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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66화 (966/1,277)

##  966화

겨울이 되면 눈이 오지 않는 날보다 오는 날이 더 많은 곳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소치는 눈이 많이 오는 곳이었다.

그 사실을 여행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증명하겠다는 듯,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카페에 홀로 앉아, 난 조용히 찻잔을 기울였다.

눈은 숲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평소 눈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분위기도 좋고 예쁘긴 하다.

“…….”

지난 며칠간 날씨가 계속 좋았던 건 정말 행운이었다.

만약 이 정도의 눈이 계속 내리는 시즌이었다면 우린 헬리콥터 투어 같은 것은 고사하고 시내에도 나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휴양을 목적으로 했지만, 그 외에도 소치의 이모저모를 잘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아서 만족스럽다.

다른 아이들도 만족스러웠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후…….”

남은 차를 다 마셔버린 난 기지개를 켰다. 슬슬 일어나는 사람이 없으려나 싶어 복도 저쪽을 목을 빼고 바라봤다.

전날 늦게까지 놀다가 잠자리에 들었고, 또 여행 마지막 날이고 오후가 되어서야 돌아가기로 정했으니 다들 늦잠을 잔다고 해도 상관없긴 하다.

하지만 혼자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건 조금 심심하다.

원래 혼자서도 잘 노는 타입이긴 하지만 그건 피아노가 있을 때였다.

지금은 게다가 바로 위에 다른 친구들이 있다 생각하니 어쩐지 마냥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스마트폰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산만하게 앉아 있는데, 막 카페로 한 명이 하품을 하며 들어섰다.

“흐암…….”

티셔츠와 청바지, 거기에 숄을 걸친 조금 기이한 패션으로 나타난 건 발렌티나였다.

하지만 그것도 어쩐지 잘 어울린다는 기분이 드는 건 내가 이미 그녀에게 너무 익숙해진 덕분일까.

발렌티나 역시 날 발견하고는 손을 살랑 흔들어온다.

“잘 잤어? 타티아나.”

“좋은 아침이에요.”

자연스레 그녀는 내 옆의 소파에 앉았다.

웨이터가 다가와서 빠르게 주문할 것이 있는지 묻자 그녀는 카페오레를 한 잔 부탁하고는 소파 뒤로 축 늘어졌다.

커피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못 견디겠단 표정이다. 카페인 의존도가 벌써부터 이렇게 높으면 안 되는데.

조금 걱정이었지만, 매일 이렇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발렌티나는 그저 좋아하는 카페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뒤로 늘어져 있던 발렌티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보고만 있냐고 묻는 눈치다. 그녀는 침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예상대로의 반응에 웃으며 가볍게 간밤의 안부부터 물었다.

“잠자리는 어떠셨나요?”

“좋았지. 아…… 침대만 가지고 가고 싶더라. 너무 편해.”

“후후, 가지고 가세요.”

“여기서 모스크바까지 배송비가 더 들 것 같은데?”

그러더니 발렌티나는 진지하게 침대를 분해해서 트럭으로 직접 실어 나르면 어떨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길래 난 대략 1,600km쯤 된다고 답했고, 그녀는 시속 160km로 달리면 10시간이면 되겠다며 간단한 산수 끝에 침대 배송을 적당히 할 만한 일로 치부했다.

두서없이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들은 그 내용과 깊이에 별 의미가 없었다. 단지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발렌티나는 시속 160km로 달리는 트럭을 상상하는지 깔깔거리며 웃다가 갑자기 창밖을 보고는 현실감각을 확 느낀 표정이었다.

저렇게 눈이 오는데 트럭을 그 속도로 몰면 1시간도 못 가 뉴스에 날 확률이 높다.

멍하니 창밖을 보던 발렌티나는 곧 카페오레가 나오자 그것을 한 모금 머금고는 조금 총기가 돌아온 눈빛으로 다시 날 돌아보았다.

“다른 애들은?”

“모르겠어요. 아직 주무시고 계시겠죠?”

“일어나서도 방에서 뒹굴거리는 녀석들 있을 거야.”

“아, 그런 걸까요?”

“응. 내가 그랬거든.”

“…….”

너무나 당연하지 않냔 투로 그렇게 말하며 발렌티나는 다시 잔을 입에 대었다.

커피만 마셔도 너무 행복하단 표정으로 나와 이야기를 하던 그녀는 잔을 다 비우고 나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가자.”

“예? 어디로요?”

“아나스타샤 괴롭히러.”

그것이 마치 정언명령이라도 되는 듯 발렌티나는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단박에 아나스타샤의 방까지 향한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발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타티아나, 마스터키.”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요.”

“어? 왜 없어? 네가 주인이잖아.”

발렌티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펄쩍 뛰더니 그럼 가지고 올 순 없냐며 재차 캐물었다.

이곳의 책임자라 할 수 있는 베니아민이라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 엉성한 작전은 시작부터 틀어져버렸다. 발렌티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서더니 갑자기 내 머리를 양손으로 탁 하고 잡았다.

“!?”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니 그녀는 진지하게 내 머리와 어깨 등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헤어핀이나 브로치핀 같은 것 없니?”

“……그걸로 문을 열어보시려고요?”

발렌티나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게 아닐까 싶다.

대충 핀을 열쇠구멍에 넣고 돌리면 열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렇게 쉽다면 애초에 열쇠란 게 있을 이유가 없다.

난 상식적으로 그게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적당한 핀도 없었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발렌티나가 답답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빨리 방법 좀 생각해 봐, 타티아나!”

“노크를 하면 어떨까요?”

“그런 상식적이고 고상한 방법 말고!”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방문이 엄청난 기세로 벌컥 열렸다.

바로 옆에 있던 발렌티나는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졌다. 난 그 비명소리에 놀라서 움찔했다.

“뭐 하니?”

문고리를 잡고 있는 아나스타샤가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쓰러져서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발렌티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는지 다시 일어서려 했으나 도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 놀라버린 것 같다.

아직 잠옷 차림인 아나스타샤는 쪼그려 앉아 발렌티나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다음엔 가까이 오기 전에 준비를 해서 오지 그러니? 문 앞에서 떠드니까 모른 척을 해주려 해도 할 수가 없잖니.”

“큭…….”

분하다는 듯 발렌티나가 이를 갈았으나 아나스타샤는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일어나선 문손잡이를 좌우로 돌렸다.

“그리고 문 안 잠겨 있었어.”

“뭐!?”

“예!?”

발렌티나는 열린 문 앞에서 헛수고를 했단 생각에 경악했고, 난 그녀가 문을 잠그지 않고 잤단 말에 경악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내 방에 들어오려고 할 만한 사람이 너희 둘 말고 또 누가 있겠니? 그러니 그냥 열어뒀지.”

그럼 애초에 발렌티나가 이렇게 행동할 거란 걸 예상한 걸까……? 아니면 내가 무언가 장난을 칠 거라고?

하지만 그걸 예상했다고 해서 문을 열어두는 건 조금 이상하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다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돌아서 들어갔다.

“다른 애들도 깨울 거니?”

“어…… 아뇨. 그냥 아나스타샤만…… 발렌티나가…….”

“타티아나! 지금 그렇게 배신하는 거야!?”

발렌티나가 억울하다는 듯 날 바라보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키득거리더니 고개만 돌려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옷만 좀 바로 갈아입고 나갈게. 잠깐만 있어.”

“들어갈래.”

“안 돼.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발렌티나의 요청을 딱 자르며 아나스타샤는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복도에 남겨진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다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

카페에서 다시 시간을 보낸 지도 1시간이 넘었다.

그사이 일어난 친구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카페로 모여들었다.

응접실 쪽은 너무 춥고, 뭔가 마실 것도 없으니 가장 적당한 곳이 여기이긴 했다.

다들 따뜻한 마실 것은 손에 들고는 서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기도 했다.

막심 선배는 느긋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이더니 스키광다운 이야기를 했다.

“눈 오네. 적당히 오다가 그치면 오늘 스키 타기 좋겠는데.”

“그러네요. 음…… 리처드, 혹시 스키 타러 갈 건가요?”

전에 헬리콥터에서 돌아올 때 리처드는 아무래도 한 번쯤은 스키를 타고 싶단 의사를 보였었다.

난 안전하게만 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옆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리처드는 나와 막심 선배를 번갈아 보더니 흠 하고 침음을 삼켰다.

“그럴까 했었는데, 데이트를 방해하고 싶진 않아서.”

“난 괜찮은데.”

“나도 괜찮아! 리처드, 같이 스키 타자.”

선배와 리디아는 한 번의 고민도 없이 리처드에게 제안했다.

두 사람은 데이트도 데이트이지만 정말로 스키를 좋아해서 같이 스키를 탈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환영인 것 같았다.

리처드는 약간 당황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런 환영을 받고도 이제 와 고개를 저을 수는 없는지 조금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조금 일찍 출발해서 스키를 타다가, 시간에 맞춰 소치 국제공항까지 오면 된다.

어차피 스키를 탈 크라스나야 폴랴나에서 공항까진 거리가 멀지 않으니까 그렇게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어 보였다.

난 리처드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살짝 물어보았다. 마지막 날이니까 소치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얼마든지 하게 해주고 싶다.

“기념품 사갈 수 있을까요?”

마침 아나톨리가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먼 곳까지 여행을 온 김에 선물도 사가면 분명 좋겠지. 새해이기도 하고.

그럼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시내의 로컬 마켓이나 백화점도 둘러보자고 말하자 자연스레 우리 쪽으로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 다가왔다.

기념품을 고민하고 있었던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인원이 또 너무 많아져서 이번에도 두 팀으로 나눠야 할 상황이었다.

이미 스키에 정신이 팔린 리처드를 빼고, 난 다른 세 사람을 찾았다. 에르네스트도 아나톨리, 류보비가 필요했다.

“저기…… 에르네스트는?”

“글쎄요? 못 봤어요.”

“설마 자고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신경이 조금 쓰였는데…… 에르네스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했던 아이들도 전혀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자고 있다면 가서 깨워야겠지. 하지만 아까 발렌티나가 했던 것처럼 문 앞에서 부스럭거리고 있는 건 정말 우스운 경우였다.

그렇다고 해서 베니아민에게 마스터키를 빌려서 갈 수도 없었고…….

그런 생각을 하던 난 그냥 상식적으로 노크를 하면 되는데, 발렌티나에게 너무 물들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아, 아…….”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르네스트의 방을 내 멋대로 열고 들어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난 다시 마음을 차분하게 먹으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전화로 모닝콜을 해주는 것 정도는 괜찮을 테니까.

“…….”

잠깐 양해를 구하고 구석으로 나와 에르네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예 신호도 가지 않고 스마트폰이 꺼져 있다는 ARS만이 돌아왔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잘 때 스마트폰을 끌 이유가 있나?

보통은 알람도 스마트폰으로 하고, 잘 때 충전을 해놓기 때문에 이렇게 전원이 꺼질 일은 없었다.

갑자기 불안한 예감이 들어서 난 곧장 카페를 나섰다.

그대로 나도 모르게 에르네스트의 방으로 향하던 도중, 난 어떠한 직감을 느끼고는 목적지를 바꾸었다.

그가 일어나서 스마트폰을 꺼놓을 상황이라면 당장 생각나는 건 하나뿐이었다.

“아, 타티아나 님.”

“안녕하세요.”

온천을 관리하는 타이시야가 날 보고는 인사해왔다. 난 짧게 그 인사를 받고는 곧장 물었다.

“혹시 안에 누구 있나요?”

“아, 온천욕 하시려고요? 그게…… 지금 안에 친구분이 들어가 계셔서……. 조금 나중에 하시면 어떨까요?”

그 말에 난 철렁했던 가슴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역시 아침부터 온천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내가 걱정할 것 없이 그가 알아서 잘 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론 확인하고 싶단 기분이 들었다.

“온천은 나중에 할게요. 그냥…… 이야기만 해도 될까요?”

“이야기요? 들어가셔서요?”

“아니요…… 그, 밖에 서서요…….”

깜짝 놀란 눈을 하는 그녀를 보니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현실감이 든다.

지금이라도 말을 무르고 도망칠까 싶다.

그리고 당황스러워하는 타이시야의 반응을 보면 아마 적당히 날 말려줄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곧장 그걸 받아채서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시선을 왔다 갔다 하던 그녀는 결국 그렇게 하라며 날 안으로 안내했다.

남이 말려주길 바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난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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