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55화 (955/1,277)

##  955화

계속된 스틱 스택 게임 속에서 소태차는 점점 줄어들어갔다.

문제는 이미 걸렸던 사람들 중에서 실수를 해서 더 마시는 경우가 늘었다는 점이다.

한 번 걸리고 나니 겁이 없어진 건지, 아니면 이 쓴맛을 다른 사람에게도 반드시 맛보여주고 말겠단 의지 때문인지……. 어쩐지 다들 조금씩 무리를 하는 느낌이 든다.

“이게 왜 쓰러져!?”

오빠 역시 무리수를 두다가 타워를 쓰러뜨렸다. 이래서야 소태차를 마시고 싶어 하는 게 아닐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작전 타임은 왜 한 걸까? 분명 무언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딱히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아나스타샤가 실수를 한 번 더 한 것이 전부였다.

시무룩하게 주전자를 들어 자신의 잔을 따른 뒤 오빠는 두말없이 그대로 한 번에 잔을 들이켰다.

차가 아니라 술이라도 마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잘못해서 벌칙을 당하는 건 오빠인데 왜 내가 미안해지는 걸까.

“차도 거의 다 마셨는데…….”

주전자를 흔들거리며 오빠가 아쉬운 듯 말했다. 그렇게 흔드는 모습만 봐도 안에 내용물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소태차를 놓고 벌어진 비극의 현황을 이제야 정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든 모양인지, 오빠는 손가락을 들어 우릴 하나씩 가리켰다.

그 손은 아나스타샤와 한승우, 그리고 사샤에게 향했다.

“지금 우리 네 명만 마신 건가?”

“오늘의 희생자들이네요.”

오빠는 날 힐끔 보더니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단 표정이다.

완전한 실력이나 운으로 내가 피해간 것이라면 오빠도 어쩔 수 없이 승복했겠지만, 이건 어떻게 보더라도 아나스타샤가 내 앞에 있었던 덕분이었기에 미련이 남아있는 것 같다.

가만 두었다간 차 리필해 오겠다고 할 태세라서, 난 얼른 앞장서서 이야기했다.

“그, 그럼 마지막 게임 할까요? 다른 게임도 하고 싶고…….”

내 제안은 딱 적당했다. 죽음의 소태차도 다 마셔 가고, 스틱 스택 게임도 즐길 만큼 즐겼으니까.

오빠도 그 정도 합리성은 인정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마지막으로 한 명은 반드시 이쪽으로 데리고 오고 말겠어.”

“난 리처드랑 타티아나가 왜 안 걸리는지 신기한데.”

“그러게요. 운 없기로는 여기서 두 사람을 따라갈 사람이 없는데.”

평소 나와 게임을 자주 해본 사람들은 저마다 의문을 표했다.

내 경우는 차치하고 리처드도 운이 정말 없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딱 걸리기 좋은 게임에서 무사히 넘어가게 된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리처드는 느긋한 얼굴로 피식 웃더니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운? 그러니까 너희가 안 되는 거야. 이게 전부 실력…….”

“…….”

“……이라고 하기엔 역시 운의 영역이죠. 제가 오늘은 운이 좀 좋네요.”

너희 운운하려고 하니 루슬란 오빠까지 끼어 있어서 말을 삼갈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가 헛기침을 하며 물러서자 오빠는 인상을 쓰던 표정을 풀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마지막이야.”

드디어 이 무서운 게임이 끝날 때가 오니 류보비가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으아, 정말 걸리기 싫어요.”

“지금까지 하던 대로만 하시면 괜찮을 거예요.”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긴장감은 각자 최고조에 달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건 비단 류보비뿐만이 아니었다.

아나톨리와 사샤, 그리고 발렌티나까지 역력하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며 어깨를 뒤틀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스틱을 쌓아야 하는 이 게임에서 그런 긴장도는 최악의 적과도 같았다.

“!”

스틱을 잡자마자 묘하게 어색한 모습을 하던 발렌티나는 그대로 손을 뻗어 스틱을 쌓았다가, 그 손을 미처 떼기도 전에 타워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아악!”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사방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발렌티나! 네가 우리 마지막 동료가 되었구나!”

“자, 세례를 받을 시간이야.”

“싫어!!”

아까 전에 살짝 맛을 보자마자 기겁을 했던 기억이 남아있어서인지 발렌티나는 정말로 진저리치며 싫어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미 소태차를 실컷 마신 네 사람이 봐줄 리가 없었다.

루슬란은 발렌티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져라 감시했고, 아나스타샤가 일어나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한승우도 혹여나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퇴로를 막고 있는 중이었다.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로 사샤가 주전자를 쥐었다.

철저하게 그녀를 길동무로 데리고 가려는 네 사람을 보며 발렌티나가 소리쳤다.

“진짜 못 마시겠다고!”

“그럼 우린 맛있어서 마셨니? 애들도 보고 있는데 쓸데없이 투정부리지 말고 얌전히 있으렴.”

“이거 놔, 놓으…… 사샤! 그렇게 깔끔하게 다 따를 필요 있어!?”

“딱 마지막 잔이네요.”

사샤는 정말 착하고 순한 아이였지만, 이럴 때면 자비가 없는 성격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잔을 발렌티나 앞에 두고 아나스타샤가 권했다.

“자, 올해도 발렌티나의 건강을 위해. 건배.”

“이런 건배가 어딨냐구…….”

“마셔, 어서.”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간신히 잔을 든 발렌티나는 눈을 꾹 감더니 차를 마셨다.

난 그녀가 한 모금만 마시고 내려놓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각오를 꽤 했는지 멈추지도 않고 반잔을 비웠다.

물론 그녀가 살짝 잔을 내려놓으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아나스타샤가 마저 마셔야 한다고 강력하게 압박했다.

가여울 정도로 울상이 된 발렌티나는 다시 남은 차를 바로 다 마셔야만 했다.

“악마들이야…….”

“너도 이제 악마의 동료가 된 거란다. 발렌티나.”

“윽…….”

발렌티나는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부라렸지만, 그래도 그 눈빛에 이미 소태차를 마시지 않은 사람들에게 향하는 적대감이 깃들어 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건너편의 에르네스트도 그걸 눈치챘는지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팀이 생겨 버린 것 같은데.”

“그러네요.”

소태차를 마신 다섯 사람과, 그렇지 않은 다섯 사람.

그렇게 꽤 명료한 대립구도가 이루어졌다.

난 그 반대편에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있다는 게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이쪽에 에르네스트가 있는 것에 대해선 꽤나 큰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

자연스레 팀이 나누어졌고, 나와 루슬란 오빠가 각각 팀의 주장이 되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저쪽은 오빠가 제일 연장자였고, 그런 오빠가 날 가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뿐이니까.

그 와중에 오빠는 자학적으로 자기 팀의 이름을 소태차 팀이라고 짓기까지 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지 모르겠다……. 팀의 사기에도 별로 좋지 않을 텐데.

거기에 반대되는 우리는 카페오레 팀이었다.

쓴 소태차 팀에 대항하는 것이니 달콤하게 가자는 류보비의 아이디어를 받아 별 생각 없이 짓긴 했는데, 막상 내가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는 게 조금 우습긴 했다.

그렇게 서로 조금씩 이상한 소태차와 카페오레의 대결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이번에 주사위 제대로 못 굴리면 우리 다 죽는 거야. 알지?”

“그냥 던지지 말고, 신중하게 기도를 하고 던지라고.”

주사위를 굴려 반드시 5 이상이 나와야 하는 상황에서, 온갖 압박을 받는 발렌티나는 옆에서 스트레스 좀 주지 말라며 소리를 빽 지르고는 주사위를 던졌다.

다행히 주사위는 정확하게 5가 나왔고, 발렌티나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난 다음 우리 말을 보며 계산했다. 3이면 베스트. 그 이하여도 괜찮았다.

순서는 에르네스트였다. 난 옆에 앉은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부담 없이 하세요.”

“난 늘 부담 없었어.”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에르네스트는 주사위를 휙 던졌다. 그리고 마치 정해놓은 것처럼 주사위는 3에 멈춰 섰다.

“내가 그랬지?”

난 환하게 웃으며 그 앞에 손을 들어올렸다. 에르네스트도 손을 올려 나와 하이파이브했다.

왼손으로 할 수 없어서 살짝 몸을 틀어 어색한 모습으로 하는 하이파이브였지만, 난 이제 살짝 신경만 쓰는 것에서 그칠 수 있었다.

볼 때마다 움찔거리거나 눈치를 보면 우린 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질 뿐이다.

우리가 정말로 평범하게 지낼 수 있도록 그는 예전부터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도 그만큼 노력하고 응원해야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자 뭔가 하는 일들도 잘 되는 것 같고, 에르네스트도 전보다 훨씬 편하게 있는 것 같았다.

“다음은 너야 아나스타샤.”

“본때를 보여달라구.”

다음 순번으로 아나스타샤가 주사위를 쥐었다. 그녀는 예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판세를 파악했다.

아무거나 던져도 좋지만 2를 던지면 큰일난다.

“2는 안 돼, 아나스타샤. 제발.”

“2만 하지 마.”

“……조용히 좀 해 줄래? 너희들 그거 모르니? 사람은 무언가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거?”

예전에 꿈을 주제로 한 헐리우드 영화에서 들은 기억이 난다.

어떤 사람에게 코끼리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하면 그 사람은 코끼리 생각밖에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

숫자 2를 던지면 안 된다고 계속 연호하면 2밖에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운이 바뀌거나 하진 않겠지만…….

“이것 봐…….”

가끔은 미지의 무언가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은 참 오묘하다.

2가 나와버린 주사위를 보며 아나스타샤도 이건 실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망연자실해진 발렌티나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진짜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나보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 팀의 아나톨리와 류보비가 각각 주사위로 최고의 숫자만을 던진 덕분에 이번 게임도 승리는 우리 팀의 것이 되었다.

정말 기뻤다. 심지어 오늘 한 게임들은 한 번도 안 지고 전부 이겼으니까.

하지만 그 말인즉슨 상대편은 전부 졌단 말이었다.

“한 번만이라도 이기고 싶었어…….”

“어떻게 한 번이 안 되냐.”

“팀 이름이 잘못된 것 아닐까요?”

“…….”

한승우가 팀명을 걸고넘어져도 루슬란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짜로 그게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투덜거리며 오늘의 참패를 곱씹는 소태차 팀을 보니 이겨도 이긴 기분이 아니었다.

‘어쩌지…….’

이대론 게임도 전부 지고, 미리 정한 규칙에 따라 내일 헬리투어도 우리만 가게 생겼다.

아무리 승자의 권리라 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나서서 그냥 다 없던 일로 하고 내일 헬리투어도 번갈아가면서 같이 하자고 하면 그건 가뜩이나 흠집이 난 저 다섯 명의 자존심을 더 긁는 일이 될 터였다.

난 되도록 그런 일은 삼가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좋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루슬란 오빠와 눈이 마주쳤다.

“…….”

우리 남매는 오늘 완전히 대립하는 구도였다.

오후에 내가 오빠를 골탕먹인 것 때문에 약이 오른 오빠는 우리 전체를 끌어들였고, 그 뒤로도 계속 나만 노리고 있었다.

나 역시 중반부턴 그냥 당해주지도 않고 반격의 여지가 있다면 놓치지 않기도 했고.

하지만 치열하게 대결에 집중하면서도 우린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이 시간이 즐거워야 한다는 공통 목적엔 이미 합의를 이룬 터였다.

때문에 곤란해하는 눈빛을 본 오빠가 내 의사를 이해한 것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어둡던 분위기에서, 오빠가 툭 뛰쳐나오며 내게 제안했다.

“타티아나, 마지막으로 주장끼리 대결하자.”

“대결이요?”

“이대로면 너희만 내일 헬리투어를 가게 되는 거잖아?”

그래서야 자기 팀의 네 명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듯 오빠가 말했다.

“내가 이기면 너희가 헬리투어에 갔다가 돌아온 다음, 우리도 가게 해 줘.”

그건 내가 지금 가장 바라는 일이었다.

진짜로 내 마음을 꿰뚫어 본 것 같다.

난 웃으며 물론 그렇게 해도 좋다고 답하려다가, 지금 내 역할을 다시금 깨닫고는 고개를 기울이며 괜히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제가 이기면요?”

“내일 나 찾을 생각 하지 마.”

“겁주지 마세요…….”

“아무튼. 할 거야?”

이건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었다. 난 고민하지 않고 바로 받아들였다.

“해야죠. 종목은요?”

“가위바위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운으로 승부하는 가위바위보인지 모르겠다. 실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어야 내가 자연스럽게 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오빠는 이걸로도 충분하다는 듯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난 어쩐지 오빠가 그대로 주먹을 낼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날 보자마자 오빠가 마지막 대결을 제안한 것처럼, 나 역시 오빠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기분은 기분일 뿐이지 입으로 말해주거나 한 게 아니었으니 확신은 아니었지만, 난 일단 방금 느낀 직감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정확하게 맞았다.

난 가위를 냈고, 졌다.

“이겼어!”

“제일 중요한 걸 이겨주셨네요!”

한승우와 발렌티나는 마지막에 이렇게 주장 대결에서 승리한 것을 가지고 뛸 듯이 좋아하고 있었다.

헬리투어도 가지 못할 거라 생각하다가, 상황이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

우리 팀 역시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다. 우리 투어는 우리대로 하는 것이니까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었던 까닭이다.

“져버렸네요?”

내가 빙그레 웃으며 가위를 낸 손을 마치 브이자처럼 들어올리자 에르네스트가 마주 웃어주며 말했다.

“잘 했어.”

아마 그도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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