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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60화 (960/1,277)

##  960화

오빠와 다른 네 명의 친구들이 헬리투어를 간 사이, 막심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 나랑 리디아는 방금 내려와서 쉬고 있는 중이야. 너희는?

“별장에 와 있어요.”

- 벌써? 그거 진짜 너희 헬리콥터였구나.

아까 봐놓고도 선배는 괜히 그렇게 말했다. 아직도 신기해하는 것 같은 투였다.

그 흥미는 자연스레 별장으로 향했다.

- 아무튼…… 그럼 방문은 언제쯤 하면 될까?

“오늘 계획하신 일정이 있으실 테니 그 일정을 우선하신 후에 편하신 대로 하셔도 괜찮아요.”

난 막심 선배와 리디아의 여행을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언제라도 내 일은 뒷전으로 해도 상관없단 생각이 있었다.

선배 역시 잠시 생각할 것이 있는지 고민하더니 말했다.

- 음, 그러면 주소만 불러줘. 저녁 전에 갈 테니까.

“주소는…… 아뇨, 시간을 정해주시면 제가 차를 보내드릴게요. 그게 나을 것 같네요.”

- 그 말도 진짜였어?

이번엔 정말 좀 당황한 듯한 말이 돌아왔다.

물론 이곳의 주소를 베니아민에게 물어 가르쳐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오는 길에 바리케이트가 있기도 하고…… 택시를 타고 오게 하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빅토르도 자신이 조금 고생하더라도 손님은 직접 태워 오는 편을 선호하겠지.

난 슬슬 보안 시스템이라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선 딱 잘라 방법을 정해 두기로 했다.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하진 않아요.”

- 뭐…… 알았어. 그러면 고맙게 받아들여야지.

이 초대를 받아들이면서 선배도 너무 사양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는지 시원스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지금 머물고 있는 곳과 이후 스케줄 등을 내게 말해 주었다.

- 수족관에 갔다가 스케이트 장에서…….

“…….”

내가 말해달라 한 것이긴 하지만, 어쩐지 다른 커플의 데이트 코스를 듣는 느낌이라서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인 막심 선배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데 내가 부끄러워하는 것도 이상하다.

때문에 나도 일부러 사무적인 태도로 그 일정을 들으면서 대략 몇 시쯤에 차를 보내면 될지 의논했다.

선배는 레스토랑도 몇 군데 알아놓은 곳이 있긴 하지만 아직 예약은 하지 않았다면서 그럼 저녁 식사를 하러 오겠다고 말했다.

- 갈 때 뭐 사가면 될까?

“괜찮아요.”

- 제발 말해줘. 아까부터 리디아가 뭘 가져가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무섭게 중얼거리고 있다고.

아예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정도라면 정말로 아무 아이디어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게스트로서 선물을 고민하다가 오죽했으면 이럴까 싶다.

잠깐 생각해 본 나는 마침 부족했던 것을 떠올렸다. 며칠간 있으면서 적어도 주방에 관한 건 어느 정도 파악한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저녁엔 샤슬릭 파티를 할 생각인데, 소시지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소치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니만큼 샤슬릭 파티로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때문에 아침부터 소고기부터 돼지고기, 양고기, 닭고기 등 다양한 재료들을 이안이 준비해놓고 있다는 건 들었는데 그중 소시지는 없었다.

- 소시지? 그거면 돼?

“예.”

- 그럼 얼마나 사 갈까. 총 몇 명인데?

“열 명이긴 하지만 재료들이 다양하게 많으니 조금만 있으면 될 것 같아요.”

- 재료의 일부분으로써 말이지?

막심 선배는 이해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고민하고 있던 부분을 내가 정해줘서 고맙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할게.

“부탁드릴게요.”

- 무슨 부탁까지야.

전화를 끊고 나서 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다른 준비는 전부 이안이 맡아서 해주겠다고 했고 샤슬릭은 양념을 제외하면 그리 복잡한 요리가 아니었기에 내가 딱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떤 식으로 준비되어가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성을 느꼈다.

12명이나 모여 함께할 저녁 시간이 훌륭하길 바라는 건 호스트로서의 내 당연한 바람이었다.

***

오후 5시쯤 되면 해가 지는 겨울엔 저녁이 길고 춥다.

이 저녁을 이겨내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안들은 고안했는데, 당연히 그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으리라.

빅토르가 차를 끌고 나간 사이 우린 로비에 모여 있었다.

한승우와 발렌티나는 인터넷에서 찾아낸 웃긴 영상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는 그 반응으로 대결을 하기도 했는데, 난 아무리 엄격하려고 애써도 버틸 수 없어서 매번 웃기만 했다.

쉴 새 없이 그렇게 웃고 떠들며 기다리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차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난 미리 나가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숲속에 성이 있네.”

양손에 무언가 잔뜩 든 막심 선배는 이쪽으로 걸어오다 말고 별장과 숲을 둘러보며 찬사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보인 표정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조금 재미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던 선배의 시선이 살짝 내려와 내게 향했고, 곧 선배는 피식 웃었다.

“왜 차를 보내주겠다고 한지 알겠더라.”

“후후, 편히 오셨나요?”

“덕분에.”

택시로 오는 것보단 확실히 이쪽이 편하다. 난 뒤편에 있는 빅토르에게도 눈인사를 보냈다.

선배는 양손의 봉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건 선물이야. 소시지만 사오기엔 조금 아쉬워서 이것저것 사 왔어.”

“이렇게 많이…….”

“아니야, 별로 안 많아.”

샤슬릭 파티를 할 거라고 했더니 생각난 게 많았나 보다.

괜히 뭘 할 건지 이야기했나 싶었지만, 그래도 재료가 많아서 나쁠 건 없을 테니 괜찮을 것 같다.

그 뒤편에선 리디아가 따라왔다. 그녀의 표정에도 기쁨이 가득했다.

남자친구를 따라 모르는 여자의 별장에 초대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미소였다.

아까 산 위에서 만났을 때 팬이라고 했었던 건 빈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리디아는 해맑은 웃음과 함께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 타티아나. 이렇게 멋진 곳에 초대받다니, 정말 행운이야.”

“저야말로 와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처음 만난 인연이지만, 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 부디 좋은 기억을 공유하고 앞으로도 잘 지냈으면 좋겠단 생각이 있었다.

간단히 악수로 인사를 마치고 나서, 두 사람은 내 뒤편에 있는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아까 산에서 봤던 멤버들은 또 보는 것이니 괜찮았지만, 간만에 보는 사람들도 있어서 막심 선배는 은근히 신경 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 길 것도 없었다.

“미안, 갑자기 저녁에 끼어들게 되었네.”

“괜찮아요.”

“간만에 봐서 좋은걸요 뭐.”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다음은 선배가 리디아를 모두에게 소개해주었다.

약간 어색해하는 선배와 달리, 어색해하지 않고 반갑게 인사하는 그녀는 모두에게 쉽게 환영받을 수 있었다.

“반가워요. 저희는 다들 중앙음악학교 10학년이에요. 편하게 대해 주세요.”

“우리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특히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산에서 그녀를 보지 못해 이번이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막심 선배의 여자친구란 것에 굉장히 흥미를 가지는지 꽤 살갑게 대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가까이에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저러다가 막심 선배의 과거 이야기가 언제 나올지 모르겠다.

지켜보는 내가 다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막심 선배는 리디아가 아나스타샤와 잘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는 조금 안심한 투로 이번엔 루슬란 오빠를 돌아보았다.

살짝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루슬란 오빠는 선배와 눈을 마주하고는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막심, 오랜만이야.”

“그러게. 루슬란.”

“늦었지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 축하해.”

두 사람 원래 친했었던가……?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난 궁금해져서 과거에 언제 오빠와 선배가 만난 적이 있는지 떠올려보고 있었다.

오도카니 서서 보고 있는 모습이 딱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였는지, 루슬란 오빠가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너희가 연주회 하고 놀러 왔을 때, 편하게 지내기로 했지.”

“그게 벌써 재작년이네.”

그제야 난 기억을 선명하게 찾아냈다. 자선 연주회 때였다.

그때 연주자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해서 연회를 열었는데, 오빠와 막심 선배, 그리고 일리야가 한 자리에서 어울려 놀았던 것이다.

“와인 사왔는데, 마실 거지?”

“당연하지.”

그날 하루 봤을 뿐인데도 두 사람은 이미 친한 친구처럼 보였다. 난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서로 인사를 마친 모두는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인원이 12명이나 되다 보니 로비가 좁아 보일 정도였다. 모두가 앉을 소파가 부족해서 몇몇은 서서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래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가장 많은 주목은 받는 건 막심 선배와 리디아였다.

선배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로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세계 투어 콘서트를 다닌 사람이었고, 또 두 사람은 이곳에 연인으로 초대받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스페인 투어가 반응이 좋던데요, 거기 어땠어요?”

“두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된 건데요?”

질문이 완전 들쑥날쑥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쏟아지는 관심들이 싫지는 않은지 두 사람은 차근차근 질문에 답해주기도 하고, 필요한 이야기를 해 주기도 했다.

나도 직접적으로 묻거나 하진 않았지만 살짝 떨어진 곳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만났고, 리디아는 작곡과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거기에 에르네스트가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난 괜히 그 옆으로 가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 그럼 모두들 모였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

한창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을 무렵, 잠깐 로비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루슬란 오빠가 우리에게 말했다.

슬슬 시작하겠단 일이 뭔진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두 오빠를 따라 별장 뒤편의 정원으로 향했다. 그곳엔 다용도로 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샤슬릭 파티를 하는 데에도 충분했다.

넓은 공간 한가운데엔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샤슬릭용 그릴인 만갈mangal이 세 개나 이미 설치되어 있었고, 집게나 쇠꼬치 등을 올려놓기 위한 선반이 옆에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추운 겨울바람에 대한 대책으로 이미 비닐 바람막이까지 설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곳의 고용인 분들이 정말 수고해주신 덕분이었다.

“이런 샤슬릭 파티는 정말 오랜만인데.”

“본격적인데요?”

“두 명만 따라와, 고기 가지러 가자.”

딱히 서로 따지거나 할 것도 없이 자발적으로 모두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세팅은 거의 다 되어 있었지만 중요한 건 지금부터 시작이다. 고기를 가지고 와서 쇠꼬치에 꽂고 구워야 하는 것이다.

그 일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건 남자들이었지만, 이런 일은 모두 함께 하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기 때문에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나섰다.

가지고 온 고기와 야채를 자르고 쇠꼬치에 꽂는다. 단순한 일이었지만 모두가 방식도 요령도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모양이 나왔다.

“그렇게 작게 자르면 어떻게 해?”

“시비 걸지 마. 내가 먹을 거니까.”

꼬치를 만들다 말고 다투기도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아이들도 모두 하나씩 해 보길 바랐기에 옆에서 붙어서 도와주려고 하는데, 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

에르네스트는 고기가 아닌 만갈 쪽에서 부지깽이를 들고 숯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일하기 싫어서 딴청을 피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지금 에르네스트는 겉보기엔 괜찮아 보이지만, 여전히 부자유스러운 것이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닫고 나니 마음 한편이 저릿했다. 하지만 난 내색하지 않고 쇠꼬치와 고기를 한 덩이 쥐고 에르네스트의 옆으로 다가갔다.

리처드가 했던 것들을 떠올리면서, 말을 걸었다.

“에르네스트.”

“어?”

에르네스트는 약간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그에게 쇠꼬치를 내밀었다.

“이것 좀 잡아 주세요. 제가 혼자서 해보려는데 잘 안 되어서요.”

기다란 쇠꼬치를 쥐고 고기를 제대로 꿰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나처럼 손에 힘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에르네스트는 쇠꼬치를 받아쥐고는 옆으로 기울였다.

이 와중에도 실수로라도 내 쪽으로 향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 느껴진다.

난 가까이 다가서선 들고 있던 고기를 그 위에 신중하게 찔러 넣었다.

꼭 혼자서 하나씩 만들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두 명이서 두 개를 만들어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확신과 자신감이, 내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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