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2화
어젠 그냥 알아서 놀라며 방으로 들어갔던 루슬란 오빠가 스스로 구심점이 되자 자연스레 모두들 모이게 되었다.
난 오빠가 갑자기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게임을 주관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분위기가 이렇게 좋은데 망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아무 말 없이 따랐다.
류보비가 내 옆에 있다는 이유로 오빠가 내게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나 역시 친구들이 옆에 있기에 오빠가 무엇을 하든 막을 수 없었다.
기묘한 균형이 오빠와 날 이곳에 묶어두고 있다.
어쨌든 이번엔 오빠의 순서였다.
“자, 그럼 다들…… 열 명이었지? 우리들.”
“그렇죠?”
“애들까지 다 합하면요. 근데 뭐 하시려고요?”
둥그런 티 테이블에 둘러앉은 우리들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오빠를 바라보았다.
그 상황 가운데에 있자니 어쩐지 옛날 생각이 나기도 했다. 한승우가 그런 내 기분을 대신 이야기했다.
“재작년 기억이 나네요. 마피아 게임 재밌었죠.”
재작년이라 하니 정말 오래전 일인 것 같지만, 여름방학 때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던 것은 아직도 내 머릿속엔 생생하게 남아있는 추억들이었다.
지금 이 테이블의 구도는 루슬란 오빠가 사회를 맡았던 마피아 게임의 상황과 비슷했다.
그때 한승우와 아나스타샤는 정말 물 만난 고기처럼 게임에 대한 실력을 드러냈다.
물론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이를 가는 사람도 있었다.
한승우와 같은 마피아팀으로 활약하다가 배신당한 적이 있는 에르네스트는 그 이후에 했었던 복수도 충분치 않았다는 듯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무조건 너만 죽인다. 한승우.”
“1년 전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기억한다고 한 건 네가 먼저였잖아. 방금 무슨 말 했는지도 몰라?”
“그건 즐거웠던 기억이고. 원한은 잊어야지.”
“그걸 왜 네가 정하는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말해도 한승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옛 속담이 어떻다는 등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해대며 얼렁뚱땅 넘어갔다.
정말 점점 익숙해질수록 능청스러움만 느는 것 같아 걱정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난 기분 좋게 웃기만 했다.
그때 했던 게임이 오래토록 우리의 기억에 남아 서로를 잇고 있다는 건 어떻게 보더라도 기쁜 일이었다.
루슬란 오빠도 피식 웃더니 이야기했다.
“그래, 마피아 게임도 재밌었지. 그런데 그건 팀 단위라서 벌칙 적용이 조금 애매해.”
“벌칙이 중요한가요?”
“어…… 아무튼, 나도 생각을 좀 해봤는데. 사람이 많을수록 간단한 게 좋겠더라고. 마피아 게임은 이따가 해봐도 되잖아?”
마음이 꽤 급한지 루슬란 오빠는 이렇다 할 설명도 하지 않고 무작정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 의견이 그냥 먹힐 수 있었던 건, 열 명이서 할 수 있는 파티 게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들이 세 명이나 있으니 몇 가지 없는 종류 내에서도 또 제한된다.
때문에 우린 오빠가 어떤 게임을 가지고 올지에 대한 기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게 있어서 가지고 와봤어.”
“스틱 스택stick stack?”
언제 가지고 왔는지, 오빠는 테이블 아래 종이 가방에서 박스 하나를 꺼냈다.
한눈에 봐도 게임용 도구들이 들어 있을 법한 그 박스 위엔 스틱 스택이란 영문이 적혀 있었다.
미국에서 직수입이라도 해온 걸까? 잘 모르겠지만 딱히 언어가 중요한 게임 같아 보이진 않는다.
상자를 열어 그 안의 것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오빠가 말했다.
“간단히 규칙을 설명해줄게.”
게임 규칙은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해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쉽게 이해하자면 타워 위에 순서대로 기다란 막대를 올려놓으며 쌓는 게임이었다.
그렇게만 놓고 보면 너무 단순해서 이게 게임성이 있을까 싶지만, 당연히 조금 상세한 룰이 게임을 복잡하게 만들어주었다.
일단 타워는 안정감 있게 서있는 것이 아니라 와인잔처럼 생겼는데 목 부분이 스프링이라서 좌우로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위에다가 무언가 쌓을 때 균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쉽게 한 쪽으로 휘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막대 역시 아무렇게나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빨강, 노랑, 파랑, 하양 이렇게 네 가지 색상이 막대 위에 두 개에서 세 개까지 칠해져 있었는데, 타워 위에 올라가 있는 막대의 색에 겹치도록 다음 막대들을 올려놓아야만 했다.
트위스터 게임을 타워 위에서 막대로 하는 것 같은 개념이었다.
“그리 복잡하진 않은데 쉽진 않겠어요.”
“잘 보면서 해야 할 거야.”
그리고 오빠는 일단 공식 룰을 가르쳐주었다.
타워를 쓰러뜨리면 5점, 그리고 막대를 쌓다가 기존의 막대들만 떨어뜨리면 막대당 1점. 그렇게 총 11점을 먼저 얻은 사람이 지게 되었다.
이미 이 게임을 꿰뚫어 본 아나스타샤는 공식 룰을 듣자마자 물었다.
“본래 규칙대로 하면 한 번 쓰러뜨린다고 해도 지는 게 아니겠네요?”
“그렇지. 11점이 되어야 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인원이 많으면 규칙 적용하기도 힘드니…….”
점수판을 놓고 펜으로 점수를 적어가면서 계산하면 공식 룰대로 해도 못할 건 없었지만, 루슬란 오빠는 과감하게 로컬 룰을 도입했다.
“그냥 타워를 쓰러뜨리면 마시는 걸로 하자.”
“그럼 젠가랑 비슷하겠네요?”
“단순하지?”
타워 위에 막대로 트위스터 게임을 하다가 타워를 쓰러뜨리면 지는 것. 정말 간단해졌다.
아마 공식 룰로 하는 것보다 지는 사람도 잔뜩 나오겠지.
이게 다 나 때문에 약이 잔뜩 오른 오빠가 어떻게든 내게 벌칙으로 되갚아주려 해서라는 걸 아는 난 살짝 죄책감마저 느꼈다.
다행히 주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모두들 새로운 게임에 신선함을 느끼고 있었고,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으니 바로 하고 싶어 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벌칙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뿐이다. 이 맹점을 알아본 건 역시 아나스타샤였다.
그녀는 오빠의 말 가운데에서 힌트를 딱 짚어냈다.
“게임은 단순한데…… 마시다니, 뭘요?”
“아.”
그제야 오빠는 잔뜩 꾸며낸 탄성으로 알려 주는 게 늦었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더니, 뒤편을 향해 말했다.
“이안. 아까 말했던 것 준비됐습니까?”
“예, 루슬란 님.”
그 말에 따라 우리 앞에 등장한 건 아까 날 도와주었던 셰프 이안이었다.
‘이안……!’
설마 오빠에게 취조라도 당한 건 아니겠죠?
내가 분명히 당시 주방에 없던 걸로 하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둘러댄다면 문제가 있진 않았겠지만……
오빠가 분명히 소태차의 출처를 가지고 몇 가지 물어보았으리라.
괜히 걱정이 든 나는 이안의 안색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별일 없다는 의미로 느껴져서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오빠는 이안이 가지고 온 쟁반을 받아선 주전자를 들고는 말했다.
“소태라는 나무를 달인 차래.”
“소태나무? 생소하네요.”
“그렇지? 몸에 좋대.”
뭔가 온몸에 기운이 넘치는 것처럼 루슬란 오빠는 활기차게 이야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마셔본 사람이니까…….
오빠의 눈에 띄기 싫어서 살짝 움츠리는데, 어림도 없었다. 오빠는 더더욱 신나게 이야기하며 날 바라보았다.
“대신 세상에서 제일 쓴 차로 유명하다고 하더라고.”
“…….”
“이게 참…… 난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말야, 타티아나가 가르쳐줬어.”
웃으며 말하고 있긴 하지만 역시 날 힐난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사실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빠도 혈액순환에 좋다면서 에르네스트를 자작나무로 때렸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게 전통적인 사우나 요법인 건 알지만, 그럼 내가 몸에 좋은 쓴 차를 준 것도 큰 문제는 아니지 않아?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항변할 순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난 입을 꾹 다물고 기다렸다.
내 눈빛을 보고도 오빠는 가볍게 웃기만 했다. 그리고 절대로 피할 생각 하지 말라는 듯, 주전자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쓰러뜨리면 깔끔하게 한 잔 어때? 잔이 그리 크진 않아.”
본격적인 벌칙까지 준비한 것에 대해 아나스타샤는 관심을 보였다.
“이게 그렇게 쓴가요?”
“마셔볼래?”
“냄새만 맡아선 잘 모르겠는데요. 음…….”
위험 정도를 파악하는 듯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먼저 주전자를 살폈다. 그래도 먼저 마셔볼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듯했다.
이렇게 벌칙이 공개되자 우리 사이에선 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게임만 봤을 땐 그저 재미있어 보였는데, 사실 누군가 여기서 희생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나 역시 이런 게임은 달갑잖다. 때문에 앞장서서 모두를 대변해 말했다.
“잠시만요.”
“뭔데? 하기 싫어?”
“아뇨, 그게 아니라…….”
게임은 좋다. 내가 걸려도 상관없어.
하지만 일단 가장 먼저 협상하고 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류보비와 아나톨리, 사샤 세 사람에게도 똑같이 벌칙을 적용시키려는 건가요?”
“그야 당연…….”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예외가 어디 있냐는 듯 딱 잘라 이야기하려던 오빠는 순간적으로 주위의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대로 말했다간 아마 모두의 지탄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는 걸 눈치챈 모습이었다.
내가 타이밍 좋게 이런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는 듯 오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어쨌든 어린 세 사람은 봐줄 수 있다는 듯 말했다.
“아니, 좀 줄일까. 절반?”
“절반의 절반.”
“너무 줄였는데.”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
오빠의 목표는 나였다. 그러니까 다른 피해를 조금 줄인들 상관없겠지.
내가 나까지 봐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한 오빠는 그럼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 제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또 뭔데……?”
이젠 살짝 피곤하다는 듯 오빠가 인상을 썼다. 그러나 난 전혀 억지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벌칙만 있는 게임을 누가 하고 싶겠어요? 보아하니 모두들 당할 때까지 계속될 것 같은데…… 그런 게임은 무의미해요.”
“…….”
“제 말이 틀린가요?”
어떻게 보더라도 내 말이 정론이었다.
이미 사실상 젠가나 러시안 룰렛과 비슷하게 되어버린 게임에서 당연히 희생자들만 양산될 것이 분명한데, 이득이 아무것도 없다면 누가 즐겁게 게임에 임할 수 있겠는가?
물론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는 걸 보면서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난 아니었다.
오빠가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닌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맞아. 그렇네. 그럼 한 번도 안 걸린 사람을 위한 보상도 정할까?”
두 가지 협상안 모두 받아들여질 것 같자 옆에서 내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타티아나가 깔끔하게 협상을 해줬네.”
“이럴 때 정말 든든하지? 할 말은 한다니까?”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야…….”
별것도 아니었는데 뭔가 대단한 협상을 해낸 기분이 든다.
그런데 이것도 내가 이런 류의 게임들을 친구들과 하면서 어떻게 하면 먼저 규칙을 잘 정해서 재미있게 놀 수 있을지 자주 궁리한 덕분이었다.
그간의 경험이 있었기에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당연한 이야기를 듣고도 오빠는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그리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삐친 오빠로 있을 예정인가 보다.
아무튼,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나오니 보상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나왔다.
“쓴 차가 벌칙이니까 그 반대는 초콜릿 같은 게 어때?”
“글쎄, 초콜릿은 차 마신 사람이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입안이 쓰니까?”
“그렇지.”
“그럼 그게 무슨 벌칙이야?”
“네가 걸리고도 그런 말 할 수 있겠어? 울면서 초콜릿 달라고나 하지 마.”
여러 의견들이 나오면서 서로 잘 취합이 안 되는 분위기다.
그걸 바라보던 오빠는 결국 강력한 제안을 하나 내밀었다.
“그럼 한 번도 걸리지 않은 사람들이 내일 헬리콥터 투어를 하는 건 어때.”
“네?”
“헤, 헬리콥터요?”
다들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난 오빠가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베니아민에게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듣기도 했었으니까.
농담이 아니란 걸 느낀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 더 진지해졌다.
단순히 소태차를 마시는 것뿐만이 아니라 헬리투어까지 달려 있다면 정말 최선을 다할 충분한 동기가 된다.
“좋아요!”
“무조건 이겨야겠는데요?”
“걸리면 최악이잖아?”
갑자기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난 몇 명만 헬리투어를 시켜준다는 건 반대인 입장이지만, 지금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대로 따라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모든 규칙과 상벌이 정해지고 첫 게임이 시작되었다. 난 마음속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루슬란 오빠였다.
“이걸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오빠는 첫 막대를 타워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이니까 그리 신중할 것도 없었고, 위험하지도 않다.
“알겠지?”
“앗!”
그런데 막 막대를 올려놓자마자 손을 떼고 모두에게 보여주듯 제스처를 취하던 오빠는 타워 옆을 툭 하고 치고 말았다.
그리 세게 친 것도 아니고, 살짝 손끝이 스쳤을 뿐인데 타워는 휘청하더니 그대로 넘어졌다.
“…….”
침묵 속에서 오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쓰러진 타워를 보며 굳어버렸고, 그 뒤에서 이안이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