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63화 (963/1,277)

##  963화

리디아와의 대화는 조금 어색하면서도 묘한 공감대 위에서 흘러갔다.

내가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있는 만큼 그녀 역시 내게 궁금한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엔 상당한 오해도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건 그녀의 질문에 내가 반응을 이상하게 한 탓이기도 했지만, 아직 내가 친구들과의 관계를 타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데, 남에게 설명하는 건 당연히 훨씬 더 어렵다.

그에 비해 리디아가 막심 선배와의 관계를 명료하게 하고 자랑하는 모습은 듣는 내가 부끄럽다가도 멋지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래된 사이는 아닐 텐데도…….’

선배가 졸업 후에 학교에서 만난 것이면 길어봐야 반년 남짓이다.

그사이에 이만한 신뢰와 애정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정말로 좋아한다면 시간은 큰 상관이 없는 걸까.

알 듯 모를 듯 한 생각들의 꼬리를 손끝으로 건드려가며 리디아와 나눈 대화들을 되새겨보다가, 문득 제일 중요한 걸 빠트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보다…… 음악에 대해선 말씀하시지 않으시네요?”

“음악?”

“예. 막심 선배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시잖아요.”

아까 왜 좋아하게 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제일 먼저 예상할 수 있었던 건 막심 선배의 음악적 재능 쪽이었다.

확실히 그 부분에서 선배는 탁월하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아마 반했다면 그쪽이 아닐까 하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리디아는 내 말을 듣고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내가 그걸 안 건 쟤 따라다니기 시작하고도 한참 후라서.”

“그런가요……? 우승자인데도요?”

“학교 내에선 유명한 연주자로 소문이 자자했었나 본데…… 난 소문이 좀 어두워서. 아무튼 유명해서 난 더 귀찮았어.”

“아…… 아하하…….”

이런 답변이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해서 난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더 귀찮았다고? 그럼 선배가 무명 음악가였다면 그걸로 리디아는 더 기뻐할 수 있다는 걸까.

그러나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리디아는 확실하게 못박았다.

“물론 음악도 잘하면 멋지기야 하지. 하지만 그게 사람이 좋은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

짧지만 명쾌한 한마디였다.

난 음악가 중에서도 시야가 편협하고 맹목적인 편에 속한다. 스스로 그 정도 자각은 있었다.

때문에 가급적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하곤 있지만, 지금 막심 선배가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를 찾으면서도 첫 번째로 음악을 떠올릴 정도로 어쩔 수 없이 내 기준은 음악에 향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일 수밖에 없는 나도, 여러 기억과 지난 몇 년간의 추억으로 많이 바뀌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에르네스트의 피아노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지 한참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에르네스트에게서 서서히 흥미를 잃어가고 있진 않았다.

만약에,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지만…… 정말로 만에 하나 에르네스트가 영영 피아노 앞으로 복귀하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그를 멀리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러진 못하리라. 난 그 누구 앞에서라도 자신있게 그리 말할 수 있었다.

다만, 지금 단 한 가지 날 복잡하게 하는 건, 그 자신감이 죄책감에서 비롯된 게 아니란 보장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

죄책감 또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질 때 필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긴 하다.

하지만 적어도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어렴풋이 그 모든 것을 눈치채고 있고, 언젠가 내 죄책감에 대해 의문을 표할지도 모른다.

난 거기에 대답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적당한 선을 두고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기도 했다.

리디아와 잠시 이야기를 하면서 난 그걸 언제까지고 미뤄둘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새삼 깨달았다.

“그 말이 맞아요.”

내가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이다보니 심지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음악에 맹목적으로 되어 가고 있지만, 이게 그렇게 좋기만 한 건 아니란 생각이 근래 들어 조금씩 들고 있었다.

콩쿠르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쓸 수 있는 신경을 가급적 전부 콩쿠르에 쏟아야 한다는 건 내게 있어 진리와도 같은 것이지만……

리디아나 막심 선배를 보면 그것도 정말 강박관념에 지나지 않나 싶기도 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날 보던 리디아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그래도 국제 콩쿠르 우승자가 남자친구라서 득 본 건 많지. 내 작곡 실기를 도와준다든가…… 그냥 대충 써놔도 막심은 그걸 다 음악처럼 들리게 연주해 준다니까?”

“…….”

“잠깐만, 왜 그런 눈으로 봐? 그렇다고 내가 득만 본 건 아니다? 나도 막심이 주문하는 것들 해결해주느라 머리 아픈 적이 많았으니까.”

“주문이요?”

“콰르텟을 바이올린 솔로로 최대한 어렵게 편곡해 달라거나……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니?”

뭔가 새로운 관점을 얻어가는 기분이던 나는 그 말에 그만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상적인 커플로 보이는 두 사람도 결국 음악가로선 비슷한 면을 마주하고 있던 것이다.

그 사이에선 강박관념이랄 것도 없고, 특별히 맹목적이라 할 것도 없었다.

서로 돕기도 하고 손을 잡아 이끌기도 하면서 음악이란 목적을 두고 같이 향해갈 뿐.

막심 선배도, 리디아도 어쩔 수 없는 음악가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나도 앞으로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은 희망적인 기분이 든다. 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부러워요. 두 분.”

“뭐가?”

“그렇게 작곡한 곡을 연주하거나…… 또 도와주거나 할 수 있다는 점이요.”

“무슨 말이야? 너도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

“……예?”

멀거니 되묻고 나서야 난 리디아가 왜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날 보고 있는지 알아챘다.

나 역시 에르네스트에게 곡을 헌정받아서 연주하기도 하고, 그도 날 음악가로서 도운 적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건…….”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에르네스트에게 곡을 헌정 받은 건 맞지만, 그건 내가 고안한 기호에 대한 교환조건으로 달라고 말해서 받아낸 것이었다.

그러니 면밀히 따져보자면 억지를 써서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순수한 헌정과 초연이 아니다.

하지만 완전히 계산적이라고 딱 잘라 이야기할 순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 그 곡을 보자마자 내가 연주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누가 그 어떤 억지를 쓰더라도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싫으면 싫다고 차갑게 딱 잘라 말할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웃으면서 그럼 가져가라고 했던 건 어떻게 봐도 곡을 내어주기 싫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나도 마음 놓고 연주할 수 있었고…….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어떠한 거래와 음악가 동료간의 신의 등으로 설명하기엔 그 선이 굉장히 애매하다.

난 그런 식으론 그 누구도, 심지어 나 자신도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때도 이렇게 생각했었나? 아니면 지금 생각이 바뀌었나?

잘 모르겠다. 머리가 빙빙 도는 기분이라 난 고개를 숙이며 한 손으로 눈 위를 덮었다.

리디아가 옆에서 괜찮냐고 물으며 당혹스러워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서 난 다시 고개를 들고는 리디아가 빼놓았던 샤슬릭을 입에 넣었다.

일단 무언가를 물고 있으니 어지럽던 머리가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리디아도 야채들을 집었고, 우린 한동안 샤슬릭 재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까 전보단 훨씬 더 가볍고 무던하게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서 집중력을 그리 많이 끌어쓰지 않아도 되었다.

“아, 애들 왔다.”

고기와 야채를 두어 개 먹었을 즈음, 남자들이 다시 돌아왔다.

모두들 무언가 잔뜩 가져오고 있었는데, 소시지를 구울 수도 있는 스토브와 접시와 컵, 그리고 뭔가 커다란 천막까지 등장했다.

저게 뭔가 싶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루슬란 오빠는 천막을 척척 펴서 설치했다.

다 펴 놓고 보니 그것이 프로젝터용 스크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말 제대로 준비를 한 모양이다.

그렇게 오빠가 프로젝터까지 세팅하는 사이, 막심 선배와 아나톨리는 바이올린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깐 내가 켜 봐도 돼?”

“저야 영광이죠.”

혹시 몰라 챙겼던 바이올린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선배는 바이올린의 주인인 아나톨리에게 양해를 구했고, 아나톨리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가 자신의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해본다는 것에 잔뜩 들뜬 듯 보였다.

하지만 곧 그 시선은 내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 바이올린 주인은 타티아나 누나라서요.”

“너한테 준 것 아냐?”

“전 빌렸다고 생각해요.”

멀리 있기도 하고 주변 소음이 많았지만, 난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아나톨리는 내 쪽을 향해 분명하게 말했다.

“실력이 안 되면 돌려드려야죠.”

내가 지켜보고 있는 걸 의식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아나톨리는 평소에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바이올린을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가 앞에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아나톨리는 꿋꿋하게 자신의 각오를 밝혔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막심 선배는 호탕하게 말했다.

“오, 좋은 마음가짐인데.”

하지만 그 특유의 장난기는 어디 가지 않는다.

선배의 맹렬한 눈빛이 아나톨리와 바이올린을 번갈아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아나톨리는 바짝 얼어붙었다.

그걸 확인한 후 선배는 짓궂게 웃더니 내 쪽으로 크게 소리쳤다.

“자, 그렇게 말하는데. 어때? 타티아나. 이거 내가 켜봐도 될까?”

“그러세요.”

“내 실력이면 이걸 갖기에 충분할 건데?”

“그럼 인수해 가세요.”

난 별 감흥도 없이 말했다.

원하면 가져가든가. 대신 정확하게 정가를 받을 생각이다.

“……인수?”

과다니니의 가격을 가늠하는 듯 눈가를 찡그리던 막심 선배는 곧 그런 계산을 아무리 해봤자 의미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선배 실력 정도 되면 유명 재단에서 고급 바이올린을 대여받는 것 정도는 쉽게 할 수 있겠지.

그러니 난 저 바이올린은 아나톨리에게 넘기기로 정했다.

용기있게 각오를 밝힌 아나톨리를 위해, 나 역시 흔들리지 않고 답해주었다.

“물론 조만간 아나톨리는 그 바이올린을 온전히 자기 거라고 누구에게나 말하실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언젠가 아나톨리도 다른 유명 재단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그땐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저걸 넘길지도 모른다.

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아나톨리의 자유다.

“…….”

아나톨리는 잠시 날 가만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난 가볍게 미소를 보냈다.

그런데 뜬금없게도 옆에 있던 리디아가 감탄사를 흘리며 박수까지 쳤다.

“와…… 막심이 꼼짝도 못 하는 거 처음 보는 기분인데…….”

“……그런가요?”

뒤늦게 약간 부끄러워져서 어물거렸더니 리디아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두서없이 떠드는 와중, 막심 선배는 이 분위기를 음악으로 정리해버리겠다는 듯 활을 들어올렸다.

튜닝은 딱 한 번 현을 긋는 것으로 충분했다.

순식간에 음들의 균형을 맞춘 막심 선배는 이번엔 제대로 자세를 잡고는 강하게 현을 그었다.

“무슨 곡이지……?”

“프리츠 크라이슬러예요.”

리디아의 속삭임에 내가 답했다. 그녀는 내가 답할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난 바이올린 독주곡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중 지금 연주되는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레치타티보reccitativo와 스케르초 op.6은 꽤 자주 연주되는 곡이라서 익숙하기도 했다.

막심 선배의 연주는 그야말로 차원을 달리하는 음량과 음색을 폭발적으로 뿜어내는 연주였다.

홀도 아닌 이 좁은 공간이 확 넓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역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답다는 찬사가 절로 나온다.

“와우.”

“브라보.”

라단조에서 바장조로 넘어가는 도합 4분가량의 짧은 곡을 화려하게 연주하니 나니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막심 선배는 경쾌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보내더니, 다시 바이올린을 어깨에 멨다.

그다음 연주된 건 처음 듣는 곡이었다. 빠르고 산뜻한 느낌이 인상적이었는데, 기억을 아무리 돌이켜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

하지만 이번엔 리디아가 아는 곡인 듯했다.

벌떡 일어난 그녀는 불안한 걸음으로 제자리에서 배회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상행동을 보이는 그녀를 보다가, 난 어찌된 일인지 바로 파악하고는 웃고 말았다.

막심 선배는 리디아가 작곡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가로서 두 사람이 교류했던 일부분을 엿듣는 기분이었다. 난 조금 더 귀를 쫑긋 세우고는 집중해서 연주를 감상했다.

리디아의 곡을 연주하는 선배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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