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8화
타티아나는 좀처럼 말을 편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가족과 친구들은 물론이고 한참이나 어린 동생들에게도 늘 경어를 고수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애정을 쏟는 데에 아낌이 없는 그녀가 이렇게 거리감 있는 어법을 구사하는 것에 대해 에르네스트는 오래전부터 의문이 많았지만, 가깝게 지내다 보니 그것이 타티아나의 신중하고 예민한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말 한 마디를 할 때도 그녀는 기분에 따라 아무렇게나 하지 않고 늘 고심하곤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타티아나만큼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지만, 되레 그렇기에 더더욱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그녀의 성격이었다.
무작정 소심한 성격인 것도 아니었고, 그런 면모도 이젠 많이 익숙해졌다.
친구로선 당연히 조금 더 바라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젠 그것도 그리 아쉽거나 조급하게 느낄 것도 없었다.
‘…….’
타티아나에게 딱 한 명 예외가 있다면 그건 한승우였다.
처음부터 타티아나는 그 녀석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자니, 한승우가 러시아어에 서투니 알아듣기 쉽게 짧고 간결한 어휘와 말투를 쓰다 그리되어버렸다곤 하는데……. 듣고 보면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아니었다.
반말을 쓰다가 말고 경어로 바꾸는 건 정말 어색할 테니까.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경어를 쓰다가 점차 말을 편하게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처음엔 왜 한승우만 다른 취급인지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그것도 타티아나 나름의 기준과 이유가 있다면 기다리면 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기다림은 작년에 조금 결실을 보기도 했다.
‘그것도 봄이었던가……?’
작년 봄,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던 타티아나는 앞으로도 피아노를 두고 내기를 하자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반말을 하기도 했다.
어떤 내용이든 피아노라면 질 생각 없다고 짧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선 이전과는 다른 어떠한 에너지와 확신이 느껴졌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녀가 피아니스트로서 달라졌음을 확신한 건.
“…….”
그런 식으로 타티아나는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었다.
경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언가를 두려워하던 모습도 옅어졌고,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한 걸음씩 거리를 가까이해 온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그녀는 그 거리감을 단숨에 좁혀버리곤 했다.
“자세히 듣고 싶어.”
“…….”
에르네스트는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갑자기 온천에 같이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하더니, 다음엔 루슬란과의 대화를 캐묻는다.
그 어느 하나도 똑바로 말하기가 어려워서 에르네스트는 그냥 이야기를 회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샌가 턱 밑까지 다가온 타티아나는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증거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갑자기 셔츠 단추를 풀어버릴 때만 해도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타티아나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따라붙는다.
“오빠가 뭘 한 거야?”
말을 놓는다고 해서 그녀의 태도가 가벼워지거나 하진 않았다.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은 정중함이 이쪽으로 향한다.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에나 보이는 날카로운 집중력을 시선에 담으면 그것은 그 자체로 무기나 다름없다.
사람을 사로잡고 묶어 놓는 것 정도는 쉽게 해낸다. 아무렇게나 받아치거나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단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같이 온천에 들어갔었잖아? 그리고 나왔는데 사우나를 하고 나온 것처럼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그냥 몸을 말리라고 하더라고. 어, 그렇게 준비된 공간이 있었어.”
“그래서?”
변명 같은 건 할 생각이 없었는데, 어쩐지 모르게 자꾸 변명투가 된다. 에르네스트는 되도록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거기 보니까 자작나무로 된 빗자루가 준비되어 있어서…… 그거 알잖아? 혈액순환 잘되도록 하는 거.”
“아, 그거.”
“그래, 그거. 그걸 해 줬지 루슬란이.”
빗자루 마사지는 에르네스트가 그리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기분 좋은 일도 아니었지만 지금 타티아나 앞에서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절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변명이 맞았다. 이제 와서 왜 루슬란의 변호사가 되어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일단 타티아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그녀는 충분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상식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그 기세를 비로소 조금 누그러뜨리며 천천히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알겠어. 그럴 수도……. 이해는 가. 하지만 오빠는 그래선 안 됐어.”
하지만 그 무슨 말이든 지금 그녀를 완전히 진정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타티아나는 불안한 듯 입을 가린 채 몸을 감싸고는 눈만 들어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그의 왼팔 부근으로 향하다가 차마 직시하진 못하겠다는 듯 살짝 비틀렸다.
“혹시라도 팔에 맞았으면 어쩔 뻔했어……?”
가늘게 떨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에르네스트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애초에 그녀가 온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은 건 혹시라도 의사 앞에 같이 갔다가 팔의 수술 자국이 보이거나 할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그녀는 그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쓸 테니까.
그게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음을 에르네스트는 확신했다.
타티아나가 그나마 지금 이 정도인 것은 에르네스트가 적어도 그녀의 눈에 팔을 보이게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불안감을 부추기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야겠다고 새삼 생각하며 말했다.
“그 정도는 루슬란도 다 염두에 두고 미리 말했었어. 스치지도 않게 하겠다고. 그리고 분명 그렇게 했고.”
“……그렇게 말하곤 목 바로 아래까지 때렸니?”
“어…….”
루슬란도 사실 반쯤은 장난이었고 악의적으로 구는 일은 전혀 없었지만, 거의 얼굴까지 날아왔던 게 있긴 했었다.
어쨌든 다치거나 한 건 아니었으니 과격한 장난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타티아나의 표정은 심각했다.
에르네스트는 또다시 루슬란의 변호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루슬란과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땐 이 빚을 꼭 받아낼 생각이었다.
“그건 내가 아까 두 번째로 들어가서 혼자서 마사지하다가 잘못했나 봐. 아마도.”
“아깐 루슬란 오빠가 했다며?”
“뭐, 그게 큰 상관 있어? 건강에만 좋으면 된 것 아닌가.”
에르네스트는 짧게 대꾸했다. 타티아나가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사실 지금 이걸로도 충분히 창피했다.
그녀의 오빠에게 뭘 당했는지 낱낱이 이야기하라고? 절대로 못 한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이런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자작나무보다 더 아팠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의지는 강했다. 평소 하던 경어도 집어던지고 바짝 다가와 얼굴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해 본 에르네스트는 결국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타티아나.”
“응.”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이 와중에도 귀엽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뭔가 다른 말을 해버릴 것 같은 유혹을 참으며 에르네스트는 말했다.
“잠깐만 진정해 줄래. 나 진짜 괜찮거든……?”
“…….”
타티아나는 비로소 조금 차분해졌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이런 대화 자체가 창피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앞으로 루슬란에게 그녀가 무엇을 할진 모르겠지만, 그건 천천히 진정시키면 될 일이었다.
약간 여유를 찾을 수 있었던 에르네스트는 처음으로 미소를 보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이제부턴 나랑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
“반말해 주는 거냐고.”
일단 편하게 했으면 끝이다. 다시 경어로 올라가는 건 쉽지 않다.
저번엔 당황한 나머지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지만, 이번엔 정확하게 타티아나의 빈틈을 짚고 들어갈 수 있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타티아나는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 아뇨…….”
“이제 와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섭게 캐묻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녀는 생각이 복잡한 눈빛을 하고는 우왕좌왕하더니 양손으로 옆머리를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제가 잠깐 머리에 피가 몰려서…… 미안해요.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난 진짜로 괜찮은데? 그냥 이렇게 하자.”
“시, 싫어요.”
“왜? 괜찮잖아.”
진짜로 괜찮았다. 아니, 정말 바라는 일이었다.
평소 그녀도 충분히 익숙해서 이젠 말을 놓으면 되레 이상할 것 같기도 했지만, 방금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았다.
슬슬 괜찮지 않나? 이 정도는.
에르네스트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타티아나는 그런 그를 힐끔 보더니 중얼거렸다.
“그…… 아니에요. 방금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해요.”
“그게 되겠어? 넌 내가 슬리퍼 신고 카페 갔던 것도 영원히 기억하겠다며?”
“그건 그거고! 이건 달라요!”
그렇게 말한들 설득력이 있을 리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대체 뭐가 다른지 설명해보란 식으로 웃기만 했다.
결국 타티아나는 다시 머리를 감싸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왜 이렇게 경솔할까……. 저번에도 그렇고…….”
“경솔한 거랑은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데.”
“제 입장은 달라요. 이건…….”
저번이란 건 봄에 했던 것이었을까. 그런데 그땐 지금같은 상황이 아니라 분명히 의식하에서 했던 말 같은데.
뭔가 잘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보고 있자 타티아나는 무언가 말을 더 설명해보려는 듯 우물거리다가, 알 수 없는 말로 매듭을 지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요…….”
무슨 말인진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 그녀의 내면적으론 이렇게 경어에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흥분하거나 집중하는 일이 종종 있게 된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그것이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사람이 평정을 잃는 것 정도는 매우 평범하고 흔한 일이었다.
물론 그녀야 평소에도 피아니스트로서의 마인드를 늘 놓지 않고 있으니까 무대 위에서 흥분하면 안 되는 것처럼 평소에도 늘 차분하려고 노력하니 그렇겠지만…….
‘상관없긴 해.’
어떤 이유들이 있는진 몰라도 에르네스트는 그 무엇이라도 존중하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타티아나는 도전적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예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 듯 보였다.
“아무튼, 그런 사소한 건 제쳐놓고요.”
“중요한 거 같은데.”
“전혀요. 그건 제 마음이에요. 그러니 간섭하지 마세요.”
확실하게 선을 긋는 목소리에 에르네스트가 멈칫하는 사이, 타티아나는 다시 휙 다가왔다.
“하지만 전 간섭할 거예요.”
“……너무 네 마음대로인 것 아냐?”
“불만이라도 있으신가요?”
전혀.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누구에게나 간섭하길 좋아한다는 걸 알고, 또 지금 상황 역시 그가 다쳤기 때문에 이루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여러 번 한 적 있었다.
그녀의 책임감이나 연민이 그 모든 이유라면, 그런 건 필요없다고 입장을 정리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그가 의심하는 것들은 결코 주된 이유가 아니라는 걸. 지금 다시 한번 에르네스트는 확신했다.
그리고 그렇게 확신할 수 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기뻤다.
“알았어. 그럼 없었던 걸로.”
“…….”
빅토르나 루슬란과 이야기하면서 베르체노프의 사람들과 했던 대화를 없던 걸로 하는 것엔 이미 익숙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입술을 삐죽이더니 그래도 간섭하겠단 말을 잊진 않았는지 재차 물었다.
“오빠에게도 똑같이 반대로 해 주었나요?”
“반대로? 아, 혈액순환?”
“예.”
“아니. 그건 좀…….”
에르네스트가 난색을 표하자 타티아나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