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7화
에르네스트는 탕 안에 몸을 더 깊게 집어넣었다.
미지근한 온도와 이상한 냄새가 온몸을 휘감는다.
그냥 축 늘어져버리고 싶은 기분도 들었지만, 그는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해서 팔을 움직였다.
이 유황 온천에 몸을 담그는 건 치료의 목적이 가장 큰 까닭이었다.
처음엔 온천욕을 치료로 한다는 것도 어색하고 심지어 같이 들어온 사람과의 대화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젠 몇 번이나 하다 보니 많이 익숙해졌다.
에르네스트는 스트레칭을 하며 관절이 움직이는 감각을 되새겨갔고, 이것이 확실히 효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
창밖으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온천욕을 하면서 볼 수 있는 풍경치고는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했다.
순간적으로 직업병적인 생각이 들어 이 광경을 곡으로 쓴다면 어떨까 싶었지만, 그건 작곡가로서의 일이다.
에르네스트는 우선 피아니스트로서 치료에 전념하는 것이 지금 할 일임을 깨닫고는 조금 더 신경 써서 스트레칭에 임했다.
그렇게 주어진 20분에 충실하고 있을 때였다.
“으흠, 흠…….”
“……?”
밖에서 누군가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 소리면 바로 칸막이 너머 탈의실 부근이었다.
게다가 그 기침 소리만 들어도 에르네스트는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에르네스트는 하던 스트레칭도 멈추고 굳어버렸다.
묘한 정적이 온천에 내려앉았다.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침묵의 압력이 강해져갈 때 즈음,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기침 소리가 이어졌다.
“음! 콜록, 콜록.”
“타티아나?”
이번엔 괜히 내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사레가 들린 반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에르네스트가 먼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참 후에야 타티아나는 미처 다 정돈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정말 계셨네요. 에르네스트.”
“무슨 일이야? 불이라도 났어?”
“예?”
일부러 엉뚱한 소리를 하자 타티아나가 반문했다. 그러더니 비로소 진정했는지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전혀요.”
“그렇겠네.”
“당황스러운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놀랐잖아요.”
내가 더 놀랐는데.
에르네스트는 지금 저 너머에 타티아나가 있단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그녀의 반응도 이상했다. 평소 그녀였다면 안에 누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면 얼른 사과하고 바로 나가버렸을 터.
그런데 왜 굳이 헛기침까지 해 가면서 어색한 상황을 마주하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언가 급한 일이 있나 싶지만, 그 정도는 또 아닌 것 같고.
여러모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에르네스트는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음 이어질 목소리를 기다렸다.
타티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다들 카페에 모여 있는데 안 계시길래 어디 가셨나 했어요……. 아침 일찍 온천에 들어가셨네요?”
설마 찾아다닌 건가.
아침부터 얼굴도 안 비추고 폰도 꺼놨으니 찾아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침부터 온천에 들어가겠다고 그녀에게 보고하는 것도 굉장히 이상하다.
“의사가 아침 시간을 추천하더라고.”
에르네스트는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난감할 터인 타티아나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꿋꿋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효과는 느끼고 계세요?”
“응.”
“정말로요?”
“정말이야. 움직이는 거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신경통은 많이 좋아졌어.”
“신경통…….”
어떻게든 대화에 답하려면 증상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의 반응을 들으니 괜히 말했나 싶다.
지금까지 에르네스트는 되도록 타티아나 앞에선 이런 증상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많은 그녀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빠르게 에르네스트는 덧붙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통증보단 저림에 가깝다고 해야 하긴 한데…….”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타티아나는 이 이상 신경을 곤두세우면 그것이 곧 부담이 되리란 걸 자각했는지 나지막이 대답했다.
“도움이 되길 바라요.”
“되고 있어.”
간신히 할 수 있는 대화가 오고 가자 다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에르네스트는 목소리로 그 침묵을 쫓아내었다.
“아무튼…… 오늘로 이것도 마지막이네. 이런 곳에 데려와줘서 고마워. 요 며칠 정말로 좋았어.”
“전 그저…….”
타티아나는 별것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조용해졌다.
원래 있던 별장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타티아나가 처음 제안한 건 파티였고, 그걸 여행으로 바꾼 건 에르네스트였지만.
그는 그걸 후회하지 않았다. 당연히 타티아나 역시 그러리라 생각했고.
이내 타티아나는 웃음을 섞으며 짧게 대답했다.
“좋았다면 다행이에요.”
뭔가 대화가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 든다.
타티아나는 원래 잡담을 길게 하는 성격이 아니긴 했지만, 오늘은 조금 그 태도가 이상했다.
할 이야기가 없다면 지금 나가면 되고, 할 말이 있다면 그걸 하면 될 텐데.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이다.
그 어색함을 느끼며 에르네스트는 다시 필사적으로 다음 할 이야기를 떠올렸다.
날씨 이야기 같은 걸 하는 건 바보 같아 보일 뿐이다. 다른 평범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자꾸 에르네스트의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다.
혹시 온천욕을 하러 온 거라서 눈치를 보는 중이라면 지금 옆에 들어가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솔직히 그 정도는 상관없지 않나 싶었다. 온수 풀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으니까. 심지어 탕이 나누어져 있기까지 하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잠깐 하자마자 느닷없이 루슬란의 으르렁거리는 협박이 목을 죄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까불지 말란 소리가 어른거리며 들려온다.
“루슬란은…….”
“……?”
“아니야, 아무것도. 그…… 보니까 루슬란이 너에게 원한이 있던 것 같던데. 혹시 뭐라도 한 거야?”
자기도 모르게 이상하게 이야기를 시작한 에르네스트는 순간적인 기지로 말을 맺었다.
사실 궁금하긴 했다.
원래 루슬란은 타티아나에게 굉장히 잘 해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틀 전 오후부터 태도를 싹 달리하며 적대적으로 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캐물어볼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기회가 된 것 같아 살짝 물어보니, 타티아나는 잠시 멈칫하더니 간결하게 말했다.
“뭔가 했죠, 원한을 샀죠.”
“진짜 있었구나.”
“……궁금하신가요?”
칸막이 너머인데도 갑자기 눈앞으로 훅 다가오는 기분이 든다. 그녀의 목소리엔 묘한 열의가 담겨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일단 한발 물러섰다.
“궁금하긴 한데…… 너희 남매 이야기를 내가 들어도 되나 싶기도 하고.”
뻔한 이야기로 얼버무리자 타티아나는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결정한 듯 말했다.
“에르네스트라면 들어도 되긴 하는데, 정말 원하시면 나중에 알려줄게요.”
“나중에?”
“예. 지금은 좀…….”
그녀는 약간 곤란한지 말끝을 우물거렸다.
지금만큼 비밀 이야기 하기에 적당한 상황이 또 있나? 듣는 사람도 없고, 서로 얼굴을 보지도 않으니까 무슨 이야기를 해도 없던 일로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타티아나는 방어적인 태도였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그냥 괜찮나 싶었을 뿐이야. 말 안 해줘도 돼.”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이라 해야 하나…….”
최근 들어 타티아나가 뭔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듯한 느낌이 있긴 하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죄책감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되도록 그런 상황 자체를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마음까지 어떻게 할 순 없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을 되짚어 본 에르네스트는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로 최근이었나? 루슬란이 말한 작년 봄이란 시기가 뇌리에 맴돌았다.
혼자서 그런 생각을 잠시 떠올리고 있을 때, 순간 타티아나가 끼어들어서 그 생각을 흩트려놓았다.
“아, 그나저나. 할 말이 생각났어요.”
“응?”
“오전에 기념품 사러 나가려는데, 가시겠어요?”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어쩐지 바로 떠나지 않고 있나 싶었더니, 역시 본론이 있었던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비로소 조금 마음을 놓고 대답했다.
“안 그래도 이야기하려 했었어.”
“그런가요? 후후, 잘되었네요. 그럼 같이 가요.”
기분 좋은 제안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순진하게 속지 않았다.
“어차피 다들 같이 가는 거지?”
“다들? 아, 그렇죠. 하지만 인원이 너무 많으면 복잡하니까, 어제 했던 것처럼 두 팀으로 나누기로 했어요.”
아까 말하길 카페에 모두 모여 있었다고 했는데, 거기서 이미 다 이야기하고 결정이 나온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에르네스트는 웃으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너랑…… 아나톨리, 류보비, 리처드. 그리고 나?”
“리처드는 빠질 거예요.”
“빠져?”
“예, 아침부터 막심 선배와 스키를 타러 간다고 해서요.”
살다 보니 리처드가 마음에 들 때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럼 네 명이구나.”
“맞아요. 저희가 잘 챙겨야 해요.”
“그래, 그래야겠네.”
아나톨리도 류보비도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착한 애들이었다.
물론 타티아나는 그래도 두 아이에게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으나, 그럼 에르네스트는 그런 타티아나를 챙기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타티아나는 마지막 일정이 될 기념품 쇼핑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끝까지 듣고 나서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전할 이야기는 그게 전부지?”
“음…… 예.”
“일단 알았어. 나도 시간이 다 되어서. 이제 나가려고 하거든?”
“아, 아…… 알겠어요.”
지금까진 잘만 이야기했으면서 갑자기 뭔가 허둥거리는 기색으로 타티아나가 말하더니,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안 하실 거죠?”
“그게 뭔데……?”
목적어를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착각밖에 들지 않는다.
당황한 에르네스트가 되묻자 타티아나가 덧붙였다.
“때리는 거요.”
“……?”
몇 초가 흐른 뒤에야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말하는 것이 자작나무로 하는 마사지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
“안 할 거야.”
“그런가요…….”
여전히 뭔가 불안한 듯 타티아나가 말을 흐렸다.
얼마 전 루슬란이 한 짓을 보고 타티아나가 불같이 화를 내며 경어까지 내려놓았던 일이 떠올랐다.
멀리서 관조하며 걱정하는 것만으론 안 된다는 판단을 하자마자 그녀는 거리낄 것 없이 거리감을 확 좁혀왔었다.
물론 그 후로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때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안 될 생각이지만…….’
약간 장난을 쳐 보면 타티아나가 또 반말해 주지 않으려나.
물론 그건 그녀의 분노나 염려를 부추겨야만 가능할 테니 장난처럼 했다간 수습도 어렵게 되겠지만,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선을 넘을락말락 할 즈음이었다.
마치 그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기라도 한 듯, 지금 나와서 안 될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분 남았습니다. 에르네스트 님.”
“???”
온천 관리자 타이시야의 목소리에 기겁한 에르네스트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갑자기 냉탕에 집어넣어진 기분이었다.
스스로의 단순함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애초에 이 온천은 관리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다.
타티아나가 혼자서 몰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묘하게 머뭇거리던 태도는 정말로 뒤에서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곤란한 이야기 했었나?
에르네스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했던 말들을 빠르게 돌이켜보려 했지만, 이미 하얗게 되어버린 기억들은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