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9화
막심 선배와 리디아가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을 한참이나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그 자취가 희미해져갈 무렵 난 간신히 옆을 돌아볼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잔뜩 고양된 표정이었다. 류보비가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저 동영상도 찍었어요!”
“헬리스키 광고로 써도 되겠네.”
리처드가 감탄하며 그녀를 칭찬했다. 옆에서 보니 그 말마따나 정말 구도가 아름답게 잘 찍혀 있었다.
시원하게 눈을 헤치고 나아가는 모습은 정말 그림같았다.
잠시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주위 풍경을 구경하다가, 난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소치는 상당히 따뜻한 곳이지만 역시 높은 산이다 보니 굉장히 추웠다.
이쯤 구경했으면 되었다 싶어서 난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저희도 돌아갈까요.”
“그러자.”
우린 다시 모두 헬리콥터에 올라탔고, 혹시 떨어뜨린 물건이 없는지까지 확실하게 확인한 후에 조종사는 신호를 받고 헬리콥터를 이륙시켰다.
둔탁한 프로펠러 소리는 헤드폰을 쓰고 있어도 귀로 들려온다.
그런데 이젠 그 소리도 꽤 익숙해져서 리듬감 있게 들릴 정도였다.
점점 멀어지는 카프카스산맥을 저마다 감상하던 와중, 리처드가 마이크를 통해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애매하고…… 내일은 우리 몇 시에 돌아갈 예정이야?”
“글쎄요……? 오후엔 출발했으면 하는데요.”
“그럼 오전엔 스키나 좀 타 볼까…… 혼자서 해도 상관없겠지?”
딱히 안 될 건 없었다. 거리가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오후에 어차피 공항으로 와야 한다면 중간 동선이기도 했고.
난 리처드의 태도가 바뀌었음을 느끼곤 은근하게 물어보았다.
“아깐 생각 없으시다면서요?”
“뭐, 생각이란 건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안 그래?”
그는 딱히 돌려 말하거나 하지 않고 단순히 말했다.
복잡할 것 없이 솔직담백한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리처드가 단순한 사람인 건 아니었다.
속으로 정말 많은 생각을 마치고는 그 결론을 간단하게 낼 뿐이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기에 리처드가 어떤 말을 하든 잘 믿는 편이었다.
그런데 가끔은 정말 난처할 때가 있다.
“넌 스노보드 타면 되겠다. 에르네스트.”
스키 이야기를 하던 리처드는 난데없이 거의 놀리는 투로 에르네스트에게 이야기를 휙 던졌다.
스틱을 잡을 수 없으니 스노보드를 타면 되겠단 논리였지만, 난 여전히 그런 말을 들으면 숨부터 막히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런 대책 없는 말 또한 리처드가 일부러 그러는 것에 가까웠다. 에르네스트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말라는 듯 대꾸했다.
“그게 진짜 발로만 타는 건 줄 아냐? 팔로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뭐 그냥 어떻게 해 보면 안 되냐?”
“이 자식이 남 일이라고 아주 막말하네?”
다시 두 사람은 이러쿵저러쿵 다투기 시작했지만, 그 모습은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말 이면에 어떤 생각들이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선 이런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나도 처음에만 놀랐지 지금은 나름 안심하며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몇 마디 주고받더니 리처드는 다시 내게 말했다.
“타티아나도 관심 있는 것 같던데.”
관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분명 설산을 타고 내려가는 두 사람은 예술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멋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딱딱한 내 머릿속 한편에선 설상 스포츠를 즐기다가 부상을 입을 확률이 얼마쯤 되는지 계산하고 있는 중이었다.
들어본 사례가 너무 많아서 다 꼽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지금 그 위험한 확률을 피해 가고 있을 두 사람을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난 꽤 오래전에 저울질을 끝마친 후였다.
“전 무서운 건 싫어서요. 못 할 거예요.”
“그렇긴 해. 아까 내려다보니까 진짜 아득하긴 하더라.”
“높지 않더라도 전…….”
불안정하게 두 다리로 서는 인간이 얼마나 쉽게 균형을 잃는지 난 잘 안다. 또 음악가가 얼마나 쉽게 망가지는지도.
난 그런 부분에 대해 원초적인 공포가 있다.
다만 그 공포보다 욕망에 대한 갈망이 더 강했고, 항상 벌벌 떨면서 살 순 없으니 입술을 꽉 물고 바로 서려고 할 뿐이다.
미처 말을 다 맺지 못하는 날 보던 리처드는 다리를 꼬아 앉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진 알겠지만, 뭐…… 살짝 도전은 해봐. 언젠간 너도 무서워하지 않게 될 수 있을 거야. 결국 사람은 다 적응하고 변하기 마련이거든.”
“그럴까요.”
“이미 그래. 그리고 나부터도 얼마나 많이 변했는데.”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리처드는 히죽 웃었다.
그 말대로였다.
그도 처음 봤을 땐 권태로움에 찌든 녹색 눈동자로 세상을 보고 있던 사람이었다.
별로 관심이 있는 것도 없고, 약간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내게 흥미를 보이고 다가오더니 상상도 못 할 일을 저지르기도 했고, 다른 친구들과 서서히 친해지면서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지금도 썩 말랑말랑하다고는 못하겠지만,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에르네스트가 그렇고 아나스타샤가 그랬듯, 리처드 역시 우리 옆에서 시간을 함께하며 서서히 변해간 것이다.
그 스스로도 그런 걸 느끼는 걸까 싶어 잠시 눈을 마주하고 있자, 옆에 앉아 있던 에르네스트가 불쑥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너도 배울 생각이야?”
“어…… 글쎄요. 막심 선배라면 안전하게 가르쳐주실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배울 거라면 막심 선배에게 배우는 게 좋을 것 같다.
장비를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을 보면 분명 스키나 스노보드를 타는 것도 안전하게 할 것 같았으니까. 원래 선배는 스노보드를 자주 탄다고 하기도 했고.
그런데 내가 그렇게 약간 애매모호한 대답을 내놓자 에르네스트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럼 배우지 말고 기다려 봐. 내가 다 낫고 나면 같이 하게.”
“……같이요?”
같이 하자는 말이 배우자는 건지 아니면 가르쳐주겠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내 귀에 들어온 말은 단지 그 정도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 나은 뒤에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 느껴졌다.
그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건 잘 안다. 때문에 난 그의 용기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함께하고 싶어졌다.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달리 확답을 더 받거나 하진 않고 일단 기억만 해 두라는 듯 묘한 눈빛으로 날 보더니 슬쩍 시선을 돌렸다.
별장의 헬리콥터 착륙장엔 금방 도착했다. 10분도 안 걸린 느낌이다.
아까 출발했을 땐 소치에서 아들레르로, 그다음에 다시 산으로 향했기 때문에 길이가 길었지만, 이번엔 바로 곧장 별장 쪽으로 날아온 덕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즐거우셨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다음 손님분들도 바로 오십니까?”
“아마도…… 그럴 예정이에요.”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종사는 여유 있게 이야기하며 손을 들어 짧게 경례를 보냈다.
난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하곤 헬리콥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내렸다. 모든 건 베니아민이 확실하게 준비하고 안내해 주었다.
미리 와 있던 차량으로 다시 별장까지 이동하자 이미 한승우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그리고 사샤는 나갈 준비를 마치고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우릴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왔니?”
“어땠어? 어라? 눈이 묻어 있는데?”
모두들 궁금하다는 듯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고, 우린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면서도 사진을 보여주진 않았다.
최대한 그 감동을 직접 느껴보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난 간단히 루트를 말해 주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헬리스키 지점도 꼭 가 보세요. 스키를 안 타더라도 갈 만한 곳이에요.”
“산에도 갔다 온 거야? 아, 그래서…….”
“예. 조금 오래 걸렸죠?”
20분 코스를 두 배도 넘게 걸렸으니 분명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리라. 본의 아니게 걱정을 끼친 건가 싶어 미안해졌다.
다행히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산 이야기를 듣더니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한승우 역시 마찬가지로 꼭 가보고 싶다 말하는 걸 보니 다들 이야기는 않고 있었지만 소치에 와서부터 계속 보이던 카프카스의 고산들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어차피 갈 거라면 준비를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다. 난 미리 갔다 온 사람으로서 해줄 수 있는 조언들을 건넸다.
“그리고 가실 거라면 조금 더 따뜻하게 입으시고…… 음, 보온병에 온수도 챙기는 게 좋을까요? 혹시 모르니. 아, 예비 장비도. 제가 베니아민에게 이야기해 둘게요.”
“……스키는 안 탄다며?”
“혹시 그 위에서 곤경에 처해 있을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니까요.”
“무슨 말이니?”
그제야 난 제일 신기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저희 그 위에서 막심 선배를 만났어요.”
“막심? 막심 드미트리예비치 말이야?”
“예.”
“그 선배가 왜 거기 있었어?”
“막심이라고?”
모두들 막심 선배를 안다. 때문에 갑자기 왜 그 이름이 나오냐는 듯 달려들어선 설명해주길 요구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난 차분하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스키에 있는 바인딩이란 장비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스키를 타고 내려가지 못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우리가 그 옆에 착륙한 덕분에 필요한 예비 장비를 빌려주게 되었단 것을.
들어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발렌티나가 사진 등의 증거자료를 보챘고, 류보비가 대신 찍어 두었던 동영상을 발렌티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거기엔 두 명이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기에 당연히 다른 의문이 뒤따랐다.
“여기 옆엔 누구야?”
“니콜라이 선배 같진 않은데.”
“아, 막심 선배의 여자친구분이요.”
“정말?”
이야기를 듣고 나선 다시 크게 흥미를 보이며 발렌티나는 류보비의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스키복을 입고 있는 뒷모습을 아무리 잘 보려고 한들 큰 의미는 없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겪고 왔는지 다 이해했는지 다른 네 사람은 놀라워하면서 약간은 부러워하기도 했다.
막심 선배를 만나서가 아니라 이런 신기한 일을 겪은 것 자체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같이 놀러가선 발이 묶여있던 거였구나. 너희가 안 갔으면 큰일이었던 것 아니야?”
“다른 헬리콥터가 갈 때까진 기다려야 했겠죠……?”
“다행이다. 네가 생명의 은인이네!”
“그렇게까진…….”
어차피 누군가가 도와주었을 것이다. 난 말끝을 흐리다가, 마저 전해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튼, 그렇게 만난 김에…… 오늘 초대했어요. 저녁에 같이 만나도 괜찮을까요?”
“두 사람 다 초대한 거야?”
“예.”
“당연히 괜찮지? 뭐 어때?”
모두들 막심 선배라면 잘 안다. 물론 바이올린과의 선배였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적에 발렌티나나 한승우, 사샤는 직접적인 접점은 없었을 수도 있지만 이미 날 통해서 인사 정도는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나가서 더 유명해지기도 했고, 여러모로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지금의 막심 선배에겐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발렌티나. 그 사람 예전 사진이나 영상 없니?”
“예전에? 아, 기타 칠 때?”
“응. 그거. 아, 예전에 한창 나돌 때 저장해 둘걸.”
“나도 없는데…… 다른 애들한테 혹시 있냐고 물어볼까?”
“빨리.”
뭔가 속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나도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막심 선배는 중앙음악학교의 락밴드에 소속되어 있었던 과거가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걸 직접적으로 알리진 않았지만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걸 지금 왜? 난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잠시만요. 지금 뭘 찾고 계신 건가요?”
“당연히 막심 선배의 흑역사지.”
“……그런 걸 왜?”
발렌티나와 아나스타샤는 동시에 날 돌아보았다. 왜 이걸 이유까지 따져가면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를 놀려보겠니?”
“…….”
두 사람의 대답에 난 탄식을 흘렸다. 아무래도 오늘 난 막심 선배를 지옥으로 끌어들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