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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64화 (964/1,277)

##  964화

연주가 끝나자마자 리디아는 바로 막심 선배에게 달려가선 어깨를 마구 때렸다.

“내가 그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말랬잖아!”

“왜? 뭐 어때서? 좋은데.”

“아무튼 싫다고!”

두 사람은 금방 투닥거렸지만 누가 보더라도 정말 싫어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옆에 다가가선 잔뜩 칭찬해주었다.

“리디아가 작곡한 거였어요?”

“와, 전혀 상상도 못 했는데. 난 외젠 이자이인 줄 알았어.”

“…….”

이자이라는 이름까지 나오자 리디아는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그 아래에선 역시 기분 좋은지 미소가 얼핏 보였다.

그 와중에 막심 선배는 거보라며 그 옆에서 까불거렸다.

다들 평가가 좋으니까 이제 마음대로 연주해도 되지 않냐며 자꾸 리디아를 건드리다가, 결국 발로 정강이를 차이고는 깽깽이걸음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정말 딱 한 발자국만 덜 나가면 멋있는 사람인데, 왜 철없이 저러나 모르겠다.

그 부분이 리디아의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강이가 부러져서 못 서겠다며 엄살을 부리던 막심 선배는 옆의 의자에 앉아선 바이올린을 다시 살펴보다가, 아나톨리에게 넘겨주었다.

“역시 끝내주네.”

“최고였어요.”

아나톨리는 감격한 표정이었다.

훌륭한 연주라면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지만, 자신이 쓰던 바이올린이 이 정도 되는 소리를 낼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한 표정이다.

난 이번 연주가 아나톨리에게 정말 큰 도약의 발판이 되리라 생각했다.

인간은 목적이 모호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보단 확실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후에 더더욱 빠르고 강하게 나아갈 수 있다.

오늘 막심 선배가 들려준 소리는 계속해서 아나톨리의 뇌리에 남아있을 테고, 분명히 내는 것이 가능한 소리라는 것을 지속해서 일깨워줄 테지.

그것을 알고 믿는다는 건 정말 굉장한 힘이 된다.

이런 한 번의 순간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나는 마음속으로 막심 선배에게 감사했다.

선배 입장에선 어쩌다 보니 바이올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서 연주해본 것뿐이겠지만,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이렇게 연주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막심 선배는 킬킬거리며 웃더니 아나톨리에게 말했다.

“최고의 악기를 다룰 땐 연주자 역시 최고여야 하니까. 힘 좀 써 봤지.”

“그…… 많이 배웠습니다.”

“배워? 뭘?”

“어…….”

막심의 반문에 아나톨리는 말문이 막혔는지 버벅거렸다.

그냥 방금 연주를 듣고 얻게 된 여러 심상이나 그 수준에 대한 가늠 등을 배움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막심이 예리하게 찌르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나 싶어 노려보고 있는데, 막심 선배가 시원스레 말했다.

“배우는 건 지금부터 해. 내가 특별히 조금 가르쳐줄 테니까.”

“……예!?”

“타티아나가 눈여겨본 재목이라면 나도 신경 쓸 이유가 있지. 저 애가 보는 눈은 좋은 편이거든.”

지금 말은 간이 마스터클래스를 해주겠단 뜻이었다. 막심 선배 정도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실력이 된다.

이번에도 장난이나 치려는 건가 싶었는데, 생각 외로 아나톨리를 제대로 봐주려 하고 있었다.

당황하던 아나톨리가 얼른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는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 시작해 봐.”

“그럼 뭘…….”

“묻지 말고. 이럴 땐 그냥 무조건 가장 자신 있는 것부터 하는 거야. 3초 만에 튀어나와야지. 자, 하나 둘 셋.”

“어어.”

아나톨리는 허둥지둥하다가 간신히 연주를 시작했고, 막심 선배는 다리를 꼬고 앉아선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자세를 보면서 난 묘한 낯익음을 느꼈다.

‘교수님 보고 배운 건가……?’

방금 하던 말들이나, 지금 행동들은 전부 딱 음악원 교수님들이나 할 법한 것들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당한 게 있다 보니 그대로 배워선 써먹나 본데…… 그게 유치하기도 하면서 조금 웃기기도 해서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막심 선배가 아나톨리를 매섭게 가르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중, 일하러 갔었던 에르네스트가 돌아왔다.

한 손만으로 뭔가 나르고 세팅하려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귀찮아하기보단 되레 움직여서 더더욱 기분 좋아 보였다.

“계속 혼자 있었어? 타티아나.”

“아, 아니에요.”

난 고개를 저으며 저편에 있는 리디아 쪽을 바라보았다.

“리디아와 이야기했었어요.”

“그래?”

에르네스트는 그 이상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내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그 뒤로 묻는 건 없었지만 난 왠지 모르게 무언가 말해야 할 것 같단 기분을 느꼈다.

물론 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는 걸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음, 초대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또 들었네요.”

“아까 막심도 그러던데. 네가 초대해줄 줄은 몰랐다고.”

일하러 간 사람들 사이에서도 여러 대화가 오갔나 보다.

에르네스트는 잠깐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잘 했다고 생각해.”

“후후, 그런가요?”

“난 네가 정말로 기뻐하면서 그렇게 한다는 걸 아니까.”

단순히 아는 사람을 봤으니 반사적으로, 혹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난 정말로 선배를 보고는 이 샤슬릭 파티가 더 떠들썩해졌으면 좋겠단 마음을 가지고 초대했다.

에르네스트는 산 위에서 내가 물었을 때도 뭐가 문제냐는 듯 가볍게 내 마음에 모든 걸 맡겼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역시 그는 날 이해하고 있었다.

음료수 잔을 자기 앞으로 당겨놓은 에르네스트는 이어서 먹다가 놓고 간 샤슬릭도 찾더니, 곧 그것이 만갈 위에 있는 걸 찾아내었다.

“안 식게 해줬네. 고마워.”

“별말씀을요.”

다시 샤슬릭을 먹기 시작하는 그를 보면서 난 아까 리디아와 했었던 이야기를 되새겨보기도 했다.

약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를 기분이어서, 나도 그냥 고기를 입에 무는 것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샤슬릭 파티는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다들 배를 어느 정도 채우고 나니 슬슬 엔터테인먼트적인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될 것이란 걸 정확하게 예상한 루슬란 오빠가 미리 프로젝터를 설치해 둔 덕분에 우린 영상 등을 틀어놓고 보며 웃기도 했고, 음악을 틀고는 간단한 퀴즈 쇼를 하기도 했다.

당연히 이전에 즐겼던 보드게임들도 테이블 위로 올라왔고, 오빠는 거기에 벌칙을 추가했다.

“막심, 이거 마셔본 적 있어? 소태차라고 하는데.”

“소태? 뭐야 그게?”

“우린 게임에 따라붙는 벌칙으로 정해져 있거든. 이거 한 잔씩 마시는 게.”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정해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오빠는 어제 소태차에 크게 당하고 나선 약간 한이 서린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오빠도 유치한 면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이나 다름없는 내가 협조하지 않을 순 없었다.

지금만 해도 당장 이쪽으로 오라는 듯 눈을 부라리고 있고…… 어쩔 수 없이 난 오빠 쪽 테이블로 가서 게임에 참가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처음 벌칙에 당하게 된 건 루슬란 오빠였다.

“이게 말이 돼?”

카드를 탕 하고 내려놓으며 오빠가 소리치자 신이 난 아나스타샤와 리처드가 오빠를 놀리기 시작했다.

“말이 되네요.”

“이게 다 마음을 나쁘게 먹으니까…….”

“너희 둘 다 조용히 안 해?”

아무리 으르렁거려봤자 하나도 안 무서웠다.

막심 선배와 리디아는 대체 뭐가 어찌 돌아가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오빠에게 벌칙 수행을 시키는 데엔 이견이 없었기에 얼른 마시길 촉구했다.

그다음부턴 정말 지옥의 소태차 룰렛이 이어졌다.

“……나 아무 맛도 못 느끼겠어.”

“고기들이 배 속에서 이 차랑 만나서 다 분해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야.”

“그 정도면 네가 통째로 분해되어야지.”

1시간도 넘게 여러 게임을 돌아가며 하다 보니 이미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어제 걸리지 않았던 에르네스트나 리처드, 류보비, 아나톨리도 빠짐없이 오늘은 소태차를 마시고 말았다.

다들 반응은 비슷했다. 초콜릿이나 사탕으로도 잘 사라지지 않는 강렬한 쓴맛에 온몸을 뒤트는 것이다.

막심 선배는 이거 정말 마시는 거 맞냐고 몇 번이나 물었고, 리디아는 거의 울기 직전까지 갔다.

원래 쓴것을 잘 못 먹는다고 하는데, 뭔가 억지로 먹인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리고 제일 문제는 그 와중에 나 혼자만 한 번도 마시지 않았단 점이었다.

“타티아나…….”

“예……?”

“넌 정말 운이 좋구나…….”

리처드가 중얼거리며 날 바라보았다. 이미 그가 내 편이 아니라는 건 명백했다.

심지어 믿었던 아나톨리나 류보비도 비슷한 눈빛이었다.

에르네스트만이 조금 무덤덤한 표정이다. 하지만 내 편을 들어주거나 하진 않았다. 그럴 상황이나 분위기도 아니었고.

이해는 한다. 하지만 약간 서글펐다.

게임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지만, 무시무시한 강압이 내 쪽으로 향했다. 어쩔 수 없이 난 자진해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저도 조금 마셔볼게요. 그럼 되는 거죠?”

“그래…… 의식을 치르렴…….”

“…….”

이 사람들 눈이 너무 무서웠다.

물론 죽어도 마시기 싫다는 건 아니다. 어차피 내가 마시는 건 어제 각오하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런 상황을 정면돌파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따라줄게.”

이렇게 된 이상 손수 끝장내주겠단 건가요?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아도 에르네스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공사 구분에 있어서 철두철미한 그 성격이 두드러진다.

난 한숨을 내쉬며 그냥 한 잔 마시고 끝내기로 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내 쪽으로 잔을 내어 주는 순간이었다.

‘어?’

에르네스트는 마치 마술처럼 테이블 위의 찻잔을 다른 것으로 바꿔 주었다.

그 순간은 손등으로 가리고 있어서 정면에 있던 나만 볼 수 있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자 에르네스트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무 말 말고 마시란 의미였다.

방금 그건 어떻게 한 거지? 얼떨떨한 기분으로 난 찻잔을 받아 마셨다. 내용물은 그냥 물이었다.

모두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 반응에만 관심이 쏠려있다 보니 잔이 어떻게 되었는지 같은 건 전혀 들키지 않았다.

“어때? 타티아나.”

“…….”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난 어물거리다가 겨우 한 마디 뱉었다.

“쓰네요.”

“……그게 다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생각보다 터프하네 타티아나……. 우리가 보고 있으니까 일부러 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 봐…….”

리디아가 박수까지 치며 감탄했다. 난 양심이 쿡쿡 쑤시는 기분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사실이 들키면 내가 문제가 아니라 에르네스트가 모든 벌칙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니.

기껏 도와준 그를 바보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벌을 받게 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가만히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난 지금 에르네스트에게 그리 고마움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냥 공평하게 한 잔 마시고 끝내고 될 일이었다.

때문에 모두가 내 반응이 재미없다는 듯 다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켰을 때, 난 에르네스트의 어깨를 쿡쿡 찔러 불렀다.

“에르네스트.”

“응.”

“왜 그러셨나요? 공평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날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넌 벌칙에 걸리지 않았으니 안 마시는 게 공평한 거지. 외압에 떠밀려서 억지로 마시거나 할 필요는 없어.”

“…….”

할 말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에르네스트가 속임수로 날 벗어나게 해준 것도, 이 상황에서 나서서 바른 소리를 하면 서로 곤란하게 될 테니 적당히 타협해준 것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항상 나만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아랑곳하지 않는 정당함에서 난 늘 많은 도움을 얻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하던 게임들도 모두 마치고 나니 시간이 굉장히 늦어 버렸다. 밤이 깊자 날씨도 쌀쌀해졌다.

우린 슬슬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 안쪽으로 들여놔야 하는 것들 말고는 이 옆에다가 쌓아놔. 어차피 지금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루슬란 오빠가 앞장서서 진두지휘하기 시작했고, 우린 그 지시에 맞춰서 하나씩 물건들이나 쓰레기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청소가 대충 마무리될 무렵, 오빠는 막심 선배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그래도 괜찮겠어?”

“남는 방 많으니까…… 너랑 리디아만 괜찮다면 마음대로 해도 돼.”

오빠는 쿨하게 말했고 막심 선배도 그렇다면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선배의 등 뒤에서 리디아가 매달리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루슬란, 폐 많이 안 끼칠게! 우리는 방 한 칸만 빌려줘도 되니까!”

그 말을 듣고 난 물론이고 모두가 리디아와 막심 선배 쪽을 돌아봤다.

물론 두 사람은 연인 사이니까 시내에서 호텔에 묵을 때도 한곳에 묵었을 테고…… 따로 방을 쓰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 리디아의 말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는데도 뭔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 느낌이 들었다.

리디아도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뒷말을 덧붙이려고 했다.

“걱정 마. 이상한 짓 안 할…….”

“리디아. 조용히 좀 해.”

막심 선배가 아예 리디아의 입을 막으며 뒤로 끌어냈다.

오빠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까 리디아와 대화하면서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던 나는 그녀가 정말 선배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기분이라 웃으며 바라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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