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3화
껄껄 웃는 이안의 웃음소리는 전염력이 강했다.
곧 모두가 웃기 시작했고 루슬란 오빠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의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더 화를 내거나 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금방 웃음을 그쳤다. 안 그래도 불쌍한데 여기서 더 놀리는 건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약이 오른 것 같은 오빠를 더 자극했다간 후환이 두렵기도 하고.
특히 난 더 몸조심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웃었던 척도 하지 않고 시치미를 뗀 채 가만히 있었다.
“인생은…….”
뭐라 중얼거리던 루슬란 오빠는 앞에 놓인 잔에다가 스스로 주전자를 들고는 가득 채웠다.
대신 따라주기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 또한 오빠를 향한 도발이 될지도 모른다. 난 가급적 오빠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모두들 숨죽여 오빠를 바라보았다.
“…….”
손에 든 차가 어떤 맛인지 이미 아는 오빠는 진심으로 먹기 싫다는 듯 오만상을 썼으나, 곧 한 번에 전부 마셔 버렸다.
저걸 어떻게 마실 수 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모두 비슷한 생각인지 박수로 경의를 표했다. 물론 오빠의 표정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지만.
“자, 이거 먹어요. 루슬란.”
“아…… 고마워.”
그래도 간신히 옆자리의 아나스타샤가 초콜릿을 하나 까서 오빠에게 먹여준 덕분에 살기등등하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저 초콜릿마저 못 먹게 정해뒀다간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조금 기분이 나아졌는지 오빠는 괜히 무섭게 할 생각은 없다는 듯 초콜릿을 입에 문 채로 말했다.
“다음…… 시작해.”
하지만 그 목소리엔 여전히 응어리진 무언가가 맺혀있었다.
이거 우리 즐겁자고 하는 게임 맞죠?
난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은 아나스타샤가 첫 순번으로 타워 위에 막대를 올렸다.
“자, 난 이렇게 할래.”
“…….”
내 차례가 되었다. 난 가만히 타워를 바라보았다.
그냥 막대가 하나 색깔에 맞춰 올라가 있을 뿐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벌써부터 잘 모르겠다.
아까 오빠처럼 실수로 툭 치기만 해도 넘어진다는 걸 이미 본 터라 조금 무섭기도 했고.
그래도 겨우 두 번째부터 시간을 끌 수는 없었기에, 난 일단 보이는 대로 막대를 올려놓았다. 다행히 별일은 없었다.
다음으로 류보비가 주머니에서 막대를 꺼냈다. 스무드하게 순번이 돌아간다.
“이거 생각보다 안정적일지도 모르겠는데?”
“잠깐만.”
“그거 거기 올리는 거 맞아?”
“이쪽이 낫지 않아?”
“여기! 여기!”
처음에 타워 위에 막대가 몇 개밖에 안 겹쳐져 있을 땐 딱히 말할 것도 없었지만, 대여섯 개가 쌓이기 시작하자 슬슬 이러쿵저러쿵하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빙 둘러앉은 열 명이 보는 이 작은 타워 하나에도 열 가지 관점이 생겨나 있는 것이었다.
이것도 꽤 재미있는 현상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난 친구들이 각자 어떤 방식으로 막대를 엮어 나가길 바라는 건지 자세히 지켜보았다.
일단 첫…… 아니, 두 번째 게임이다 보니 다들 어떻게 하는지 파악하고 있는 중이라서 되도록 안정적으로 쌓는 것에 집중하고 있긴 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그걸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이러면…… 살짝 기우나?”
“리처드!”
꽤 중요한 순서라는 느낌이 드는 시점에서, 리처드가 자신의 막대를 기묘하게 겹쳐 올려놓았다.
한눈에 봐도 훨씬 쉽게 놓을 만한 곳이 있는데 완전히 억지를 부려 놓은 것이었다.
저렇게 해야 재미있다는 건 알겠지만…… 다음 순서인 루슬란 오빠의 심기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리처드 너…….”
“에이, 설마 걸리겠어요?”
“…….”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할 수도 없는 가여운 오빠는 입을 꾹 다물더니 막대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보신을 위해 안정적으로 놓는 대신, 다시 한번 강력한 도박수를 뒀다.
혹시 바로 무너지나 싶었는데, 이번엔 하늘이 오빠를 도왔다. 절묘하게 균형을 맞춰서 서게 된 것이다.
물론 그다음으로 막대를 올려놓기엔 더더욱 불안정하게만 보인다.
그리고 다음 순서는 아나스타샤였다.
“…….”
머리도 좋고 손재주도 좋아서 못 하는 게임이 없는 아나스타샤는 어떤 상황을 앞에 두고도 망설이는 일이 잘 없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이건 조금 난감한지 팔짱을 끼고는 막대들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말했다.
“루슬란, 혹시 기억나요? 예전에 우리 젠가 했었던 거.”
“음……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때도 이렇게 불리하게 만들어서 제게 떠넘겼었죠?”
“그, 그…… 그랬었나?”
저건 분명 기억하는데 못하는 척하는 거다.
아나스타샤는 별로 탓할 생각 없이 말하는 것 같은데 오빠는 괜히 제 발 저린 듯 시선을 피했다.
그냥 그때 생각이 났을 뿐이라는 듯 아나스타샤는 까르르 웃더니 막대를 들었다.
“이렇게 하면 어때요?”
불안정하게 쌓인 열 개의 막대 위에 그녀가 자신의 막대를 올렸다.
색깔을 맞춰 올릴 만한 곳은 두어 곳 정도밖에 안 보였는데, 아나스타샤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을 찾아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막대를 올리고 나자, 균형을 잃은 막대들이 우수수 서너 개 쏟아져내렸다.
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안타까워하다가, 문득 규칙을 떠올려냈다.
‘잠시만……?’
이 게임의 공식 룰은 막대가 쏟아진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막대는 패배 점수에 1점이 가산될 뿐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끼리 하는 이 상황에선 로컬룰을 적용하여 타워가 쓰러지는 것을 유일한 패배 조건으로 치기로 했다.
그럼 막대가 쏟아지는 건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지금 교묘하게 막대들의 균형을 이용해서 몇 개만 떨어뜨리는 걸로 앞서 만들어놓은 불안정함을 모두 소멸시켜버린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진 거야?”
“어…… 타워가 쓰러진 건 아닌데?”
“이러면 규칙이 어떻게 되죠?”
모두들 조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이건 실패이긴 한데, 규칙에 의하면 소태차를 마셔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참가자이자 심판인 루슬란 오빠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건 이미 명료한 답이 나와 있는 상황이다.
“계속 진행해야지.”
“막대가 떨어져도요?”
“그건 상관없어. 우리 규칙은 무조건 타워가 쓰러지는 거니까.”
단순명료한 규칙을 다시 한번 모두가 이해했다.
그리고 난 그제야 깨달았다. 이제야 모두 정확하게 이해한 규칙을, 아나스타샤는 이미 한 발자국 앞서 이해했다는 것을.
역시 게임 등에 관해선 그녀만큼이나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 대단하다는 듯 바라보자 아나스타샤가 빙그레 웃었다.
“왜? 내가 실수한 줄 알았니?”
“약간요.”
“아하핫, 실수를 해도 결과가 좋으면 괜찮지?”
그러면서 아나스타샤는 타워 쪽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그녀가 불안정한 막대를 몇 개 떨어뜨려준 덕분에 다음 순번인 내가 하기엔 훨씬 편하게 되어 있었다.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고맙긴? 나도 살자고 한 거야.”
환하게 웃으며 아나스타샤는 다시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난 주머니에서 다음 막대를 꺼내선, 가볍게 타워 위에 올렸다.
그렇게 다시 한 바퀴 돌기 전에 결국 타워를 쓰러뜨린 것은 한승우였다.
“아, 이런.”
“거기 두지 말지.”
“살살 좀 해. 무슨 손가락 끝에도 힘이 그렇게 넘쳐?”
위치가 문제인지 섬세함이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한승우가 벌칙을 당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희희낙락하며 잔에 소태차를 따라 준 건 리처드였다.
몸에 좋은 것이니 가득 따라주겠다며 정말 흘러넘칠 정도로 만들어 놓았다. 대체 왜 저렇게 유치한지 모르겠다 정말.
“…….”
그런데 난 벌칙과는 별개로 살짝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 게임엔 상 역시 달려 있다. 벌칙에 걸리지 않으면 내일 헬리투어를 시켜주기로 한 것이다.
한승우가 오늘 소치 시내에서 얼마나 즐거워했는질 떠올린 난 그가 헬리투어 역시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어지간해선 보내주고 싶은데,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방법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마시다 말면 안 된다? 알지?”
“무조건 원샷이야.”
어떻게 할까 궁리 중인 나와 달리 다른 친구들은 한승우가 소태차를 마시게 된 것에 대해 놀리거나 응원하기에 바빴다.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저건 마시는 수밖에.
그런데 당연히 힘들어하리란 생각과 달리, 한승우는 꽉 찬 찻잔을 흔들리지 않게 들더니 정말로 한입에 전부 털어넣었다.
“…….”
“괜찮냐?”
아까 루슬란 오빠가 다 마셔버린 걸 보긴 했지만, 한승우는 그보다 조금 더 호쾌했다. 인상도 한 번 쓰지 않는다.
무표정하게 다 마셔버린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더니 말했다.
“조금 쓰네.”
“……?”
“이거 사실 별것 아닌가?”
의아해하며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발렌티나가 찻잔에 차를 조금 따라서 마셔보았고, 3초 만에 목을 부여잡으며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콜록…… 켁, 이거…… 대체 어떻게…….”
“대단한 놈이네 이거.”
“맨날 매운 거만 먹더니 혀가 마비되어 있는 것 아니야?”
한승우의 무덤덤함에 다들 한마디씩 해 주었다.
그중엔 조금 너무한 표현도 있었지만, 이 정도는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는지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 게임이 제대로 한 바퀴 돌고 나니까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데에 꽤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단지 타워에 막대를 올려놓는 것뿐인 단순한 게임이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예민한 감각과 센스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벌칙이 걸려 있다 보니 이다음엔 누가 마시게 될지 기대하는 눈빛이 이곳저곳을 오가고 있었다.
그 분위기를 읽은 루슬란 오빠는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오빠의 처음 목적은 합법적으로 내게 소태차를 먹이기 위해서일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즐겁게 게임에 참가한다는 것 역시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할까?”
“예!”
다음은 내가 처음으로 막대를 올려놓으면서 시작되었다.
다들 한 번 만에 대충 어떻게 해야 할지 파악했는지 꽤 절묘하게 막대를 올려놓았다.
되도록 다음 사람이 까다롭게 하려는 전술이 자주 보였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올 때쯤 되면 타워 위는 정말 난리가 나 있었다.
“이건 위험하겠는데?”
그러면서 루슬란 오빠는 알아서 하라는 듯 대충 자신의 것을 올려놓곤 폭탄을 넘겼다.
내가 보니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저게 내게 그대로 온다면 그냥 막대를 던져야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내 앞 순번엔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쉽진 않네요?”
타워를 살피던 아나스타샤는 이윽고 자신의 막대를 올려놓았고, 이번에도 정확하게 세 개만을 떨어뜨려 이전보다 훨씬 안정되게 만들었다.
“…….”
아까는 솔직히 아나스타샤가 의도하긴 했어도 약간 요행도 들어갔겠지 생각했다.
저 불안정한 타워가 쓰러지는 건 어떻게 계산하거나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닌 것같이 보였으니까.
그런데 두 번째가 되니까 절대 요행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건너편의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뭐가?”
“그렇게 몇 개만 떨어뜨린 거.”
“그냥 한 건데?”
“보통은 타워가 쓰러질 것 같은데.”
“안 쓰러지게 할 방법이 보이지 않니?”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아나스타샤를 모두들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게 어떻게 보인다는 거야? 물리학의 신이라도 되냐?”
“저 애는 저런 거 잘하는 거 보면 참 신기하단 말야…….”
뭐 어떻냐는 듯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기울이더니 싱긋 웃으며 내게 순서를 넘겼다. 덕분에 난 이번에도 편하게 막대를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이번엔 사샤가 벌칙에 걸려서 차를 조금만 받아 마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진행된 게임에선 또 한승우가 걸려서 차를 마셨다.
평소엔 게임을 잘하는 편인데, 오늘은 유난히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덜 괴롭게 마시니까 마음이 아프진 않았다. 진짜로 몸에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몇 바퀴 더 도는 동안에도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순서에서 조금 까다롭다 싶으면 정확하게 막대를 올려놓아 몇 개만 떨어뜨렸다.
몇 번을 봐도 말이 안 되는 기술이었다.
‘나는 편하지만…….’
다음 순서인 난 이런 게임을 잘할 자신이 사실 그리 없는데도, 한 번도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오빠의 눈빛이 갈수록 매서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몇 번이나 위태롭게 막대들을 세팅해서 보내려 해도 아나스타샤가 모두 정리해버리니 도무지 내게 위험이 오질 않는다.
목적이 분명히 있는 오빠로선 달갑지 않을 만도 했다.
결국 조금 무리하다가 타워를 쓰러뜨려서 차를 한 잔 더 마시고 만 오빠는 테이블을 향해 손을 펼쳤다.
“잠깐, 작전 타임.”
“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아니…… 그냥 잠깐 쉬었다가 하자고.”
팀도 없는데 무슨 작전을 짜겠다는 건지, 다들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오빠는 어쨌든 이대론 안 된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오빠가 휴식을 선언하자 모두들 이참에 잠깐 화장실도 다녀오겠다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잠깐 스트레칭이나 할까 싶어서 일어날 때였다. 오빠가 아나스타샤를 살짝 불러냈다.
무슨 비밀 이야기인진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