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1화
확실하게 문을 닫고 도망 나온 나는 미리 봐뒀던 대로 복도를 걸어 나와선 코너를 돌아 계단을 내려왔다. 미리 봐뒀던 도주로였다.
발소리가 나게 뛰면 위치가 빠르게 발각될까 싶어서 소리 없이 조용히 움직였는데, 계단을 내려오다가 혹시나 싶어 위쪽으로 귀를 기울여봐도 날 따라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분노한 오빠가 작정하고 쫓아오진 않아 다행이었다. 마지막에 사탕을 건네준 것이 도움이 되었나보다.
“후우…….”
그대로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나는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한 번도 뛰지 않고 조용히 행동했는데도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아직도 심장이 거세게 뛴다.
“…….”
오빠를 골탕 먹여야겠다고 다짐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복수심 반 장난기 반 정도가 전부였다.
어차피 진짜로 오빠를 죽이진 못할 테니까, 뒷감당이야 어떻게 되겠지라는 가벼운 생각 역시 하고 있었고.
하지만 막상 오빠를 마주하니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중간에 그냥 도로 가지고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주저하는 사이 오빠는 의심 없이 소금을 탄 소태차를 입에 대고 말았다.
솔직히 한 모금 정도 마시다가 바로 뱉어버리고 내려놓을 줄 알았다.
어떻게 봐도 이건 사람이 마실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오빠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잔뜩 마시고 나서야 이상함을 알아차리고도 그냥 마셔버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긴 했지만, 내심 적잖이 당황했다.
차라리 그냥 뱉었다면 치우는 걸 도와주면서 가벼운 장난으로 수습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걸 왜 마셔버린 거야?
“당한 사람 탓을 할 순 없지만…….”
장난을 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받아주었냐고 탓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만큼 오빠가 날 믿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갑자기 급격하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다시 돌아가서 용서를 빌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솔직히 무섭다.
지금은 일단 오빠의 화가 조금 식기까지 기다리는 게 현명할 것 같다.
“…….”
괜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는 미뤄두기로 했다.
어쨌건 작전은 훌륭하게 성공했으니 자축해도 될 일이다.
이게 에르네스트의 복수였다는 것도 다른 이유로 둘러대 놓았고…… 아마 당했다는 사실 자체에 중점을 둘 뿐 진의를 알아차리진 못하겠지.
그걸로 충분했다. 앞으로의 일은 잘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도 오빠가 화를 삭이지 못하고 날 붙잡아 똑같은 걸 강제로 먹이더라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었다.
난 공중에 뜬 다리를 흔들거리며 나도 모를 노래를 흥얼거렸다.
“……언니?”
“?”
몸이 조금 식어간다 느껴질 즈음이었다. 인기척이 들려 그쪽을 바라보자 언제 나왔는지 류보비가 어깨를 옹송그리며 서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씻고 나온 건지 옷도 갈아입었고 상쾌해 보인다. 하지만 그 표정은 어쩐지 약간 어두웠다.
어쨌거나 류보비가 반가웠던 난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아, 류보비.”
“안 추워요? 밖에서 왜 그러고 있어요? 다들 안에 있는데.”
류보비가 보기엔 내가 여기서 혼자 있는 것이 꽤 처량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사실 난 복수에 성공해놓곤 뒷감당이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기하긴 창피하다.
어쩔 수 없이 배시시 웃으며 얼버무렸다.
“잠깐 바람 좀 쐬려고요.”
여태 소치 시내를 돌아다니며 바람을 쐬고 왔기에 이건 좀 설득력 없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류보비는 거기에 의문을 더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럼 저도 바람 쐴래요.”
그리고 류보비는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벤치는 꽤 길었지만, 그녀는 거리를 두지 않고 찰싹 달라붙었다.
류보비와 내가 이루는 공간은 뭔가 온도 자체도 올라간 것 같고 바람도 덜 부는 것 같았다.
겨우 사람이 한 명 더 늘었을 뿐인데 이토록 많은 것이 다르게 느껴지는구나 생각하며 난 다리를 늘어뜨렸다.
앉아있는 류보비도 가만히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며 물었다.
“노래하고 있었어요?”
“예.”
“그거 저도 어릴 때 들어봤던 것 같은데. 무슨 노래예요?”
“글쎄요……?”
흘러들어온 기억이 이끄는 노래는 종종 내 목소리를 다른 어딘가 먼 곳으로 데려다 놓곤 했다.
어떠한 공부나 연습 없이 음악 그 자체에 따르는 기분은 꽤 편안했다.
때문에 난 기억 속에 맴도는 노래들을 구태여 분석하거나 알려 들지 않았다. 그저 떠오를 때 입술에 올릴 뿐이다.
때문에 이번에도 마땅한 대답을 돌려주지 못하고 미소로 얼버무리자 류보비의 표정이 한층 심각해졌다.
이게 그렇게 심각할 일인가 해서 나도 덩달아 살짝 긴장한 사이, 류보비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혹시…… 우리 나갔다가 늦게 들어온 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
이해가 안 가서 되묻자 류보비는 내 팔을 덥석 잡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안해하는 건지 모르겠다.
우린 딱히 늦게 들어온 것도 아니고, 그래서 뭔가 잘못된 것도 없는데.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류보비가 이어 말했다.
“루슬란 오빠랑 싸운 게 아닌가 해서…….”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잖아요? 씻고 나오니까 루슬란 오빠는 언니 어디 갔냐고 묻고 있고…… 언니는 여기서 혼자 앉아있고.”
류보비의 눈으로 상황을 본다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 보고 나서야 난 왜 불안해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로 누구도 무슨 일인지 가르쳐주지 않고 이런 분위기라면 오해를 할 만도 했다.
내가 깜짝 놀란 표정을 하자 류보비가 한층 더 강하게 물어보았다.
“역시 싸웠던 거죠?”
생각보다 꽤 영민한 면이 있는 류보비가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줄은 미처 몰랐다.
나와 오빠가 놀러와서까지 싸울 일이라곤 여덟 명이나 되는 자신들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불안했을까.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에 난 류보비를 안아 주며 웃었다.
“아하하하, 아니에요. 전혀.”
“그럼 뭐예요?”
“음…… 그게…….”
어설프게 넘어가려고 해선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도 잘 생각해야만 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 제가 류보비에게 혼날지도 모르겠는데요.”
“?”
궁금해하는 류보비를 놓고 난 방금 내가 저질렀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주방에 가서 가장 쓰다고 하는 소태차를 찾은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던 류보비는 거기에 소금까지 타선 녹차라고 속이고 루슬란 오빠에게 가져갔단 이야기로 향하니 거의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간단히 요약한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류보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소금 소태차요?”
“예. 그래서 지금 오빠한테 붙잡히면 큰일 나요.”
“그래서 도망 나와 있던 거예요?”
“맞아요.”
솔직히 이런 유치한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내 개인적인 감정이 상당히 많이 들어간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놀라고 불안했을 류보비를 진정시키기 위해선 말해줘야만 했다.
이윽고 상황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는지, 그제야 류보비는 한숨을 얕게 내쉬었다.
“깜짝 놀랐어요…….”
“미안해요. 놀랐죠. 오빠가 혹시 제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겁이라도 줬나요?”
“그게 아니라…… 언니도 그런 걸 하는구나 해서요.”
내 이미지가 망가지는 소리가 들린다.
류보비에겐 내 어른스러운 모습만 보이고 싶었는데…… 이렇게 유치한 면을 보여버리게 되니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내가 짓궂은 장난을 친다는 게 그리 놀랄 일인가?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난 되레 뻔뻔하게 나가기로 결정했다.
“왜요? 전 이 정도도 못할 줄 알았나요?”
“그건 아닌데…….”
뭔가 생각나는 것을 단어로 정리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던 류보비는 이윽고 내게 말했다.
“화가 많이 났었나봐요.”
그 말에 뜨끔했다.
류보비는 정말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내가 평소에 재미를 위해 행동하는 일이 많지 않다는 걸 알기에, 어지간해선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루슬란 오빠에게 화가 날 일은 물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 말을 직접 들으니까 내 자신이 그렇게 감정적이었단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스스로 느꼈던 것보다 더 화가 많이 났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감정을 직시하자 되레 조금 차분해질 수 있었다.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이유도 없었던 건 아니죠.”
“무슨 이유였어요? 루슬란 오빠가 먼저 잘못했던 거죠?”
“그것까지 말씀드리긴 좀 그래요. 음…… 소태차 한 잔으로 풀릴 정도였으니까 그리 심각한 건 아니죠.”
“심한 것 같은데…….”
류보비는 눈가를 찡그렸다.
난 걱정할 것 없다는 의미로 그녀의 옆머리를 매만졌다. 정 안 되면 오빠가 타줄 소태차를 마시고 기절해버리면 그만이다.
아깐 일단 도망치자는 생각이 우선이었지만, 솔직히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니까 이제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 태연한 모습이 걱정되는지 류보비가 경고했다.
“아무튼, 아무튼간에. 조심하세요, 언니. 루슬란 오빠 가만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눈빛이 이상했다고요.”
“앞으로 며칠 마실 건 조심해야겠단 생각은 하고 있어요.”
“그걸로…… 아, 안 되겠다. 옆에 있어 줄게요.”
“예?”
무슨 말인가 했더니 류보비가 덥석 안겨 왔다.
“난 언니 편이니까.”
“류보비가 절 지켜주겠다는 건가요?”
“그럴 힘까진 없지만요.”
“후후후, 좋아요. 기쁘네요.”
난 행복하게 웃으며 류보비를 마주 안았다.
아무래도 오빠는 내가 혼자 있을 때를 노릴 테니까, 류보비가 옆에서 경계하고 있다면 섣불리 무언가 시도하진 않겠지.
어린애를 방패로 삼는 건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지금 기쁜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나는 류보비의 손을 이끌고 일어났다.
“그럼 이만 들어갈까요?”
“그럴까요?”
내가 자신있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깨달은 류보비도 해맑게 웃으며 내 옆을 따라왔다.
***
류보비는 신참 경호원으로서의 역할을 정말로 톡톡히 해냈다.
저녁 식사 전까지 시간을 보내면서 난 루슬란 오빠의 시선을 몇 번이나 느꼈지만, 류보비가 붙어 있자 한 번도 오빠는 내 옆에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류보비가 내 편이 되어버렸다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상황을 알고도 붙었다면 설득이 무의미하고, 상황을 모르고 붙었다면 자신이 소태차를 마셨단 사실을 구태여 알리고 싶지 않을 테니 꽤 고민하는 눈치였다.
난 오빠에게 미안했지만 당분간은 류보비의 열의를 받아주기로 했기에 아무 말 않고 모른 척했다.
그렇게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오빠는 베르체노프 별장의 두 호스트로서 충실하게 손님들을 챙겼다.
“식사는 어땠어?”
“정말 훌륭했어요. 처음 먹어 보는 것들도 많았는데 전부 입맛에 맞고 맛있더군요. 이런 뷔페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셰프에게 전해둘게.”
루슬란 오빠는 한승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꽤 이야기도 하는 걸 보니 그럭저럭 친해진 것 같기도 하고…… 조금 궁금했다.
그래서 나도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하다 말고 그 옆으로 살짝 다가갔을 때였다.
느닷없이 루슬란 오빠가 우리를 불렀다.
“저녁엔 뭐 할 거야? 너희들.”
식사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보내기로 했기에 저녁에도 우린 각자 쉬거나 삼삼오오 시설을 즐길 예정이었다.
어제도 그랬었는데 루슬란 오빠는 그런 우릴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방으로 들어갔었고.
보호자이자 감시자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끼어서 같이 있으면 불편할 것이라 생각한 오빠의 배려가 느껴졌었다.
그런데 오늘 오빠는 확실히 달랐다. 무언가 작정을 한 눈빛이었다.
아나스타샤가 흥미를 보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전 푹 쉬었으니까 살짝 움직여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 나갔다 온 너희는?”
“전 조금 쉬려고요.”
역시 각자 이야기가 달랐다.
그런데 루슬란 오빠는 그 모두를 한데 시야에 담고는 제안했다.
“다들 특별하게 정해놓은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럼 다 같이 게임이나 하지 않을래?”
“게임이요?”
“그래. 음,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벌칙도 정해놓고 하자고. 내가 오늘 벌칙으로 아주 좋을 만한 걸 하나 알아냈거든.”
그 순간 오빠의 시선이 날카롭게 내 쪽으로 향했다.
내가 류보비를 껴안고 있으니까 직접적으로 뭔가 할 순 없으니, 이렇게라도 어떻게든 내게 복수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역시 일방적인 손해를 오래 떠안고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사업가로선 훌륭한 것 아닐까. 난 약간 감탄하면서도 이젠 빠져나갈 수 없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