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8화
처음 보는 사람과 얼굴을 가까이 하고 사진을 찍는 건 꽤 부끄럽다.
하지만 리디아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오니 나도 조금은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방금 찍은 셀피를 확인하던 리디아는 다시 내 쪽을 휙 돌아보았다. 뭔가 행동 하나하나가 역동적인 사람이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 감상하듯 가만히 날 바라보더니 다시 양손을 흔들며 말했다.
“와, 어떡해 정말. 언젠가 꼭 연주회 보러 가야지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먼저 보게 될 줄이야.”
“아하하…….”
이렇게 열렬한 환호를 받으니 나도 무언가 돌려주고 싶은데, 이야깃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거리에서 만나는 팬들과 대화하는 주제는 대체로 내 음악에 국한되기에 이야기하기가 편하다.
하지만 리디아는 그뿐만이 아니라 막심 선배의 여자친구로 소개받게 된 사람이었다.
이런 소개를 받는 건 처음이다보니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를 기분이다.
일단 모스크바 음악원의 대학생일 테니 전공이 뭔지부터 물어볼까? 하지만 그건 해발 3,200미터에서 만나서 이야기하기엔 너무 딱딱한 이야기였다.
뭔가 조금 더 무난한 이야깃거리가 없을지 난 한참이나 고민해야만 했다.
그렇게 내가 어색해하고 있자 막심 선배가 슬쩍 끼어들어서 말을 가로챘다.
“그쯤 하고……. 우리 지금 비상 상황이잖아.”
“아 맞다…….”
주변 상황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내게만 집중하고 있던 리디아는 그제야 다시 사태파악을 했는지 침울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나 역시 그 비상 상황이란 것에 대해선 궁금한 것이 많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게…… 리디아, 그거 줘 봐.”
막심 선배는 스키를 들어올리며 내게 보여주었다.
난 스키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직관적으로 스키와 발을 고정시키는 장치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배는 한숨을 푹 쉬더니 손가락으로 스키를 툭툭 치며 말했다.
“여기서 밑까지 내려가는 방법은 스키를 타고 가는 수밖에 없는데, 리디아의 바인딩 라쳇이 고장 나서 말야. 밑에서 체크했을 땐 멀쩡했었는데.”
“못 신게 되는 건가요?”
“신는다 하더라도 큰일 나지. 내려가다가 풀려버릴 수도 있으니까.”
난 나도 모르게 옆으로 보이는 가파른 내리막을 보았다. 저 멀리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길을 가다가 구르기라도 하면…….
상상만 해도 아찔해져서 팔에 소름이 돋았다. 난 양손으로 팔을 감싸 쥐었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인 리디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막심이 마지막에 확인 안 해줬으면 나 죽을 뻔했다니까?”
그 말에 선배는 인상을 확 썼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왜? 고맙다는 건데?”
“원래 스키 타러 와선 절대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막심 선배는 부정적인 말을 하면 사고를 불러온다거나 하는 그런 미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모를 사고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안 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위험을 인식해야만 안전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음이 느껴졌다.
타고 내려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해 준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선배가 세심하게 주변을 살피는 사람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더더욱 이런 곳에서 스키를 탈 생각이 사라져가기만 하는 나는 그런 선배가 조금은 부러웠다.
“아무튼.”
선배는 어떻게 알아차렸는진 일단 제쳐놓고, 그다음 해결방안이 문제라는 듯 말했다.
“우리가 타고 온 헬리콥터가 기다려줬다면 어떻게 방법이 있었겠지만…… 간만에 온 거라서 바로 내려가기 아쉽더라고. 조종사는 다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가 봐도 되겠냐고 해서 그냥 보냈지.”
“그리고 가버린 다음에야 문제를 알아차리셨군요.”
“인생이 꼭 그렇더라니까.”
이번에는 살짝 농담을 섞으며 선배는 고개를 떨구었다. 난 그런 선배를 보며 웃었다.
주위를 휙 둘러보니 정말 이곳엔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통 까마득하게 높은 산들뿐이고, 우리가 밟고 있는 평탄한 곳은 헬리콥터가 착륙하고 사람들이 잠깐 서 있을 정도가 전부였다.
이곳을 오가는 리프트 같은 건 없고, 계단도 당연히 없었다. 애초에 헬리콥터가 아니라면 올 수 없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스키 없이 그냥 걸어 내려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꼼짝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약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자 이번에도 낙천적인 리디아는 깔깔 웃기만 했다.
“그렇게 우리 여기 조난되어 있었어. 아하핫, 웃기지 않니?”
“큰일 날 뻔하신 것 아닌가요……? 여긴 전화도 안 될 텐데.”
“그냥 뭐…… 헬리콥터가 다음 사람 데리고 다시 돌아오겠지 싶었어.”
그래서 아까 우리가 가까이 근접하자 양손을 마구 흔들었나 보다. 뭔가 했더니 역시 구조신호였던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냥 근처만 돌아보다가 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애초에 에르네스트와 리처드가 이곳에 와보고 싶다고 말해줘서 다행이었다.
정말 많은 우연과 행운이 겹친 일이라 생각하며 뒤쪽을 돌아보니 에르네스트는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말해보란 것 같다.
별로 그런 건 없었다. 단지 고마웠을 뿐.
웃으며 고개를 젓자 에르네스트도 조금 긴장을 풀었는지 삐딱하게 섰다.
난 다시 막심 선배를 돌아보았다. 선배는 만약 아무도 오지 않았다면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었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다.
“정 안되면 내가 먼저 내려가서 구조요청 해도 되는 거니까.”
“나 버리고 갈 생각 마! 갈 거면 나 업고 가라고!”
“그런데 얘가 자꾸 이래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막심 선배는 한숨을 쉬었지만, 리디아는 괜히 더 칭얼거리듯 말했다.
여기서 난 두 사람의 생각 차이를 살짝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막심 선배는 말 그대로 이 상황을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쨌든 간에 3,200미터에서 내려갈 방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니까. 이 상황을 위급 상황이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리디아는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큰 고생을 할 일은 없을 것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이곳은 헬리스키의 명소로서 사람들이 자주 왔다갔다 하는 곳이니까, 어떻게 되든 간에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리디아의 느긋한 바람처럼 우리가 오기도 했고…… 사실 조금 더 현실적이었던 건 그녀 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여유를 있는 그대로 말하면 막심 선배가 화를 낼 수도 있으니까 일부러 농담처럼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차이를 느끼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두 사람이 서로를 굉장히 위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내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막심 선배는 슬슬 본론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어쨌든…… 우리 좀 도와줄 수 있어? 라쳇만 고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들 내가 방법을 알 리 없었다.
뒤쪽을 보니 나와 같이 온 네 명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옆의 베니아민이 바로 내게 슬쩍 알려주었다.
“저희 헬리콥터에 예비 장비가 실려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걸 이분들에게 빌려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헬리콥터 뒤쪽으로 향했다.
“일단 보여드리죠.”
그리고 뒤편의 보관함 같은 곳을 열더니 장비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본래 헬리스키를 원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헬리콥터이다 보니 이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예비품들이 실려있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니아민은 막심 선배가 보여준 것과 똑같이 생긴 장비를 한 쌍 꺼내들었다.
그걸 받아서 선배는 스키와 리디아의 부츠를 해결했다.
“…….”
어디 앉을 곳도 없어서 리디아는 가만히 서 있었고, 선배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장비들을 조이거나 흔들어보면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주었다.
얼마나 진지한지 다리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는 모습이었다.
리디아는 잠자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우리가 멍하니 보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휙 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롭게 농담을 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여서, 나도 뭔가 똑바로 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
“야, 저 산 좋네.”
뒤늦게 고개를 돌리자 그렇게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닌지 모두들 딴청중이었다.
에르네스트와 리처드는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스마트폰을 들어 풍경을 찍으면서 무슨 전문가인 양 굴고 있었다.
아나톨리는 헬리콥터 주변을 배회 중이었고 류보비는 스마트폰을 하늘로 들어올리고 무언가 의식을 치르는 중이었다.
저러면 신호가 조금이라도 잡히는 걸까? 하지만 기지국은 저 밑에 있을 텐데.
아무튼 모두가 최선을 다해 딴청을 피우는 사이, 난 살짝 곁눈질로 옆을 바라보았다.
막심 선배는 여전히 진지했다. 세상 그 어떤 스키전문점의 직원도 지금 막심 선배보다 잘 해내진 못하리라. 난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마 지금 리디아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어때? 괜찮지?”
“…….”
장착이 다 끝났는지 막심 선배가 다시 일어나서 물어도 리디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뭐 불편해?”
“…….”
이번엔 반대로 도리도리 중이다. 선배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눈치 없이 제발 그러지 마세요.
결국 보다 못한 내가 나서서 선배에게 물었다.
“다 되셨나요?”
“아, 응. 이거 괜찮은 것 같은데. 빌려주면 두 배로 갚을게.”
두 배가 어떤 두 배인지 모르겠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갚으실 건 없어요. 조난당하신 상황이시잖아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에서 무언가 이득을 얻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물며 그게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긴 했다.
“무언가 갚아주실 생각이라면…….”
그런데 막 말로 뱉기 직전에 난 혹시나 내 말이 실수가 되지 않을까 고민해야만 했다.
뭔가 괜한 생각이란 걸 느끼면서도, 아까 봤던 두 사람에게 혹여나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안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난 급히 에르네스트를 불렀다.
“에르네스트, 잠시만요.”
“?”
난 그와 잠깐 옆으로 자리를 피했다. 어차피 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기에 난 그와 가까이 다가섰다. 그가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저 두 분을 초대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작게 속삭여 묻자 에르네스트는 옆을 슬쩍 보더니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두 명이 누군지, 초대는 어떤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단지 내 생각을 따라오지 못할 뿐이었다.
“그걸 왜 물어봐?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그……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서요. 저기 선배와 리디아…… 연인이잖아요.”
“……?? 그게 무슨 상관인지 난 잘 모르겠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니 나도 너무 유난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단순한 마음으로는 선배와 리디아를 초대해서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두 사람에겐 두 사람만의 오늘 계획이 있을 터였다. 그걸 내가 내 멋대로 침범해도 되느냐는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차라리 막심 선배 혼자라면 고민할 것도 없겠지. 억지를 조금 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디아는 그 상황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을 조리있게 설명해서 말할 자신이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고…… 난 결국 막심 선배에게 다시 돌아가선 조심스레 물었다.
“음…… 선배. 일단 지금 스키로 내려가실 거죠?”
“그럴 생각이야.”
“묵으시는 곳은요? 아들레르인가요?”
“어. 그런데?”
“저녁 식사 예약은 하셨나요?”
“……??”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선배가 날 바라보았다. 난 되도록 가볍게 제안했다.
“혹시 계획이 없으시다면 두 분을 초대하고 싶어서요.”
“초대라니?”
내 뒤편에 따라온 에르네스트가 이어 말했다.
“우리 지금 타티아나의 별장에 머물고 있거든요.”
“별장!?”
그런데 거기에 응답한 건 막심 선배가 아니라 리디아 쪽이었다.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쭈뼛거리던 태도를 휙 집어던지고는 눈을 빛내며 날 바라보았다.
그 태도를 본 선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떻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
“당연하지! 타티아나가 초대해 준다는데! 거절할 생각이었어!?”
거절은 상상도 못 하겠다는 듯 리디아는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이따가 내려가서 전화 주세요. 차를 보내드릴게요.”
“……난 자꾸 네 성을 자꾸 까먹는단 말이지. 혹시 저 헬리콥터도 네 거야?”
“제 건 아니죠.”
“뭐 역시 그렇게 말하겠지.”
가끔은 내가 베르체노프라는 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에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은데, 막심 선배는 처음부터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럼 이제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는 듯 선배는 목을 좌우로 까딱이며 스트레칭하더니 말했다.
“아무튼 알았어. 그렇게 할게.”
“지금 바로 내려가실 건가요?”
“그러려고.”
주저하지 않고 선배는 뒤로 돌아섰다.
“리디아, 가자.”
“지금?”
“그럼 뭐 언제까지 있을 건데. 춥지 않아?”
“추워.”
“그러니까. 내려가자.”
대화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내리막 쪽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대자연에 그대로 마주하는 것 같은 상황을 난 옆에서 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다.
“이따가 보자, 얘들아.”
그러나 리디아는 해맑은 목소리로 그렇게 안녕을 고하고는, 누구보다 먼저 빠르게 앞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가속도를 붙여가는 그녀를 놓칠세라 막심 선배 역시 바로 그 뒤를 따랐다.
“…….”
신발에 붙은 기다란 판, 그리고 지팡이만 쥔 두 사람은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고 가파른 설산을 마음껏 누비며 서서히 멀어져 갔다.
가까이 달라붙다가 자유롭게 멀어지기도 하고, 또다시 얽혀드는 두 개의 선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했다.
오늘 본 것들 중 가장 멋진 광경을 본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