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0화
루슬란은 이곳 소치에 단순히 놀러온 것이 아니었다.
공개적인 이유로는 동생인 타티아나와 친구들이 신년 휴가차 놀러온 것에 대한 보호자로 동행하는 것이었지만, 자주 올 수 없었던 이 근방에 대한 시찰 등도 또 다른 목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루슬란은 의무적으로 하루에 한 번은 모스크바로 연락을 해야만 했다.
루슬란이 전화로 유리에게 전하는 말은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비즈니스적인 면이 강했다.
이곳에서 주어지는 정보들을 수집하여 분류하고, 견해나 결론을 도출하여 보고하는 것은 그가 매번 치러야 하는 중요한 시험이나 다름없었다.
“어제 말씀드렸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쭉 둘러봐도 괜찮더군요.”
- 그래.
루슬란이 내놓은 뷰는 이번에도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유리는 냉정한 관리자였지만 엄격하기도 해서 제대로 된 결과물엔 적합한 평을 내려준다.
못마땅하다는 목소리와 함께 질문들이 날아들지 않는 것에 대해 루슬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오늘은 이 정도로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보고가 끝난 건 아니다. 루슬란에겐 이제 후계자가 아니라 오빠로서 전해야 할 말들이 남아 있었다.
“타티아나는 아침부터 친구들과 소치 시내로 나갔고…… 곧 돌아올 시간입니다.”
- 관광을 나갔다고? 별장에 있기로 했다면서.
“아무리 그래도 처음 와본 곳이니 궁금할 테죠.”
- 그건 그렇지.
유리가 타티아나를 대하는 태도는 다분히 조심스럽다.
아무 곳에나 내보내지 않고 집안에 꽁꽁 감춰두고 싶어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뛰어난 능력을 세계에 알리게 하는 데에 지지를 아끼지 않기도 했다.
아버지가 꽤 복잡한 마음이리라 루슬란은 예상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루슬란 자신도 비슷한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빅토르에게서 돌아가겠다는 보고 메시지를 받았던 것을 떠올리며 루슬란은 지금쯤 타티아나가 어디에 있을지 가늠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유리가 한 가지 빼놓았던 것을 물어보았다.
- 그럼 오늘도 인사는 못 했겠군?
누굴 말씀하시는 거냐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루슬란은 지금 자신이 인사를 해야만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충분히 잘 안다.
그리고 오늘 만족할 정도로 했다고 생각했다.
“아뇨, 에르네스트는 나가지 않고 남아 있어서.”
- 왜 남아 있었지? 네가 남아 있으라고 했나?
“제가 바보입니까?”
명목상 루슬란이 감시차 따라오긴 했지만 에르네스트의 일에 대해서라면 반대로 타티아나가 감시자라도 된 마냥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다.
루슬란은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오늘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덕분이다. 그 이유가 어쨌든 간에 적어도 루슬란의 입장에선.
“그냥 본인이 남겠다고 했습니다. 아나스타샤와 리처드 두 사람도 역시.”
- 그래, 그래서?
“붙잡아서 이야기를 좀 해 봤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색함을 조금 풀어보고 말문을 터볼까 하다가, 결국은 그냥 온천에 집어넣고 되는 대로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 전부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기에 루슬란은 대충 흘리듯 이야기했다.
“별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그냥…… 제 나름의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궁금했던 것도 물어봤고.”
- 궁금했던 것?
“뭐…… 원하는 것이 달리 없는지…… 그런 거죠.”
그건 이전부터 유리가 상당히 고민하던 문제였다.
국가적 손실이라 할 정도로 에르네스트의 부상은 심각한 문제였다.
거기에 대해서 그냥 감사 인사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베르체노프는 허술하지 않다.
타티아나는 아예 직접적으로 그 손실을 메우기 위해 노력할 정도였으니, 유리와 루슬란 역시 노력하는 중이었다.
- 내가 너희들 모르게 스테판과 이야기한 것이 있다.
그건 루슬란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적어도 에르네스트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의 아버지인 스테판에게도 일방적으로 아들의 문제에 대한 보상을 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러나 유리의 입장에선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어떤 종류의 얼마만큼의 혜택인지는 모르겠지만, 루슬란은 그것이 적절한 정도의 마음의 표시가 되리라 생각했다.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건 에르네스트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렇겠지.
아버지가 무엇을 받았든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모른다. 그리고 알 생각도 없어 보였다.
루슬란을 앞에 두고 에르네스트는 물론 조금 불편해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온 태도와 그 근간의 이유에 대해선 전혀 의심 없는 떳떳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네가 보기엔 어떻지?
“…….”
오늘 비로소 에르네스트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직접 봤다고 할 수 있는 루슬란은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미처 언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인간적인 가치는 전화로 이렇게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루슬란은 일단 아버지에게 보고할 수 있는 형식으로 정리한 말들을 우선적으로 꺼냈다.
“문제가 있는 녀석은 아닙니다. 보기에 흠결 없고, 머리도 빠르게 도는 것 같고. 이해도 밝고. 자기 일에 열정적이고…… 어찌 보면 그 부분은 타티아나와 닮기도 했군요.”
- 타티아나와?
“주위에서 누가 뭐라 하든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것 말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집중해서 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루슬란이 보기에 타티아나는 단지 즐거움만으로 피아노를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에게 있어 피아노는 미련이자 고통이었고, 스스로에게 휘두르는 망치와도 같았다.
언제라도 그만두거나 쉬고 싶을 터였다.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곳도 많았고, 응석이라도 부린다면 받아줄 사람이 많다는 것 또한 모르지 않겠지.
그러나 쉼없이 정련을 계속해 나가며 타티아나는 오롯한 결과물들을 세워 스스로를 증명했다.
이건 누군가가 가르쳐주거나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에르네스트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스테판이 꽤 강력하게 에르네스트를 후계로 교육시키고자 했다는 걸 루슬란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스스로 정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루슬란은 입장을 바꿔 놓는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분명 어려웠으리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타티아나의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군요.”
- 마음에 들어 하나? 확실하게?
그 물음에 루슬란은 멈칫했다.
너무 좋은 말만 많이 해준 것 같다.
사감 없이 평가하는 입장으로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루슬란에겐 단지 객관적 입장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도 안 되고.
편협하고, 말이 안 통하고, 무자비한 장애물의 역할 또한 루슬란이 해야 할 일이었다.
뒤늦게 심술궂은 감정이 든 루슬란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글쎄요, 모르죠. 단순한 책임감일지도.”
- 책임감이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본래 진지한 성격이었으니까.
때문에 그 의심을 놓고 루슬란은 에르네스트에게 그대로 대놓고 물어봤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대꾸했었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루슬란은 일부러 이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자, 유리는 더 묻는 대신 짧게 칭찬했다.
- 알겠다. 고생했다 루슬란.
“고생은요 무슨. 푹 쉬고 있는데.”
- 책임감을 있는 그대로 마주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건 네게도 다르지 않겠지.
“…….”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부분을 유리는 정확하게 짚었다.
지금까지 타티아나의 책임감에 초점을 두고 생각을 해 왔지만, 루슬란 역시 에르네스트에게 느끼는 고마운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진 달리 따져볼 것도 없이 명확했다.
딱히 다를 바 없다면 조금 더 자세히 보는 것 역시 중요했다. 루슬란은 아버지의 예리한 관점을 느끼며 고개를 주억였다.
말이 없어도 그 반응이 느껴지는지 유리가 마지막으로 대화의 매듭을 지었다.
- 쉬거라.
“예, 아버지.”
전화를 끊고 의자를 뒤로 기울여 까딱이며 루슬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제 분명 에르네스트와 본심을 어느 정도는 터놓은 대화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그걸론 부족하다.
필요하다면 다른 때에 시간을 내서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루슬란은 천천히 다시 한번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흘러, 밖이 약간 소란스러워짐을 느낀 루슬란은 까딱이던 의자를 멈췄다. 아무래도 나갔던 녀석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빅토르에게도 보고하는 메시지가 왔다.
바로 내려가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나 싶었다. 어차피 저녁때면 다 같이 식당에 모일 예정이었다.
루슬란은 일단 적당히 쉬다가 그때나 얼굴을 비출 생각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있었다. 이어진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정했다.
“오빠, 계신가요?”
“들어와.”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
무슨 일인가 싶어 루슬란은 의자에서 일어나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그 너머엔 타티아나가 양손으로 차와 디저트가 올라간 쟁반을 들고 있었다.
루슬란은 약간 놀랐다. 그냥 돌아왔다고 말하러 온 줄 알았는데, 티타임을 요청하는 걸 보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나 보다.
타티아나는 평소 말이 그리 많진 않지만, 이렇게 종종 대화를 하고 싶어하며 가까이 다가올 때가 있었다.
루슬란은 기분 좋게 그녀를 안으로 들이고 쟁반을 대신 받아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저희 방금 돌아왔어요.”
“응, 들리더라.”
“오빠는 무엇 하고 계셨나요?”
“나? 게임.”
루슬란은 아무렇지도 않게 스마트폰을 흔들흔들 보이며 말했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다가도 누군가 들어오면 대충 이렇게 둘러대곤 했다.
타티아나는 정말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루슬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너도 할래?”
“아뇨…… 전 괜찮아요.”
피아노 외엔 별로 관심이 없는 그녀는 가볍게 거절하고는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그보다 같이 차 마시고 싶어서 가지고 왔어요.”
“무슨 차인데?”
“녹차예요.”
타티아나가 루슬란을 위해 차를 타줄 때면 보통 홍차와 바레니예를 준비해 준다. 이미 그의 취향 정도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녹차와 쿠키는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원하는 홍차를 구하지 못했으려나.
잔을 들고 향을 맡아 본 루슬란은 뭔가 다른 향에 살짝 인상을 찡그릴 뻔했지만 간신히 평온하게 말할 수 있었다.
“향이 독특하네.”
“그,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어요.”
“너 원래 냄새 잘 맡지 않아?”
“감기일지도…….”
중얼거리던 타티아나는 코를 훌쩍이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약간 걱정이 든 루슬란은 다시 잔을 슬쩍 내려놓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리 따뜻한 곳이라 하더라도 밖을 오래 돌아다녔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네. 이거 마시고 나서 따뜻한 물에 샤워부터 해. 감기에 걸리면 너만 손해니까.”
“알아요. 뭐…….”
“그래도 밖에서 친구들이랑 재미있었나 보네.”
예전 같았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걱정했을지도 모르겠다. 타티아나는 정말 기침을 한 번 해도 죽을 것같이 깊은 기침을 하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건강해져서 이 정도론 되레 면역력에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느긋하게 웃으며 루슬란이 말했다.
“네가 즐거웠다면 됐어.”
“…….”
그 말에도 타티아나는 뭔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마음이 편치 않은 건지, 아니면 정말 감기가 문제인 건지 모르겠다.
“그럼 잘 마실게.”
루슬란은 잔을 들고 빠르게 녹차를 들이켰다. 얼른 마시고는 따뜻하게 쉬라고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차가 입술에 닿자마자 느껴진 묘한 위화감은 입안으로 들어오자 아주 강렬한 자극으로 변했다.
무슨 맛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쓴맛? 짠맛? 맛이 아니라 고통에 가까운 무언가가 루슬란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윽……!”
하마터면 그대로 뱉을 뻔했다. 그가 간신히 뱉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몸에 밴 에티켓 덕분이었다.
타티아나는 장난기와 걱정이 뒤섞인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순간에 모든 걸 알아차린 루슬란은 이를 바드득 갈며 물었다.
“너…… 이게 무슨…….”
“어떠신가요?”
“어떠냐고? 욱, 장난해 지금? 너도 마셔봐!”
“사양할게요.”
가만두지 않겠다고 작정하며 루슬란이 몸을 일으키자 마치 예상했다는 듯 타티아나가 뒤로 물러섰다.
루슬란은 먼 타티아나를 붙잡는 대신 가까이에 있는 쿠키를 일단 집어 응급치료로 입에 투여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뭔가 죽을 약을 타진 않았을 테고, 장난이겠지만 그럼에도 루슬란은 배신감을 느꼈다.
방금 전에 아버지에게 네가 걱정하는 녀석에 대해 좋은 말을 얼마나 많이 해줬는데, 이걸 이렇게 갚아?
으르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자 타티아나는 문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제가 돌아오자마자 바로 내려오지 않으신 벌이에요.”
“뭐……? 그게 이유라고?”
“일단은요.”
“너 앞으로 감당할 수 있어? 나 혀가 마비된 것 같은데? 뭘 먹인 거야 대체??”
루슬란은 입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따졌다. 진짜로 마취제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미안해하는 미소를 짓던 타티아나는 그래도 영구적인 문제가 생길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음…… 이걸 먹으면 조금 괜찮아지실 것 같은데, 지금은 가까이 가기엔 무서우니까…… 던져도 되죠?”
“?”
“받으세요.”
그리고 타티아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무언가를 휙 던졌다. 조준이 엉망이었지만 루슬란은 손을 뻗어 잡아냈다. 뭔가 봤더니 사탕이었다.
당연히 화가 더 났다. 진짜 장난하는 건가?
당장에 붙잡아놓고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으로 루슬란이 발을 뻗자 눈치를 챈 타티아나가 재빠르게 문을 열고 도망쳤다.
“……뭐냐 진짜.”
그녀가 기억이 돌아온 후로 꽤 장난을 걸어오기도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건 처음이었다.
루슬란은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쓰고 아픈 입에다가 타티아나가 준 사탕을 넣었다.
한 번 당했으니 두 번째를 의심할 만한데도, 그는 사탕에 문제가 없으리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