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57화 (957/1,277)

##  957화

아름다운 흑해 너머로는 터키, 그리고 반대편 내륙 쪽으로는 높다란 카프카스산맥이 보인다.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은 절대 흔하지 않다.

리처드와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을 들고는 이리저리 돌려가며 사진을 찍으려 애썼다.

“이 풍경을 대체 어떻게 담아야 하지?”

“어떻게 찍어도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네.”

사진이나 음반 등의 기록 기술의 진보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정교해져서 이젠 감동도 무난하게 담아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완벽하게 원본을 대체할 순 없다.

우린 그 차이점을 명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사진으로 봤던 그 어떤 것도 지금 보고 있는 것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 풍경 자체의 감동을 옮겨내려 시도하는 건 전문가들의 일이다.

우리가 이 작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할 수 있는 건 추억을 한 장으로 남기는 것 정도고, 그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우리 다 같이 사진 찍어요!”

그 진리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류보비가 손을 번쩍 들어 앞으로 내밀며 제안했다.

창밖을 보고 있던 리처드가 히죽 웃었다.

“그럴까? 기념사진으로?”

“네!”

“그거 좋지.”

“그럼 카메라는…….”

“제가 찍어드리죠.”

각자 떨어진 좌석에 안전벨트를 매고 타고 있는 터라 사진 구도를 잡기가 어려웠는데, 승무원으로 함께 탄 베니아민이 대신 스마트폰을 받아가선 멀리서 우리 모두를 한 컷에 담아주었다.

잔뜩 들뜬 아나톨리와 류보비는 양손으로 브이를 그리며 신이 나 있었다.

어느새 선글라스까지 챙겨온 리처드는 마치 자신이 조종사라도 된 것처럼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난 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아닌 것엔 별 관심이 없는 편인 리처드라면 헬리투어도 조금 미적지근하게 반응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도 생각보다 굉장히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 옆의 에르네스트는 리처드 옆에 있고 싶지 않다는 듯 최대한 옆으로 멀어지려고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

말을 해도 마이크를 통해서밖에 전해지지 않는 지금은, 말보다 행동이 훨씬 더 의사전달에 빠르다.

난 싱긋 웃으며 류보비가 하는 것처럼 검지와 중지를 들어 브이를 그렸다. 얼른 분위기에 따라가 달란 뜻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뭔가 어색한 듯 머뭇거리더니 결국 날 따라했다.

베니아민이 찍어준 사진을 받아본 류보비는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이따가 내려가서 전송해드릴게요.”

“그래요. 잘 나왔네요.”

“리처드 형, 선글라스 쓰고 보면 어떻게 보여요?”

“빌려줄까?”

다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하늘 높은 곳에서의 관광을 만끽했다.

소치 근처를 빙글 돌던 헬리콥터는 곧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처음 비행기를 타고 도착했었던 아들레르가 있는 방향이었다.

일반적으로 헬리투어만 한다면 20분 정도 코스로 이렇게 왔다갔다 하며 해안가를 돌아보고는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위아래로 긴 도시이기 때문에 코스가 딱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그런데 리처드와 에르네스트는 산 쪽에도 관심을 보였다.

“헬리스키를 하게 되면 어디까지 가는 건가요?”

“저쪽 카프카스산맥 중턱까진 갑니까?”

겨울바다만큼이나 하얀 설산도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웅장함을 지니고 있었다.

드물게 들뜬 두 사람은 설산 가까이 가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베니아민은 간단하게 본래 헬리스키가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저 카프카스산맥을 이루는 높은 산들 중에서 3,200미터 정도 되는 한 설산이 바로 헬리스키 지점이라고 한다.

그곳에서부터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다.

3,200미터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높이다.

그런 곳에 내릴 수 있단 말에 관심을 보이는 남자애들에게 설명을 마친 베니아민은 은근슬쩍 내 쪽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허락만 해준다면 설산의 헬리스키 지점까지 가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일단은 두 사람이 정말로 가고 싶은 것인지부터 확인했다.

“리처드, 산에 내려 보고 싶나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헬리콥터를 타고 저 설산 3,200미터에 내린다는 건. 직접 오르는 건 엄두도 안 날 만한 산을 날로 먹는 거잖아.”

“날로 먹…….”

듣고보니 이해가 안 가는 말은 아니지만, 수많은 산악인들에게 너무 실례되는 말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리처드는 원래 실례되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튼 이왕 이렇게 되니 궁금해져서.”

“스키도 타고 싶으시나요? 예비 장비가 실려 있다고는 들은…….”

“그건 아니고. 나 스키 그렇게 잘 못 타.”

3,200미터나 되는 설산 슬로프를 스키로 내려온다는 건 그냥 어중간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긴 했다.

거의 익스트림 스포츠에 가까운 것이다.

에르네스트도 지금 스키를 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다른 두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모두들 산 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같은 것처럼 보였다. 누구 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의견을 모은 나는 베니아민에게 물어보았다.

“산까지 가본다면 시간은 어떨까요?”

“넉넉합니다.”

원래 20분 코스이긴 하지만, 내가 부탁한다면 그런 시간제한은 의미가 없어진다.

내가 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베니아민은 그 뜻을 조종사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헬리콥터는 서서히 동쪽 산악지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저 밑이 공항이고…… 길을 따라가면 크라스나야 폴랴나인가?”

“그렇겠네요.”

올림픽 설상 종목들이 치러진 곳들은 멀리서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스키 슬로프가 몇 개나 있었고, 스키 점프대 같은 구조물도 보인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지금도 활발하게 운영 중인 것이 잘 보였다.

원래 소치는 올림픽과 관계없이 스키를 타는 사람들에게 항상 사랑받아 온 곳이었다.

빙상 경기장 등이 올림픽 이후에 좀처럼 활용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스키 슬로프에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건 정말 다행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진짜 엄청나네.”

감탄을 발하는 리처드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해안에서 봐도 웅장했던 카프카스산맥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시야를 꽉 채웠다.

새하얀 고산들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 헬리콥터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더 조심스레 산맥으로 접근했다.

이렇게 봐선 대체 어디에 내리려는 건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하얀 눈들만 보이던 와중, 스키 슬로프 비슷하게 느껴지는 길이 있나 싶더니 그 위에 확실히 자연적인 설산과 다른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워낙에 높은 곳이라 그런지 인공적으로 터를 닦아놓은 곳이라 해도 사실 자연 그대로의 상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일단 헬리콥터가 안정적으로 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곳이 착륙지라고 확신한 건 이미 두 명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앗, 이미 사람이 있네요.”

“그러네, 먼저 온 사람들인가.”

리프트도 없는 저 높은 산에 사람이 있으려면 먼저 헬리콥터로 내린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혹시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을 볼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내심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밑을 보고 있는데, 두 사람이 우리 쪽을 보더니 갑자기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뭐지? 반갑다는 건가?”

“……우릴 부르는 것 같지 않나요?”

반갑다고 손을 흔드는 것이라면 한 손만 흔들거려도 된다.

그런데 저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양손을 휘젓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보통 상황이 아니었다.

기대감의 두근거림은 곧 긴장감으로 변했다. 혹시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걸까?

그 긴장감은 나뿐만이 아니라 베니아민이나 조종사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묘하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종사가 신중하게 접근하겠다고 말했고, 잠시 후 헬리콥터가 설산 위에 착륙했다.

엔진 소리가 조금 잦아들 무렵, 아까 손을 흔들던 사람들이 저쪽에서부터 다가왔다.

뭔가 이상한 사람들일 것 같진 않고…… 단순히 관광객인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난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을지 가늠하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베니아민이 헬리콥터 옆문을 열자, 다가온 남자가 정말 살았다는 듯 말했다.

“아, 정말 다행입니다. 문제가 생겨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다음 스키어들이 올 줄…….”

그런데 그 얼굴도 목소리도 굉장히 익숙했다.

그리고 그 역시 헬리콥터 내부의 사람들을 보더니 말을 다 맺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아?”

당황한 우리는 한동안 눈만 깜빡이며 서로를 바라보다가, 내가 먼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막심 선배님?”

“타티아나?”

막심 드미트리예비치 체르체소프.

작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에서 우승하여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연주자이자, 내겐 두 살 많은 선배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막심 선배와 있었던 일들은 간단하게 정리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내 합주 실력이 좋아진 데엔 선배의 역할이 정말 컸으니까.

때문에 졸업한 선배가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간 후에도 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 신년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었고.

그래도 이렇게 만나긴 당분간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모스크바에서 1,000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이 소치에서, 그것도 헬리스키로만 올 수 있는 설산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깜짝 놀란 건 선배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가 왜 여기에……? 어라? 뭐야?”

“저야말로요……. 어찌 된 일인가요? 콘서트 투어 중이신 것 아닌가요?”

피아노 부문 우승자인 예카테리나도 최근 전세계 콘서트 투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들었다.

막심 선배도 같이 다니니까 그리 다를 것 없이 바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선배는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이미 몇 군데나 갔었지. 그리고 신년 휴일 동안 러시아로 돌아온 김에 소치로 휴가 온 거야.”

“헬리스키도요?”

“이거 하려고 온 거나 다름없지. 이 산이 날 부르더라고.”

원래 막심 선배가 겨울 스포츠를 자주 즐긴다는 이야기는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진심일 줄은 몰랐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스키광이나 다름없는 발언을 하던 막심 선배는 손가락을 내 쪽으로 향하며 물었다.

“그런 너는?”

“저도 비슷해요. 친구들과 휴양 왔어요. 스키는 안 타고 구경하러요.”

그리고 막심 선배는 계속 신경 쓰던 내 뒤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에르네스트와 리처드, 아나톨리, 류보비. 모두들 막심 선배에게 인사를 보냈다.

선배는 히죽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렇네. 다들 아는 얼굴들이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

우린 단순히 학교 내에서 알고 지내던 정도가 아니었다.

함께 무대에 섰던 기억도 공유하고 있는 만큼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이기도 했다.

한편, 막심 선배 뒤편에도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묶은 여자였다. 언뜻 봐선 우리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데…… 스키복과 모자, 고글 때문에 자세히 알 순 없었다.

내가 그쪽을 바라보니 그 사람은 밝게 웃더니 고글을 위로 벗어 눈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첫인상만으로도 정말 많은 것을 교환할 수 있다.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본격적인 건 막심 선배의 몫이었다. 그쪽에서 먼저 선배의 팔을 당기며 물었다.

“막심, 이 애들 누구야? 아는 애들?”

“중앙음악학교 후배들.”

“아하.”

시원스러운 웃음과 함께 인사가 이쪽으로 향했다.

“안녕?”

“안녕하세요.”

“막심이 학교 이야기는 종종 했었는데, 그게 너희 이야기겠구나? 이런 곳에서 볼 줄이야. 운도 좋고 신기하네. 반가워.”

정말 신기한 일이긴 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어떻게 인사해야 하나 살짝 고민했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면 살짝 낯가림이 있기도 하고, 막심 선배와 어떤 관계인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개할게, 내 친……한 애인이야. 리디아라고 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 선배가 말해주었다. 난 깜짝 놀랐다. 정말인가요?

물론 막심 선배는 어떻게 봐도 모자란 부분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누군가와 사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긴 했다.

리디아는 괜히 부끄러운지 짓궂게 막심 선배의 어깨를 찔렀다.

“친구라고 했으면 화내려고 했어. 막심.”

“리디아, 너도 저번에 내 소개 똑바로 안 해줬었잖아.”

“그땐 상황이 그랬고.”

어떤 일인진 모르겠지만 그리 큰 문제는 아닌지, 두 사람은 잠깐 투닥이기도 했다.

싸우는 건 아니었다. 잠깐만 봐도 두 사람이 사이가 좋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하던 리디아는 우리 쪽에 다시 신경을 쓰며 말했다.

“아무튼, 모두들 처음 뵙겠어요. 리디아 페트로브나 브레즈네바라 해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입니다.”

“어……?”

내가 자기소개를 하자 갑자기 리디아는 멈칫하더니 앞으로 몇 걸음이나 다가왔다.

위압감을 느낀 내가 몸을 뒤로 빼자 리디아는 얼굴을 내밀고 날 자세히 관찰하더니 갑자기 박수를 짝 쳤다.

“아! 맞네! 타티아나가 너였구나? 얼굴은 알고 있었는데, 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해!”

“절 아시나요?”

“당연하지! 예전부터 알았고, 얼마 전엔 음반 내지 않았어?”

날 어떻게 아는지에 대해 한참이나 이야기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리디아는 곧 허둥지둥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며 부탁해왔다.

“사진 한 장만 찍어주면 안 될까?”

“괜찮아요.”

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날 알아본다는 건 영원히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날 보고 행복해하는 건 익숙하지 않아도 기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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