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9화
실수를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작년 봄 이후로 난 이전에 없던 습관과 시점 등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학습과 의식으로 이룬 행동양식이 쉽게 바뀌진 않으니 내 삶에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은 어느 쪽으로 더 기울어졌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작년 아나스타샤와 이야기했을 때도 그랬다.
난 그녀를 붙잡아 놓고 조금 강압적으로 몰아세우며 숨기고 있던 말들을 끌어내고자 했었고,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한 아나스타샤는 결국 말로 하지 못했던 것들을 꺼내어놓았다.
그 결과가 좋게 이어지진 않았기에 난 어떤 때나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편히 쉬고 있었는 줄 알았던 에르네스트가 그렇지 못했다는 걸 알자마자 그 평정은 너무 쉽게 흔들려버렸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수습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루슬란 오빠에게 당한 것 자체보다 내가 말을 편하게 놓고 있었다는 것에 더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예전부터 내 기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익숙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닐 터였다.
아예 이참에 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난 아직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작년 봄에도 깨어나서 에르네스트를 보고는 기쁨과 반가움에 장난을 걸기도 했지만, 이번엔 생각을 하고 한 장난도 아니었고 그냥 실수에 가까웠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할 자신은 전혀 없었다. 어색할 뿐이다.
일단은 곤란해하며 없던 일로 하자고 했더니 그는 들어주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진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나스타샤는 그냥 넘어가 주긴 했는데, 에르네스트는 그녀보다 조금 더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
부끄러운 마음에 잔뜩 억지를 부려 놨더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복도에 맴도는 공기가 괜히 들뜨며 날 가만두지 않는 기분이었다.
오빠와 있었던 일도 다 물어보았고, 에르네스트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도 제대로 들었다.
역시 오빠가 그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다친 사람이기도 하니 마구 괴롭히진 못했겠지만, 적어도 나와 그의 관계를 거꾸로 약점으로 잡고 멋대로 했다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차라리 진짜로 사귀는 것이었다면 또 모르겠다. 오빠가 날 그냥 프리하게 내버려둘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아니까.
하지만 지금 에르네스트는 그야말로 억울한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먼저 말했다.
“슬슬 저녁이네.”
“그렇네요.”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복도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빛이 더더욱 멀리 뻗고 있었다. 우리 그림자는 거의 반대편 벽에 닿을 정도였다.
난 시간을 다시 확인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식사는요?”
“식당에서 해야지. 어제 그랬잖아. 하루 일정을 따로 보내도 식사는 같이 하자고.”
“다행이네요.”
“다행이긴 무슨, 당연한 거지.”
그는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자리에 함께하며 그날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걸 이해해준 것이다.
이쯤 하면 할 대화는 다 끝났다.
마치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데 누가 먼저 끊을지 눈치를 보는 것처럼 우린 서로를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었다. 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성싶다.
“아직 시간 조금 있으니까, 그럼 난 들어가서 쉴게.”
“아, 그러세요. 그럼…… 이따가.”
“응. 이따 봐.”
격렬했던 대화와 달리 마무리는 가벼웠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이 오가서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생각도 많았던 까닭이었을까.
난 복도를 돌아 사라지는 그를 보다가 창가에 기대었다. 힘이 하나도 없다.
“…….”
머리가 복잡한 만큼이나 이후 해야 할 일들도 많았다.
일단 온천에 가기로 했으니 가 봐야 했고, 루슬란 오빠에게 가서 진지하게 대화를 해볼 필요도 느낀다. 저녁 식사 자리도 굉장히 떠들썩할 테고.
하지만 난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온천은 일단 미뤘다.
원래 그렇게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일단 에르네스트가 누구와 들어갔다 나왔는진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까 이제 가서 확인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만약 가는 것이라면 이따가 저녁 즈음에 혼자 살짝 가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럼 다음은 오빠와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이 역시 판단을 잘 해야 했다.
에르네스트는 오빠와 있었던 일 자체를 내가 안다는 것을 상당히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것도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만약 진짜로 오빠가 에르네스트를 괴롭혔더라도 그는 더더욱 입을 다물 사람이었으니까.
때문에 내가 지금 오빠에게 가서 왜 에르네스트에게 그랬느냐고 따지는 건 정말 생각 없는 최악의 짓이었다.
그건 그저 내 기분에 따라 두 사람을 동시에 바보로 만드는 일이나 다름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 말고는.
“…….”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있는 건 견디기 힘들다.
난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를 듣고 진짜로 화가 났었고, 걱정도 들 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온천에 데리고 간 건 잘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오빠의 과잉행위였다.
난 창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참아야 하는 부분들을 생각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셰프 이안은 다시 한번 재어놓은 고기를 확인하고, 주방의 재료들을 정돈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정확한 수량만큼 있음을 확인한 이안은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5분만 쉬었다가 본격적으로 요리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저녁은 뷔페식으로 여러 메뉴가 등장할 예정이었다.
메뉴도 많고 손님이 10명이나 되기 때문에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그런데 잠깐 그렇게 의자에 앉은 채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이안의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아…… 타티아나 님?”
“셰프 이안. 맞죠?”
화들짝 놀라 일어나자 타티아나는 미안하다는 듯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안은 처음 그녀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타티아나가 아직 어린 나이인데다가 친구들을 데리고 놀러 오는 것이란 말을 듣고는 적당히 발랄하고 아버지와 오빠의 애정을 듬뿍 받는 소녀일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녀의 첫인상은 그 예상과 약간 달랐다. 타티아나는 굉장히 예의 바르고 차분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저녁 식사 후엔 이안을 불러서 요리를 칭찬하며 그의 이름을 한 번 물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선 역시 베르체노프란 말이 나올 정도로 절제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 후론 딱히 더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지금 찾아와서 자신을 부르는 타티아나를 보며 이안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가벼운 옷차림이었으나 결코 어수선하지 않다.
무언가 부탁을 하려는 것처럼 조용히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이안은 빠르게 태도를 다잡고 물었다.
“주방엔 어쩐 일로?”
“차를 끓일 수 있을까 해서요.”
“친구분들과 티타임을 즐기시고 싶으셨다면 그냥 아무에게나 말씀해주셨으면 가져다드렸을 텐데요.”
“그런 게 아니라 직접 준비하고 싶어서요. 안 될까요?”
“안 될 이유가 있겠습니까? 음…… 주전자를 꺼내드리죠.”
뭔진 모르겠지만 쉬운 부탁이었다. 이안은 수십 개의 주전자들 중 그녀가 좋아할 만한 것을 꺼내선 불 위에 올렸다.
그리고 다음으로 찾은 것은 찻잎이었다.
이 주방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건 비단 식재료뿐만이 아니라 차나 디저트 등의 손님맞이에 필요한 여러 부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세트로 갖추어져 있는 찻잎들을 쭉 훑으며 물어보았다.
“차는 무엇이 좋을까요? 홍차라면 다즐링, 실론, 키먼…… 블렌드된 것도 거의 다 있습니다. 디카페인 차도 있고…… 달달한 것도 있군요.”
“제일 쓴 건 어떤 건가요?”
“……예?”
“쓴 거요.”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찬장을 뒤지던 손을 그대로 두고 고개만 돌려 바라보자 타티아나는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홍차 중에서 쓴 것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맛이 쓴 차를 원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이안은 그녀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다들 단맛을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게 아니라 괴로울 정도로 쓴맛이었으면 좋겠는데요.”
전혀 실수 같은 게 아니었다.
이안이 알기로 그녀의 친구는 남자 셋에 여자 둘, 그리고 어린아이가 셋이었다.
대체 누구에게 주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안은 일단 의문을 가지지 않고 그녀가 바라는 것을 내어줄 의무가 있었다.
기계적으로 기억을 되짚은 그는 답을 찾아냈다.
“그거라면…… 저번에 인도에서 들여온 소태차가 있긴 합니다.”
“소태차?”
“예, 소태나무 껍질을 달인 차인데…… 정말 너무 써서 손님맞이엔 쓰지 않는데…….”
“괜찮아요. 손님에게 쓸 건 아니니까. 그럼 그걸로 주세요.”
손님이 아니라면 직접 마시기라도 할 건가?
뭔가 이해가 안 갔지만 이안은 더 묻지 않고 그냥 찻잎을 꺼냈다.
베르체노프의 누구라도 무언가 지시가 내려오면 이유를 묻는 건 금기시된다.
물론 타티아나는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으니 살짝 물어봐도 그리 나쁘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이안은 절대로 그녀를 무시해선 안 된다고 여겼다. 유리나 루슬란과 똑같이 대해야만 했다.
그렇게 물을 끓이고 소태차를 준비하고 있는데, 주방을 슥 둘러보던 타티아나가 갑자기 돌발행동을 했다.
“이것, 소금 맞나요?”
“예. 그렇습니다.”
“조금 쓸게요.”
뭐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녀는 소금통을 가져가더니 끓는 물 위에 털어넣기 시작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이안이 경악하며 바라보아도 타티아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이안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너무 자연스러운 태도라서 저렇게 시작하는 요리가 뭔가 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이안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건 타티아나가 아니라 루슬란이 했더라도 똑같이 물어봤을 것이다.
“누굴 죽이실 작정이십니까……?”
“어머, 죽이다뇨? 무서운 말씀 마세요.”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더니 소금통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건 정당한 복수랍니다.”
“…….”
누군진 몰라도 꽤 차분한 태도의 그녀가 이렇게 복수란 말을 입에 담을 정도라면 심한 장난을 당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쨌든 상황을 이해한 이안은 한시름 놓으며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쨌든간에 저걸 마신다고 사람이 죽거나 하진 않을 테고, 이 또한 타티아나와 그녀의 친구들에게 한바탕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이런 협조는 별것도 아니었다.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안은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표정엔 그저 장난기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쟁반 위에 디저트도 몇 개 챙겨 올려놓고, 작은 찻주전자에 소태차를 우려내면서 타티아나는 이안을 슥 돌아보았다.
“아, 맞다. 이안.”
“예.”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이안은 지금 이 시간에 저랑 만난 적 없는 거예요. 아셨죠?”
“……예?”
“다 이안을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그냥 장난을 치는 사람의 눈빛치고는 지나치게 살벌했다.
이안은 머뭇거리며 손을 어깨 너머로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음, 아예 잠깐 나가 있을까요?”
“그러셔도 좋고요. 이안이 돌아왔을 때 전 여기 없을 거예요.”
타티아나는 서늘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이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주방을 나왔다.
그는 방금 본 모든 것을 정말로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