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4화
이미 소태차를 두 잔이나 마시고 입맛이 쓴 루슬란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다시 따져보기 시작했다.
일단은 타티아나가 친 장난에 대해 다시 장난으로 돌려주려고 했지만, 괜히 복도에서 불러세웠던 류보비가 타티아나 옆에 찰싹 달라붙어버리는 바람에 도무지 기회를 잡기 어렵게 되었다.
때문에 공정하게 게임으로 승부하기로 했다.
타티아나는 이런 종류의 게임들을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어떻게든 한 잔 정도는 마시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루슬란의 목표는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엔 류보비가 아니라 아나스타샤가 그 모든 시도를 원천 차단해버렸다.
“……일단.”
정말 작전이 필요했다. 잠시 테이블에서 물러선 루슬란은 먼 시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이 구도대로면 영원히 빙글빙글 돌다가 무리해서 결국 자신이 소태차를 잔뜩 마시는 결말밖에 남지 않는다.
방법은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전에 루슬란은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아나스타샤, 잠깐만.”
막 모두들 분주하게 일어나는 사이, 루슬란은 타티아나가 눈치채지 못하게 아나스타샤를 불러냈다.
“왜요? 루슬란.”
가볍게 눈웃음을 지으며 아나스타샤가 그를 따라왔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기도 했고, 또 다른 친구들은 모르는 가족들만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어서인지 아나스타샤는 유독 친근하게 그를 부르곤 했다.
루슬란은 그런 그녀에게 더 이상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도 굉장한 부담이었지만, 문장을 잘 생각해가면서 엮어냈다.
“이런 게임 이전에도 해본 적 있었어?”
“아뇨? 처음이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잘하나 해서.”
“옆에서 이렇게 보면 각 막대가 지닌 균형이 보이더라고요.”
그게 뭔데?
루슬란은 이런 말을 더 물어봐야 어차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나스타샤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친절하게 알려주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손을 움직이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루슬란은 그냥 본론을 꺼내들었다.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뭔가요?”
고개를 기울인 그대로 아나스타샤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루슬란은 이게 정말 맞는지 수십 번 넘게 고민하면서도 결국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아무것도 안 된다.
“이따 자리 바꾸자고 할 건데, 타티아나랑 떨어져 앉을래?”
그녀가 지금 타티아나의 옆에서 감싸고 돌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물어봐야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자리를 바꿔놓더라도 같이 붙어 있으면 소용없었고, 또 아예 게임을 바꾸더라도 아나스타샤가 작정하고 있으면 타티아나를 거의 지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재작년 했던 마피아 게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은 건 루슬란으로서도 감사한 일이지만, 지금은 정말 큰 방해나 다름없었다.
“……오?”
그런데 이런 말을 직접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눈썹을 까딱이더니, 곧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더더욱 가깝게 루슬란의 앞으로 다가왔다.
키가 상당히 큰 그녀는 딱히 발돋움을 하지 않아도 루슬란과 눈높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들리지 않도록 가까이 붙은 아나스타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머…… 루슬란, 속 보이는데요?”
“네가 너무한 거야.”
“제가요? 어째서요? 전 제가 걸리기 싫었을 뿐인데.”
“그것만이 아니잖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루슬란이 말하자 아나스타샤가 즐겁게 웃었다.
“물론 루슬란이 뭘 하고 싶어하는지도 알고 있긴 하죠. 후후.”
“안다고? 그럼 왜 방해해?”
“당연히 방해해야죠. 타티아나는 제 친구인걸요.”
눈치가 빠른 아나스타샤는 루슬란이 계속 어렵게 막대를 쌓아 넘기는 것이 자신에게 향하는 게 아니라 그다음인 타티아나를 목표로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너무 당연히 그걸 차단하는 게 맞지 않냐는 대답에 루슬란은 이 관계는 어떻게 해도 절대로 깨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자리를 바꾸거나 게임을 바꿔도 소용없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류보비도 아나스타샤도 없는 때를 노려야 하나 싶었지만, 일단 루슬란은 한 번 더 설득해보기로 했다.
“타티아나가 우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
“……예?”
“한 번만 도와줘. 네가 협조해주지 않으면 힘들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연거푸 타티아나를 괴롭히겠단 것도 아니고 한 번이면 족하다.
그냥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인데, 어쩐지 아나스타샤의 표정은 심각하게 안 좋았다.
그렇게까지 심한 말을 한 것 같진 않은데?
루슬란은 약간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그녀를 불렀다.
“아나스타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아니,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오해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응? 무슨 오해?”
“어…… 그 애를 진짜로 울리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쵸?”
아나스타샤는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안 좋아졌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급히 수습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루슬란이 장난으로 타티아나를 건드려보고 싶어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몸도 약하고 성격도 여리지만 생각 외로 눈물을 보이는 일이 정말 드문 편이었으니까.
그런데 루슬란은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하게 말했다.
“아니, 진심인데.”
“……?”
“난 그 애한테 복수해야 해. 이대론 못 넘어가.”
이젠 자존심이 걸린 문제와도 같았다.
루슬란이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아나스타샤는 약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그가 이럴 만한 이유라면 한 가지밖에 없음을 깨달았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짓을 당한 거예요……?”
“하…….”
진짜 이런 것까지 전부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루슬란은 오후에 타티아나가 돌아온 후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했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듣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예? 타티아나가요?”
“그래, 자기가 왔는데 내려와보지도 않았다면서. 직접 소태차를 들고 올라온 거야. 소금까지 타서.”
“그게 이유래요?”
“그렇게 말했어.”
다른 말은 딱히 없었다. 그 전에 타티아나에게 잘못한 일도 없고.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그 이야기를 듣더니 짝다리를 짚고 서선 중얼거렸다.
“흐응…… 그래요?”
“왜?”
“아니에요.”
뭔가 다른 이유라도 알아낸 건가 싶었는데, 아나스타샤는 히죽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제 생각에, 루슬란의 복수심도 정당하기만 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뭐가? 왜? 난 가만히 있다가 당한 건데?”
“그렇진 않을걸요. 타티아나가 그런 애던가요?”
타티아나는 기억이 돌아온 후로 부쩍 장난이 늘긴 했지만, 이번처럼 짓궂은 장난을 무턱대고 저지르는 성격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서 재밌어하는 성격이 못 되다보니 그녀는 장난을 치더라도 깜짝 놀라게 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서로 재미있어할 수 있는 선을 항상 지켜왔고.
난데없이 마실 걸로 테러를 해 오는 건 정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루슬란은 그냥 놀러와서 들뜬 마음에 오빠를 가지고 놀고 싶었나보다 하는 생각 정도로 타티아나의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뿐이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그걸 눈치챈 것 같은데도 전혀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루슬란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뭔데…….”
“글쎄요, 그보단…… 저도 오빠가 있는 입장에서, 루슬란의 편을 들어드리기가 조금 그렇네요. 이해하시죠?”
“너희 우정이 굳건해서 다행이구나.”
“아하하하, 실망하지 마세요.”
아나스타샤는 까르르 웃더니 힘내라는 듯 루슬란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어 번 두드렸다.
루슬란은 이런 위로가 아니라 협조를 받고 싶었기에 가만히 그녀를 보기만 했다.
배시시 웃던 아나스타샤가 이어 말했다.
“억울하다 생각하시면서도 게임으로 승부하려고 했다가 두 잔이나 더 드신 건 저도 안쓰럽다고 생각하니까요.”
“……갑자기 다 그만두고 싶은데.”
“대신 외롭게 억울하진 않게 해드릴게요.”
이해가 안 가는 말인지라 루슬란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야?”
“저도 조금 궁금해져서요.”
뭔가 확실하지 않은 말이었다.
타티아나가 왜 그랬는지 진짜 이유를 다시 확인하고 싶다는 걸까? 아니면 소태차의 맛이 궁금해졌다는 걸까.
가끔 아나스타샤가 이런 알 수 없는 말을 할 때면 종종 타티아나와 조금 닮아가는 것 같단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 묘한 기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하며 루슬란은 그녀를 따라 똑같이 짝다리를 짚었다.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웃더니 자신도 과자나 조금 더 얻으러 가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
잠시 휴식 후 다음 게임이 진행되었다.
난 루슬란 오빠가 작전 타임이라고 한 만큼 분명 무언가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명백히 아나스타샤가 날 보호 중이니까 그녀를 설득해서 자리를 바꾸거나, 아니면 아예 게임을 순번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 게임으로 바꾸거나.
어떻게 해서든 내게 소태차를 마시게 하고 싶은 것이 오빠의 바람일 테니까……. 사실 이쯤 되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고, 눈 딱 감고 한 잔 마시고 싶은 지경이었다.
“자, 이번엔 첫 순서 누구였지?”
하지만 루슬란 오빠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게임을 재개시켰다.
아나스타샤를 불러내기까지 했으니 분명 무언가 작전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의아해진 난 몰래 오빠 쪽을 몇 번 힐끔거리기도 했지만, 그 무표정에서 무언가 읽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뭘까……?’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으니 되레 더 불안해졌다. 차라리 무언가 사건이라도 펑 하고 벌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내 기대에 응답하듯, 옆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앗, 실수.”
“!?”
내 앞 순번으로 막대를 올려놓던 아나스타샤가 이번에도 막대를 몇 개만 떨어뜨리려고 하다가 타워를 전부 넘어뜨려버린 것이다.
실수라고는 하지만, 이번엔 결과가 안 좋았다.
대번에 발렌티나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어쩐 일이야? 아나스타샤.”
“나도 사람이잖니? 이럴 수도 있지.”
“아냐, 사람인 척하려고 일부러 그런 걸지도 몰라.”
괜히 옆에 있는 한승우를 붙잡고 속닥거리면서 발렌티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당장 날아가서 발렌티나를 가만두지 않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차 따라줘.”
“제가요?”
“응. 주고 싶은 만큼.”
그런 말을 들으면 한 방울도 주고 싶지 않다. 게다가 이걸 마시면 규칙상 헬리투어도 못 가게 된다.
지금까지 아나스타샤가 계속 내 옆에서 해주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하기 싫었다.
하지만 규칙은 규칙이었다.
내가 안 하면 오빠나 다른 사람들이 하겠지. 특히 오빠는 지금 아나스타샤에게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까 데리고 가서 이야기를 했는데도 변한 게 전혀 없는 걸 보면, 분명 이야기가 잘 안 된 것일 테니까.
어쩔 수 없이 난 주전자를 들고는 적당히 잔을 따랐다.
넘치지 않게 따랐는데 발렌티나가 가득 안 채우고 뭐 하느냐고 항의하는 바람에 조금 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내가 마시고 싶다.
“고마워.”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내가 따라준 찻잔을 들더니 머뭇거리지 않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정말 쓸 텐데, 인상 한 번 쓰지 않는다.
잔을 비운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난 그녀에게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여기요.”
“와, 고마워.”
쓴것도 고맙고 단것도 고맙다고 한다. 뭐든 고맙다고 하는 그녀를 보며 난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쓰러진 막대만 만지작거렸다.
지금까지 게임의 신처럼 군림하던 아나스타샤가 벌칙을 당하자 모두들 놀란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는 싫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쾌활하게 다시 말했다.
“뭐 하니? 다시 시작해, 빨리.”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테이블을 탁탁 치자 다시 게임이 시작되었다.
난 사실 전혀 공격성 같은 것 없이 이 게임에 임하고 있었다. 그저 쓴 차를 되도록 마시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라리 내가 마시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가, 아나스타샤가 마시게 되니까 이젠 생각이 살짝 바뀌었다.
내 머리는 이 게임이 끝나고 나면 어떤 방식으로 루슬란 오빠를 다시 위기에 빠트릴 수 있을지 궁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