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7화
내겐 막연한 걱정과 미안함 같은 것들이 있었다.
별장에 남기로 한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 의사로 그리 정했다지만, 그래도 여섯 명만 나가서 정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 적어도 내겐 불가능했던 까닭이다.
물론 다른 일행에게 내가 느끼는 불편함이 전염되지 않도록 난 정말 발렌티나의 텐션에 맞춰서 많이 웃으려 노력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내 뇌리엔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런데 오자마자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리 걱정할 건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온천까지 제대로 즐겼다고 하니까, 어떻게 보면 시내를 돌아다닌 우리보다 휴양의 목적은 더 확실하게 달성한 게 아닌가 싶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팔을 슥 쓸어 보이며 말했다.
“응. 오전에도 들어가더니 바로 오후에도…… 아, 그건 그렇고 온천 정말 좋더라. 유황 온천은 처음이었는데, 물이 이 정도로 녹색일 줄은 몰랐어.”
“녹색인가요?”
“그렇다니까? 그리고 뷰는 또 얼마나 좋은지…… 안내하시는 분이 나오라고 안 했으면 거기 계속 누워 있을 뻔했어.”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칭찬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편안하게 잘 있어 주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서 설명을 듣고 있는 거지?
이상함을 느끼던 난 한 가지 예상을 떠올렸다.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를 데리고 온천에 들어간 건가?
“…….”
갑자기 든 생각이었지만 신빙성 없진 않았다.
혼성으로 이용 가능한 온천은 어디에나 있고, 그녀는 예전에 수영장에서 놀았을 때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이곤 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 상황을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체 아나스타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빠르게 회전하던 머릿속이 결국 과부화에 걸린 것처럼 우뚝 멈췄다.
내가 가만히 서 있자 그것이 흥미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지금 씻을 거니?”
“아마도요.”
“그럼 지금 가 봐. 저녁 전에 시간 있잖아?”
“음…….”
“왜 그래?”
내 머릿속에 든 궁금증을 물어보려던 난 도저히 그것이 제대로 된 문장의 형태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 같단 확신을 느꼈다.
바보같이 횡설수설하게 될 것만 같다.
가까스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젓는 일뿐이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나스타샤는 싱거운 웃음을 흘리며 다리를 고쳐 짚었다.
난 그녀가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를 몇 가지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에르네스트와 할 이야기가 많았겠지. 그녀의 마음의 짐은 여전히 무거우니까.
거기에 내가 그를 온천에 집어넣고 싶어한다는 걸 빠르게 눈치채고, 나 대신 움직여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그녀를 행동하게 한 것이다.
‘진짜 그런 걸까?’
나 나름대로의 정황 파악과 논리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그나마 시야가 좀 트이는 기분이 든다.
뭐 어쨌든 지금 기분이 나쁜 것 같아 보이진 않으니 대화가 잘된 거라면 상관없었다.
두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고 똑똑했으니까, 이야기를 해도 잘 했겠지.
그런데 굳이 온천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는진 여전히 모르겠다.
아무래도 아나스타샤의 기준이나 감각을 내가 따라가긴 어렵겠지만…….
“…….”
조금 차분해지려던 머릿속이 다시 어지러워졌다. 난 일단 여기서 나가야겠단 생각으로 말했다.
“저도 궁금하긴 했으니까…… 그럼 갔다 올게요.”
“응. 옷만 챙겨 가. 다른 건 거기 다 있더라.”
고개를 끄덕인 난 정말로 가벼운 옷가지만 챙겨선 밖으로 나왔다.
정신은 멍한데 발이 자동으로 나아갔다. 온천이 어디에 있는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난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곳으로 향했다.
정말로 지금 온천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사실 별로 없다.
하지만 그 안쪽을 한번 봐둬야겠단 생각 정도는 있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런데 온천 방향으로 향하던 난 복도에서 한승우와 에르네스트가 서로 스마트폰을 보며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뒤로 돌 뻔했지만, 대리석 복도를 울리는 내 발소리는 너무 컸다. 두 사람은 이미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다가가니 한승우가 웃으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타티아나. 너도 보내줄게.”
“응? 뭐를?”
“사진 찍었던 것들.”
둘이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여섯 명이 나가서 소치 시내를 돌아다니며 찍었던 사진들을 에르네스트에게 보여주고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와이파이를 통해 보내주기까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솔직한 마음으로 그럴 거면 같이 나가지 그랬냐고 한마디 하고 싶다.
내가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한승우가 했던 제안을 대신 받아주었다.
“그건 내가 받은 그대로 보낼게.”
“그러던가. 그럼 난 발렌티나 찾으러 가볼게. 그 애한테도 보내주기로 했었거든.”
아까 차 안에서 약속했던 것을 지키려나 보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계속 같이 있었던 우리가 이제야 사진을 주고받는 것에 이상함을 느낀 듯 물었다.
“왜 아까 안 보내주고?”
“데이터 쓰면 안 되거든.”
그 말에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월초인데 왜 데이터 가지고 그래?”
“평소엔 쓸 일이 없어서 제일 싼 요금제 쓰고 있거든.”
“양 좀 늘려. 너 그러다가 나중에 진짜 필요할 때 후회할 수도 있어.”
“생각해보고.”
한승우는 은근히 마이페이스적인 부분이 있다.
에르네스트가 뭐라 하든 자신이 필요하면 그때 알아서 데이터 용량을 더 늘리든 말든 할 테지.
예전 같았으면 나도 덩달아 같이 걱정했을 텐데, 지금은 말도 잘하고 훨씬 여유로워지기도 해서 솔직히 전혀 걱정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승우의 사진 전송이 끝났고, 그는 이다음은 알아서 하라며 손을 흔들고는 발렌티나를 찾아 가버렸다.
“…….”
갑자기 단둘이 남겨지자 분위기가 이상했다.
물론 평소 같았으면 전혀 이상할 것 없었지만, 지금은 내가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도무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가닥을 잡을 수가 없어서 눈치를 보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쭈뼛거리고 있자 에르네스트는 그러지 말고 그냥 말하라는 듯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이거 그대로 보내주면 돼?”
“아…… 부탁드릴게요.”
난 고개를 끄덕였고, 곧 우리는 스마트폰을 맞대고 데이터 전송을 시작했다.
가만 서 있던 그가 갑자기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뭔가 이상하네. 너희들이 가서 찍어 온 사진을 내가 받아서 다시 너한테 보내준다는 게.”
“그러게요. 후후.”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사진을 보내면서 화면에 드러나는 것들을 보더니 내게 물어보기도 했다.
“여기 이거, 공원 같은 곳은 어디야?”
“리비에라 공원이에요.”
“그래? 재미있어 보이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살짝 부러워하는 눈빛이었다.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난 아까 하려다가 만 한마디를 결국 할 수밖에 없었다.
“에르네스트도 같이 갔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음…… 난 오늘은 별로 돌아다니고 싶지 않아서.”
“그런가요?”
아침에도 똑같은 말로 나가길 거절하긴 했으니 지금이라고 달라질 건 아니었다.
그냥 이 정도로 그만해도 될 일이지만, 난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질문의 방향을 그에게 돌렸다.
나도 모르게 어쩐지 약간 추궁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 돌아다니지 않고 무엇 하고 계셨나요?”
“나? 글쎄…… 곡 쓰고…….”
“……진짜로 곡 쓰셨나요?”
“그냥. 조금.”
온천 이야기를 언제쯤 나오려나 생각하며 그의 오늘 일과를 듣고 있는데, 시선을 내리고 스마트폰 쪽을 보고 있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날 마주했다.
“타티아나.”
“예?”
“그…….”
내가 지금 수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처럼, 그에게도 고민이 많아 보인다.
“혹시 너 작…… 아니지.”
한참이나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연 그는 곧바로 다시 말을 거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너한테 들어야 할 말인데, 너한테 묻기 어렵다는 건 조금 웃기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게 들어야 할 말이 뭐가 있지? 묻기 힘든 건?
뭔가 내게 허락이라도 받아야 하는 일이 있는 걸까. 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까지 주저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지간해선 내가 다 들어줄 텐데.
그의 말과 태도 등에서 여러 가지 유추해보던 난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설마 싶지만 다른 건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더 이상 말하지 않으려는 그에게 지금 묻지 않는다면 영영 지나가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온천에 들어가는 일 말씀이신가요?”
“?”
“그렇지 않아도 전 지금 들어가려고 하는…….”
“무슨 말이야 갑자기?”
에르네스트는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솔직히 나도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쉽진 않다.
하지만 내가 직접 나서서 그를 온천에 데리고 가지 않고 기대만 했다는 이유로 아나스타샤가 날 대신했다면, 그리할 필요가 없게 해야 했다.
“딱히 상관없잖아요? 아나스타샤도 개의치 않았던 것 같고.”
“아니, 잠깐만…….”
잔뜩 당황한 그가 말을 더듬기까지 하며 말했다.
“그 애가 지금 왜 나오는데? 무슨 말을 들은 건데?”
“같이 온천에 갔었던 것 아닌가요?”
“내가 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가 큰 소리를 냈다. 난 깜짝 놀라선 긴장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눈만 깜빡이고 있자 에르네스트는 이마를 짚으며 무언가 중얼거렸다.
언뜻 느껴지기엔 아나스타샤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 같은데, 듣기만 해도 무서워져서 난 그에게 다시 확인차 물었다.
“그럼 오늘 두 번 온천욕 하셨다는 건…….”
“너희 남매는 대체 왜 이렇게 온천에 진심인 거야?”
“예?”
“한 번은 루슬란이 끌고 갔었어. 그리고 두 번째는 혼자 갔었고.”
대체 난 어디에서부터 오해한 걸까.
내 추리에서 맞은 건 딱 한 가지였다. 누군가 그를 데리고 갔다는 것. 하지만 그건 아나스타샤가 아니라 오빠였다.
잠깐만, 오빠가 왜?
그거야말로 머리가 아파지는 일이었다. 오빠도 할 말이 많았던 건가? 하지만 오빠가 할 말은 그리 좋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물고 생각하던 난 나도 모르게 물었다.
“세 번째는요?”
“세 번째는 없어. 난 오늘 할당량 끝났어.”
“할당량?”
그 말은 묘하게 내 신경을 건드려왔다.
딱 잘라 거절하는 그를 다시 시험하는 건 정말 나쁜 짓이다. 그러나 내 다른 면 어딘가에선 그에게 장난을 더 치고 싶어지는 마음이 있었다.
다시 한번 세 번째는 없냐고 물어본다면 그가 뭐라고 할까.
다행인 것은, 아까 잠깐 나가 있던 이성이 다시 돌아와서 입을 열기 전에 몇 번이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었다.
정신을 차린 난 눈을 흘기며 말했다.
“할당량이라고 할 것까진 없잖아요?”
“의사가 그랬어. 하루에 두 번까지로 제한하겠다고.”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래, 그러니까…….”
에르네스트는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은지 목소리를 낮게 깔며 차분하게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 틈에 난 내 목소리를 끼워넣었다.
“하나 더 궁금한 게 있는데요. 루슬란 오빠랑은 무슨 이야기 하셨나요?”
지금 모든 오해가 풀렸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과 궁금증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되레 더 커져 버렸다.
에르네스트는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난 아나스타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빠의 말이라면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에르네스트는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
“별로, 아무 말도 안 했어.”
“온천에 진심인 저 대신 오빠가 데리고 가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 같진 않아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그냥…….”
그는 이럴 때면 좀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 시선은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내려왔다.
그런데 미처 몰랐던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잠시만요.”
그리고 난 손을 뻗어 그의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고 앞자락을 펼쳤다. 당황한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지만, 내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난 내 쇄골 근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왜 이렇게 붉은가요?”
“아, 이거 루슬란이…….”
“뭐?”
대체 무슨 말이냐고 가볍게 되묻자 에르네스트는 한 걸음 더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나는 당연히 앞으로 더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