들어가자마자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건 되도록 내가 챙겨야 할 일들이었고.
난 다른 세 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돌아가면 씻고…… 음, 잠깐 쉬었다가 다시 모일까요? 저녁 식사는 아마 뷔페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정해진 일정은 없었지만 어떻게 될지 예상하며 적절하게 이야기하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승우와 이야기하고 있던 발렌티나가 불쑥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벌써 돌아간 다음 일 생각하고 있네. 타티아나, 우리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기로 했잖아? 그럼 너도 그렇게 해 줘야지.”
“다른 애들 봐. 진짜 신경도 안 쓰던데.”
“그치.”
그 말대로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 리처드는 우리끼리 잘 놀고 오라고 했을 뿐이었다.
어제 각자 편히 쉬자고 한 것 때문인지 정말로 원하는 대로 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말했던 것이니까 거기에 대해 불만은 없다. 그저 살짝 아쉬울 뿐이다.
내겐 이 즐거움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그런 아쉬움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발렌티나도 전혀 내색하진 않았지만 사실 출발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아나스타샤에게 여러 번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놀다 보니 잊고 있었지만,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발렌티나가 말했다.
“그러게. 오늘 놀다 보니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그 애들은 뭐 하고 있을까?”
“자고 있는 거 아냐?”
“……아무리 휴양목적이라 해도 이 시간까지 뒹굴거리고 있진 않겠지.”
“그러면 루슬란 형이랑 뭔가 하고 있으려나.”
“그것도 뭔가 상상이 안 가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나도 조금 불안해졌다.
아나스타샤는 루슬란 오빠와 자주 봤고 잘 지내는 편이었으니 딱히 문제가 될 것 없었지만, 다른 두 사람은 그리 편한 관계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예전에 우리 집에 한 번 요주의 인물로 찍힌 적이 있었고……. 물론 그가 자초한 일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오빠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다쳤기도 하니 편의를 봐 주겠지만, 그것도 어디까지일지 잘 모르겠다.
솔직한 마음으론 언젠가 오빠를 붙잡고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갑자기 덜컥 걱정이 들어서 고민 중인 나와 달리 발렌티나는 빠르게 태세를 바꾸었다.
이 상황의 중심은 어쨌거나 우리 쪽에 있다는 투였다.
“아무튼 돌아가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진 알겠지?”
“예?”
“왜 모르는 척이야? 당연히 나오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줘야지! 에르네스트나 리처드는 둘째 치고 특히 아나스타샤! 내가 그렇게 같이 가자고 했는데 끝까지 거절해? 가만 안 둘 거야.”
“아하하…… 너무 그렇게 생각하진 마세요.”
“너도 협조해줘야 해 타티아나! 자, 웃어봐.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걸 보고 온 사람처럼.”
“어……?”
당황해하고 있자 발렌티나는 왜 제대로 못 하느냐며, 혹시 오늘 재미없었는데 억지로 끌려다닌 거냐며 마구 타박했다.
왜 갑자기 내가 괴롭힘당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건지 잘 모르겠다.
그 협조인지 뭔지 모를 이상한 요구에 따라 난 몇 가지 대사와 상황 그리고 호들갑스러운 리액션 등을 교육받아야 했다.
이런 걸 배워봤자 당연히 잘 될 리가 없겠지만.
“도착했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오늘 고마웠어요! 소로킨! 빅토르!”
잠깐 이야기를 하는 사이 별장에 도착했고, 친구들은 오늘 하루 우리 곁에 있어 준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차에서 내렸다.
나 역시 마지막으로 내리며 살짝 눈인사를 건넸다.
빅토르는 신경 쓰지 말고 친구들을 따라 가보라는 듯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으나, 내가 이 사람들에게 가지는 감사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미리 전해졌는지 입구에선 어제도 우릴 맞이했던 베니아민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가 자연스레 우리 인원수와 상태 등을 체크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별문제 없다고 느껴졌는지 그는 안쪽으로 우릴 안내했다.
“쇼핑하신 짐들은 각자 방에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샤워 시설은 이쪽에서 사용하시고…….”
내가 생각했던 모든 걱정거리를 베니아민은 대신 해결해주었다.
이것저것 따지고 챙길 것 없어서 편해지긴 했지만, 마냥 홀가분하기만 한 건 또 아니었다.
나도 모를 내 마음속엔 호스트로서 하고 싶었던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뒤를 따르며 난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 발렌티나나 한승우가 말했던 것처럼 나도 지금은 그저 편히 있어야 했다. 베니아민이 이렇게 잘해주는데 괜히 또 나설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조금 마음을 내려놓고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이따가 봐.”
“예, 잠시 후에.”
친구들을 각각 방으로 보내고, 난 베니아민과 둘이서 잠시 복도를 걸었다.
그는 이 별장의 책임자로서 내게 이것저것 묻거나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했다.
“가셨던 곳은 어땠습니까?”
“훌륭했어요.”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우리 동선이야 다 알고 있을 테니까.
베니아민은 만족스레 웃으며 말했다.
“이후에도 혹시 외출하실 계획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지금 말씀드리는 건데 헬리콥터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헬리콥터요?”
“예. 헬리스키 등을 이용하실 때를 위해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물론 다목적 레저용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 자세히 들어보니, 헬리콥터를 타고 카프카스산맥의 3200m 높이나 되는 산으로 가는 서비스를 지원한다고 한다.
그 높이에서 스키나 보드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다.
설상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일일 터였다.
반대로 베니아민의 입장에선 자랑스레 소개할 만한 서비스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제 다른 아이들이 모두 있는 앞에선 이야기하지 않고, 이렇게 나와 단둘이 있을 때 살짝 언급해주었다.
난 그의 신중한 면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염두에 둘게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럼 쉬시길.”
내 방 앞에 다다르자 베니아민은 이제 전할 말은 다 전했다는 듯 웃으며 대신 문을 열어 주고는 내가 들어가자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방에 혼자 남게 되자 귓가가 조용해졌다.
밖에 계속 있다가 들어와서 그런지 따뜻한 방 안의 공기에 온몸이 녹는 기분이 든다.
일단 샤워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침대를 보니 그냥 이대로 뛰어들어 10분만이라도 눈을 감고 싶단 마음도 든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서 있는데,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렸다.
“타티아나. 있니?”
작은 소리였지만 깜짝 놀란 난 얼른 문으로 달려가 열어 주었다. 거기엔 편한 차림의 아나스타샤가 문간에 팔을 기대고 서 있었다.
“아나스타샤.”
“아, 왔었구나. 옆에 누워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슬슬 너희들 돌아올 때가 되기도 했고.”
“들어오세요. 춥겠어요.”
난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막 외출했다가 돌아온 나와 아나스타샤 사이엔 꽤 차이가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이나 분위기, 온도 등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 차이를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난 얼른 외투를 벗어 걸어두고 가방을 옆으로 치웠다.
소파에 걸터앉아 있던 아나스타샤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날 보더니 히죽 웃으며 물었다.
“어땠니? 재미있었어?”
“예, 다들 즐거워했었어요.”
“아쿠아리움 갔었니?”
“어떻게 아셨나요?”
“발렌티나가 다 올려놨어.”
어디냐고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녀의 SNS겠지.
난 그래도 이렇게나마 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아나스타샤에게 알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밖에서 놀면서 그녀에게 메시지나 전화를 하자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전혀 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너희가 재미있었다면 상관없다는 듯 웃기만 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난 살짝 주저하며 물어보았다.
“아나스타샤는요?”
“나?”
“예, 오늘…… 쉬고 계셨던 건가요?”
몸 상태가 안 좋았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긴 시간 동안 그녀가 무얼 하고 있었을지 궁금했다.
함께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건 그녀였지만 왜 내가 미안함을 느끼는 건지 잘 모르겠다.
물론 그런 나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투로 스마트폰을 보며 시간을 되짚어보듯 말했다.
“그렇지? 아까 다른 애들이랑 이야기도 좀 하고 밥 먹고 놀다가…… 방에 들어온 진 1시간쯤 되었나.”
“다들 같이 계셨던 건가요?”
“응. 뭐 별건 없었고, 스쿼시도 하고 게임도 하고…….”
중얼중얼하며 하나씩 꼽던 아나스타샤는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온천에도 들어갔다 나왔었어.”
“아, 그랬나요?”
“에르네스트는 온천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던데? 두 번이나 들어갔다 나오고.”
“정말인가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한 단계 올라갔다.
밖에 있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지 나도 모르게 하고 있던 걱정들은 모두 씻은 듯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