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56화 (956/1,277)

##  956화

소치 휴양의 셋째 날이 밝았다.

어슴푸레한 햇살에 눈을 뜬 나는 습관처럼 스마트폰부터 쥐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7시였다.

어제 12시가 넘어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충분히 깊게 잔 덕분에 피로는 거의 없었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선 기지개를 켜며 스스로의 상황을 점검했다.

어깨가 살짝 뻐근한 기운이 있어 스트레칭을 하니, 보다 개운해졌다.

“…….”

모두들 아직 자고 있겠지?

간밤에 즐거웠던 기억들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바보처럼 실실 웃으며 슬리퍼를 신었다. 아무도 옆에 없어도 외롭거나 하진 않았다.

어제의 기억과 머잖아 만날 것이란 기대가 날 들뜨게 만들 뿐이었다.

아침 식사 전까진 혼자서 이렇게 들뜬 기분을 만끽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간단히 세안만 한 나는 숄을 걸치고 복도로 나왔다.

잠깐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실까 싶었는데, 저 멀리에서 뭔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자연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닌, 무언가를 당기고 밀며 내는 인간의 작품.

머릿속은 자동적으로 소리들을 분석하며 그 정체를 파악하려고 애썼고, 내 발은 그쪽으로 이미 향하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소리 역시 선명해졌고, 로비에 도착하기 전에 난 이 음악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음악의 한가운데에 있는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

원래 로비엔 음악이 틀어져있지 않았고, 누군가 틀어 놓은 것이라면 분명 내 친구들 중 한 명일 것이라 예상했다.

모두들 중앙음악학교 학생들이므로 누가 이런 음악을 듣는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루슬란 오빠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약간 당황해서 멈춰서자 커피를 마시고 있던 오빠는 날 돌아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잘 잤어?”

“안녕히 주무셨나요.”

난 그렇게 인사하면서도 오빠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은 옆에 아무도 없다. 만약 오빠가 어제의 원한을 잊지 않고 있다면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혹시나 싶어 머뭇거리고 있는데도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잔으로 신경을 돌렸다.

어제의 일은 어제의 일로 마무리 짓겠다는 의사가 전해져왔다.

조금 긴장을 놓고 오빠의 맞은편에 앉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러네. 날씨도 좋고 커피도 맛있고 음악도 좋고. 힐링이 되네.”

느긋하게 이야기하며 다시 오빠는 커피를 홀짝였다.

어제 그 엄청난 패배를 겪고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다니 역시 대단했다. 날씨도 커피도 음악도 도움이 된 걸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쉽게 반응할 수 있는 건 역시 음악 부분이었다.

“말러 교향곡…….”

“6번이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틀어놓은 거니까.”

오빠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대꾸했다.

그야 그렇지만…… 왜 말러인지 모르겠다.

구스타프 말러는 19세기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한 유대인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타협 없는 깊이와 예술성을 추구하는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현대에도 클래식 음악 리스너들에게 사랑받는 작곡가이지만, 어딜 가도 널리 들리는 모차르트나 쇼팽 같은 작곡가들의 곡과 달리 말러의 곡은 쉽게 듣기 어렵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두 가지 정도 꼽자면,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완벽함을 추구한 그의 음악은 해석과 감상이 너무 크게 갈리는 경향이 있었고, 또 음악의 규모가 너무 장대하고 무거운 까닭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말러의 음악은 정말 어렵다. 듣는 것도 연주하는 것도.

특히 유명한 것은 교향곡 8번으로 소위 천인 교향곡이라 불리는 곡인데, 그런 부제가 붙은 건 독일 뮌헨에서 초연되었을 때 1000명이 넘는 합창단과 단원들이 이 곡을 선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규모는 다시 동원하기 정말 어렵기에 현대에 교향곡 8번의 연주는 많아도 500명 정도로 연주되곤 한다.

이렇듯 말러의 음악은 편한 것과는 거리가 조금 먼 편이었다.

‘교향곡 6번의 부제는…… 비극적tragic이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살짝 무섭다.

피아노 연주자인 나도 어렵게 생각하는 곡인데 초심자인 오빠가 이런 곡을 듣는다는 것이 심상찮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단 마음과,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단 마음이 겹쳐서 나도 잘 모르게 되어버렸다.

그런 내 눈빛을 의식했는지 오빠가 고개를 들더니 물었다.

“왜 그렇게 봐? 난 클래식 들으면 안 되냐? 동생이 피아니스트인데?”

“그래도 조금 놀라서요.”

“가끔 듣고 있어. 특히 오늘 같을 때 말러 교향곡 6번이 괜찮더라고.”

“오늘 같을 때요?”

나도 모르게 되묻자 오빠는 잘 걸렸다는 듯 대답했다.

“무기력과 패배감에 힘이 없을 때 말야.”

“…….”

“아, 좋네.”

역시 어제 일을 깔끔하게 모두 없던 일로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전부 날 안심시켜서 맞은편에 앉게 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오빠는 내가 어디에서 무서움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다.

말러의 교향곡 역시 음악에 예민한 내가 그냥 넘기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고 틀어 놓은 것이겠지. 그런 걸 알면서도 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랬다간 정말로 오빠의 작전에 넘어가버릴 것 같았다.

난 그렇게 쉽게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난 살짝 틀어서 다른 감정을 전했다.

“어젠 고마웠어요.”

“나도 고마워. 덕분에 새해부터 몸이 가뿐해진 것 같아.”

“……그게 아니에요.”

오빠는 내가 계속 이긴 것으로 비아냥거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마지막뿐이었다.

“마지막에 저와 가위바위보 해주신 거요.”

잔을 쥐고 있던 오빠의 손이 멈추었다.

오빠가 어제 계속, 그리고 지금까지도 날 흔들려고 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순간 서로 마음이 맞았을 땐 정말 완벽했다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오빠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내가 알지 않느냔 뜻으로 빙그레 웃자 오빠는 이쪽은 보지도 않고 괜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가 이겼는데 네가 왜 고마워하지?”

“이겨주셔서요."”

“……흠.”

괜히 말려든 친구들이 편까지 갈려 있던 것을 오빠가 캐치해서 마지막에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난 그 배려에 대해선 정말 큰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말러 6번에 놀라고 이후 오빠의 말에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이 이상 말려들지 않고 태도를 바꾸자 오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쨌든…… 그럼 오늘 헬리투어 갈 거야?”

“예, 그래야죠? 시간은 언제쯤이 좋을까요.”

“오후로 언질해 놨어.”

“그럼 그렇게 해요.”

역시 준비성도 좋았다.

잠깐 오빠와 함께 오늘 일정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역시 기본적으론 자유에 맡기기로 했지만, 오후의 헬리투어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에 대해선 잠깐 듣고 적절하게 이후 움직일 곳 정도는 염두에 두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내게 맡겨진 사람들은 아나톨리와 류보비, 그리고 에르네스트, 리처드였다.

사실 이런 구성이라면 앞의 두 아이가 걱정이 되어야겠지. 그런데 난 뒤의 두 친구가 조금 신경 쓰이긴 했다.

또 심한 장난을 치진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도 분명 즐거울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 네가 챙길 애들은 알아서 잘 챙겨. 뭐, 그리 복잡할 건 없겠지만.”

“오빠도요. 제 친구들 잘 부탁드려요.”

“걱정 마.”

“때리시면 안 돼요.”

“……???”

오빠가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서 난 괜히 살짝 떠보듯 이야기했다.

그런 내 말에 오빠는 눈을 크게 뜨더니 손으로 귀를 후비기 시작했다. 지금 무언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그런 적 있잖아요?

내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이자 오빠는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이가 없네. 두 명은 여자애고 한 명은 어린애고 다른 한 녀석은 날 한 손으로 잡고 집어 던질 것 같은데?”

“아하하하, 힘이 좋긴 하죠.”

“그저께 체육관에서 잠깐 놀아주다가 팔 부러질 뻔했다니까.”

필사적으로 이야기하는 오빠를 보며 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에르네스트에게 한 일을 이렇게 전혀 기억하지 못할 정도면 정말 좋은 의미로 해 준 것이라 믿어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승우와 같이 놀아주기도 했다고 하고…… 처음 우리 집에 한승우와 리처드는 좋지 않은 소식으로 보고되었기 때문에, 아마 오빠도 그에게 별로 첫인상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빠는 정말 많은 노력을 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장난으로 말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간의 고마움을 담아 진심으로 말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래.”

“그리고 늦었지만…… 어젠 미안했어요.”

“이제 와서??”

말러의 교향곡을 틀고 압박해도 견뎌내던 내가 이제야 사과하자 오빠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난 그런 오빠를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

오전엔 별장에서 편하게 쉬면서 각자 얌전히 시간을 보내고, 약속했던 시간이 왔다.

“딱히 준비할 건 없다고 했었지?”

“예, 스키를 타러 가는 것이 아니니깐요.”

로비에 모인 네 사람을 바라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곳에서 운용하는 헬리콥터는 헬리스키를 중점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니 제대로 활용하려면 스키를 타러 가는 쪽이 좋았다.

하지만 우린 에르네스트를 두고 스키를 탈 생각이 없었고, 헬리스키를 탈 정도로 스키를 잘 타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모두들 복장은 스키복이 아니라 평범한 사복 차림이었다.

조금 추울지도 모르니 따뜻하게 입고 나오라고 전해두었더니 잘 챙겨 입고 나온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럼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타티아나 님.”

“예.”

모두를 확인한 베니아민은 우리를 밖으로 이끌었다.

헬리콥터 착륙장은 별장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있었다. 소음 등을 막기 위해 일부러 거리를 떨어뜨려 놓았다고 한다.

준비된 차를 타고 몇 분 정도 갔을까,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린 넓게 탁 트인 착륙장과 헬리콥터를 볼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데?”

리처드가 감탄한 것처럼 준비된 헬리콥터는 정말 커다랬다.

물론 다섯 명이나 타야 하니까 충분히 커야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미 거대한 프로펠러가 빙빙 돌고 있었다.

어쩐지 가까이 가기가 무서워질 정도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멈춰서 있자, 베니아민이 먼저 가서 조종사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그가 금방 돌아와 우릴 안내했다.

“탑승하시면 됩니다. 자, 여기 헤드셋도 쓰십시오.”

시키는 대로 따라가서 헬리콥터에 착석하고, 안전벨트를 매고 헤드셋도 썼다.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던 소리가 헤드폰을 쓰니 확 줄어들어서 훨씬 편해졌다.

그렇게 헤드폰을 쓴 우리는 서로를 보며 손가락질하고 웃었다. 떠들썩한 말소리는 마이크를 통해 들어가서 다시 모두의 귀에 전해진다.

안전 점검이 끝나고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조종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륙하겠습니다.”

뭔가 몸이 푹 꺼지는 기분이 드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다시 상승감이 전신을 감싼다. 그렇게 우린 하늘로 솟구쳤다.

“와…….”

높은 곳에서 보는 소치의 풍경은 나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숲밖에 볼 수 없었던 시야에 갑자기 탁 트인 세상이 펼쳐졌다.

별장이 있는 숲과 도로들, 그리고 해변가 쪽에 가득 모여 있는 건물과 공원. 그 너머의 드넓은 바다.

심지어 그 바다의 수평선 너머엔 어슴푸레 무언가가 더 보이고 있었다.

“저쪽 바다 건너에 보이는 건 무엇인가요?”

“터키입니다.”

“예?”

“터키 말입니다.”

갑자기 나라 이름이 나올 줄은 몰라서 되묻자 조종사가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흑해의 남쪽에 터키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멀리에서 그걸 직접 볼 수 있다는 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그만큼 날씨가 좋고 우리가 높게 올라온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각자의 헤드폰으로 우리의 모든 대화는 공유되고 있었기에 다른 아이들도 깜짝 놀라선 창가를 돌아보았다.

“터키라니? 뭐가?”

“어디?”

그 모습은 내가 이 헬리투어를 생각하면서 예상했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어서, 난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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