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2화
리디아는 막심이 타티아나와 친분이 있다는 건 이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도 우연히 보자마자 이렇게 초대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일 줄은 몰랐다.
초대를 받고 나선 여러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도 아닌 베르체노프의 별장에 지금 아니면 언제 가보겠냐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간신히 연초에 시간을 낸 막심과 휴가를 즐기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산 위에서 타티아나와 마주한 리디아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관심이 더더욱 증폭됨을 느꼈다.
‘관심이 안 가게 생겼어?’
막심은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
장차 반드시 유명세를 타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고, 진짜로 그녀가 신문이나 뉴스 등에 나오게 되면 마치 자기 일인 양 보여주기까지.
솔직히 리디아는 막심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꾸 다른 여자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최근 들어선 그것이 정말 순수한 음악가로서의 표현임을 이해했다.
리디아가 작곡가 모리스 라벨을 존경하며 사랑한다고까지 표현해도 막심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해주는 것처럼, 그 반대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라벨은 죽었고 타티아나는 살아있으니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다.
게다가 베르체노프 콘체른이란 어마어마한 배경과, 빼어난 외모까지.
‘사진보다 실물이 백 배쯤은 낫네.’
설산에서 본 타티아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로 느껴질 정도로 특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엔 누군지도 못 알아봤다가 나중에 이름을 듣고 나서야 깨달은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진이나 영상에는 담기지 않는 무언가가 타티아나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리디아를 더 놀라게 한 것은 타티아나의 외견이 아니라 태도였다.
17세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타티아나는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미 졸업한 막심에게도 존칭과 경어를 빠트리지 않았고, 정갈한 어휘와 곧은 목소리엔 신중함이 담겨 있어서 믿음을 주었다.
전용 헬리콥터를 타고 다닐 정도라면 세상의 일들을 대충 어느 정도는 마음대로 여길 만도 한데, 별장에 초대를 하는 일조차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리디아는 이미 그때 타티아나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전까지의 모든 선입견 등을 내려놓고 다시 차근차근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졌다.
한층 더 깊은 팬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참에 쉽게 공감대를 살 만한 이야기를 해 볼까 싶었는데…… 뭔가 시작부터 꼬인 느낌이다.
‘분명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리디아가 그런 확신을 지닌 건 오늘 하루 보고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전부터 이미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는 소문이 무성한 관계였다.
그 소문의 시작은 에르네스트가 작곡가로서 공식 발표한 첫 곡을 타티아나에게 헌정하면서부터였다.
타티아나는 그 곡의 초연을 맡았고, 자신의 연주회와 에르네스트의 작곡가 데뷔를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물론 곡을 헌정하는 행위는 친구에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이후로도 두 사람의 교제에 대해 확인된 건 없었다.
적당한 가십이라도 흘러나올 만한데, 그 어떤 것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 하더라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꼭 정해지지 않더라 하더라도 친구를 넘어가 있는 관계는 얼마든지 있고.
그리고 오늘 두 사람을 직접 본 리디아는 그 확신을 더더욱 굳게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아도 타티아나의 헌신적인 태도는 그냥 친구라기엔 너무 가까웠으니까.
“……음.”
하지만 그 확신을 주제로 이야기를 걸어보자 타티아나는 곧장 난색을 표했고, 그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 반응이 단순히 부끄러움이나 숨기고 싶어 하는 류의 반응이 아니라, 진짜로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리디아는 굉장히 당황했다.
완전히 잘못 짚었나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리디아는 그동안 두 사람의 관계성을 너무 일차원적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복잡하게 들어간다면 짚어볼 곳이 많다. 왜냐하면 몇 달 전 에르네스트에겐 큰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큰 사고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비틀어 놓는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리디아의 상상력은 다친 에르네스트를 무조건 감싸고 도는 타티아나와 그런 그녀를 이용하려는 에르네스트를 떠올리기까지 했다.
물론 옆에서 본 에르네스트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어떨지 알 수 없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그런 상상을 하다가, 결국 리디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타티아나가 보이는 반응에서 그녀는 이 주제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말씀 못 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타티아나는 이상한 오해를 받는 건 싫다는 듯 우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리디아는 혹시라도 말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최대한 안전한 외곽에서부터 조금씩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아무튼, 그냥 친구인 거지?”
“……예.”
“그럼 막심이랑 친한 것처럼…… 에르네스트랑도 그런 관계?”
“…….”
음악가로서의 우정을 교류하는 사이냔 질문에 타티아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조금 달라요.”
리디아는 그럼 그렇지, 하고 말할 뻔했다.
타티아나는 사람을 꽤 진정성 있게 대하는 타입이었다.
때문에 지금 말도 분명 진실된 마음을 이야기한 것이란 느낌이 분명히 전해져왔다.
하지만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도 타티아나는 조금 다르다는 게 얼마나 어떻게 다른 건지 잘 설명하지 못하겠다는 듯 머뭇거렸다.
리디아는 조금 답답했다.
아까 두 사람이 샤슬릭을 나누어 먹는 것도 봤다. 그건 아무나랑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타티아나가 프렌드존 같은 걸 억지로 만들 성격도 아닌 것 같았고, 에르네스트도 성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 같진 않다.
그냥 쉽게 이야기하자면 얼마든지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디아는 절대 그러면 안 될 것 같단 느낌을 무시하지 않았다. 때문에 단조롭게 받았다.
“그렇구나.”
“미안해요. 이런 식으로밖에 말하지 못해서.”
“어? 아니야, 아니. 멋대로 확신하고 갑자기 물어본 내 잘못인걸.”
리디아는 일단 사과부터 하며 분위기를 수습해나갔다.
조금만 더 타티아나와 친했다면 요리조리 파고들면서 이야기를 끌어내보기도 했을 텐데…… 그렇게 할 상황은 아니었다.
리디아가 어떤 정보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타티아나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억측에 불과하다.
지금의 한계를 느끼며 리디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친해져서 더블데이트를 해도 재밌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거기까진 갈 길이 멀 것 같았다.
‘어색하네…….’
괜한 소리 말고 그냥 고마웠던 이야기나 쭉 할 걸 그랬다. 아니면 음악가로서 할 만한 이야기들이라던가.
타티아나의 음반에 사인이라도 받으려고 음반 매장을 몇 군데나 둘러보았는데 죄다 매진이어서 못 사온 것이 이렇게 후회될 줄은 몰랐다.
정 안 되면 수록곡이 어떻게 되는지라도 알아뒀어야 했는데, 그걸 전혀 모르니 지금은 이 어색한 분위기를 음악으로 풀고 싶어서 할 말이 없었다.
조금 더 뒤로 돌아가서 가을 연주회의 이야기나 해볼까, 아니면 막심과 했다던 자선 연주회에 대한 걸 물어볼까.
여러 생각으로 리디아가 골치를 앓고 있을 때였다.
“저기…… 리디아.”
“응?”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
리디아는 반색하며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이 상황을 살짝 어색하게 여기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눈을 마주하지도 못하며 물어보았다.
“막심 선배와 학교에서 만났다고 하셨죠? 어떤 부분을 보고 좋아하시게 되었나요?”
“앗, 궁금하니?”
“…….”
타티아나는 어색한지 고개만 끄덕거렸다.
아까 갑자기 연애 이야기는 싫다고 했으면서, 반대로 이렇게 물어본다는 게 좀 일방적이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리디아는 기뻤다.
타티아나가 조심스레 흥미를 보인다는 건, 지금까지 이야기를 잘못하고 있기만 한 건 아니란 증거나 다름없었기에.
하지만 이윽고 고개를 든 타티아나의 눈엔 흥미진진함과는 약간 다른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그 감정의 이름을 규정하는 건 쉽지 않았다.
리디아는 살짝 위축됨을 느꼈으나 그래도 물어본 것에 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막심은 다른 남자들과 일하러 가고 없었다. 때문에 리디아는 스마트폰을 켜선 막심의 사진을 화면 위에 띄웠다.
목을 뒤로 쭉 빼고 마치 품평하듯 콧소리를 내자 타티아나가 낮게 웃었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리디아는 평가했다.
“어디 볼까…… 일단은 얼굴이지.”
“…….”
그 첫마디에 타티아나는 약간 정색했다.
이런 닭살 돋는 대답을 들을 줄 알았다면 물어보지 말걸, 하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리디아는 반쯤은 장난이라 하더라도, 나머지 반은 진담이었다.
한참 지나서야 타티아나는 실례라는 걸 깨달았는지 얼른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현실적인 답이네요.”
“그렇지 않니? 잘생겼잖아? 막심도 이 이유를 제일 좋아하던데.”
“나르시스트…….”
“응?”
“아뇨, 아무것도……. 그럼 그다음은요?”
타티아나가 허둥지둥 말했다. 아무래도 사람을 속이거나 하는 데엔 어설픈 면이 많은 것 같다.
일단 아무것도 못 들은 걸로 치고, 리디아는 곰곰이 막심의 장점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장점밖에 없는 것 같은데?’
생각해보려고 하니 정말 많았다. 내가 그 애를 이만큼이나 좋아하는구나 하는 자각이 새삼 들 정도로.
자세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었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걸 전부 이야기하는 것도 조금 부끄럽다.
리디아는 전체적인 총평을 어떻게 내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간신히 말했다.
“편안함……? 그런 게 있지. 막심에겐.”
말해놓고 보니 정말 할 말이 없어서 가까스로 립서비스를 하는 것처럼 들린다.
리디아는 자신의 표현력이 절망스러웠다.
그녀는 정말로 막심을 편안하게 느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기에 약간 억울했다.
함께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거나, 밥을 먹고 이렇게 같이 놀러 다닐 때도. 같이 있으면 언제나 편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세련되게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리디아는 타티아나가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네 생각엔 안 그래?”
“아뇨, 그건 아니에요. 막심 선배는 뒤끝 없고 쿨하죠. 편한 성격인 것 맞아요.”
“그럼…….”
그렇게 막심에 대해선 잘 인정하면서도 왜 모르겠다는 듯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그 이유는 간단히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그녀가 생각하는 대상이 막심이 아니라 다른 쪽에 향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대상 역시 지금은 한 사람밖에 없다.
‘혹시 에르네스트 성격이 진짜로 별난가?’
아까 잠깐 하다가 지워버린 생각이 다시 둥실거리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에게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리디아의 말에 타티아나는 별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체 에르네스트가 뭘 얼마나 힘들게 하길래 저 정도로 어려워하는 건지 가늠이 잘 안 될 정도였다.
걱정스레 바라보자 타티아나는 그 시선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리디아가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읽어낸 눈빛이었다.
타티아나는 빠르게 딱 잘라 말했다.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데, 에르네스트가 성격이 나쁜 건 아니에요. 절대로.”
“아, 그래…….”
“정말이에요. 에르네스트는 제가 편해지길 바라고, 저 역시 그가 그렇길 바라지만…… 이건 제가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문제라서…….”
필사적으로 변호하는 타티아나를 보며 리디아는 진정하라고 웃으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성격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에르네스트의 현 상태에 관련된 문제인 것 같았다.
그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부상을 입고 피아노를 전혀 못 치는데, 옆에서 편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
그렇게 보자면 지금 타티아나의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도 꼭 나쁜 신호라고 볼 수만은 없었다.
“뭐 꼭 편해야만 좋은 건 아니잖아? 응. 꼭 그런 건 아닐 거야.”
정리된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리디아는 이번에도 영 이상하게만 들리는 말을 하고 말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타티아나와 눈을 마주하기가 어려워져서, 리디아는 얼른 앞에 있는 샤슬릭을 하나 집어 들곤 마구 빼내어 그녀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