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8화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난 빠르게 온천을 빠져나왔다. 물에 들어갔던 것도 아닌데 머리가 뜨겁다.
차라리 그냥 마주하고 이야기를 했다면 지금보다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했더니 괜히 더 유난인 기분이었다.
이상한 이야기를 하진 않았지? 다시 나누었던 대화들을 되짚어보았다. 온천욕과…… 오늘 오전 일정. 그리고 루슬란 오빠에 대한 일.
내가 그 대신 복수를 해주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등 뒤에서 타이시야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온천 입구까지 걸어나온 나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타이시야는 날 배웅하려는지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멈춰서자 그녀도 멈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단지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내가 왜 멈춰서 돌아보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조금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루슬란 님은 좋은 분이시지요.”
“……?”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이내 그녀가 상황을 어렴풋이 알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빠가 한 일과 내가 한 일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에 대해.
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솔직히 우습다.
방금 에르네스트와 주고받은 대화엔 그 어디에도 이상한 부분이 없는데, 괜히 숨기려고 하는 것 자체가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다는 자수나 다름없다. 그렇게 보이긴 싫었다.
하지만 만약 이대로 타이시야가 오빠에게 보고라도 한다면 그 오빠가 에르네스트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오빠는 그걸 정당한 일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 같아서…… 되도록 그냥 모르게 하고 싶다.
그런데 그런 내 생각마저도 타이시야는 이미 전부 꿰뚫어 보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
“……그런 부탁을 드린 적은 없는데요.”
“원래 이곳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은 입이 무겁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들은 기억하지 않는 편이 이롭죠.”
결코 농담 같은 말이 아니었다.
이곳은 베르체노프의 별장이다.
내 친구들처럼 단순히 휴양을 위해 온 손님들도 있지만,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기 어려운 무거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초청된 손님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 손님들을 접대하면서 듣게 되는 이야기들은 그녀의 말마따나 감당하기 어려울 테지.
난 혹시나 싶어서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럼…… 방금 일도 전부 잊어주실 건가요?”
“글쎄요?”
“예?”
어안이 벙벙해져서 되묻자 타이시야는 장난이라도 치듯 친근하게 말했다.
“그러기엔 너무 아까워서요.”
“…….”
뭔가 놀림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달리 어떻게 되받아칠 말이 생각나진 않았다.
여기서 내가 그녀를 붙잡고 강압적으로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하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녀가 루슬란 오빠에게 그대로 보고하겠다고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그녀는 혼자서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되겠느냐며 내게 솔직하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었다.
기운이 쭉 빠져 어깨를 늘어뜨리자 타이시야는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난 그녀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카페로 돌아갔다.
***
한참이나 내리던 눈은 우리가 나갈 때쯤 되자 그쳤다.
일찍 나간 세 명이 스키를 타기에도 좋고, 우리가 쇼핑을 하며 돌아다니기에도 딱 좋은 날씨였다.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하얗게 눈이 내린 숲과 정원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 잠깐 사이를 못 참고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채신머리없이 한승우와 발렌티나도 끼어 있었다.
하지만 나도 손이 근질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근처 계단 난간에서 슬그머니 눈을 모아쥐고는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눈싸움을 하는 친구들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기습은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정말 무시무시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아나스타샤는 매번 내가 뭘 하려고 할 때마다 귀신처럼 알아차렸던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전처럼 어설프게 하지 않고 조금 더 은밀하게 그녀의 뒤로 접근했다.
거의 지척까지 다다랐지만 아나스타샤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성공의 순간이 왔음을 직감하며 내가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아나스타샤.”
“응?”
난데없이 저 앞쪽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고, 뒤에 있던 난 움찔하며 뻣뻣하게 굳었다.
난 저편의 에르네스트를 보며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제발 그러지 말란 표시였다. 하지만 그는 비정하게도 바로 밀고했다.
“뒤에 타티아나가 뭔가 하려는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가 곧바로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난 바보같게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손에 쥔 눈을 어디 던져버리지도 못하고 그냥 쥐고 있었다.
예리한 그녀의 눈이 내 상태를 파악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아나스타샤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오…… 뭘 할려고? 타티아나?”
“그게…….”
“그 눈뭉치를 혹시 내 등에 넣으려던 건 아니지?”
“아하하, 그…… 그럴 리가요.”
차라리 멀리서 던지고 도망갈걸.
뒤늦은 후회를 할 겨를도 없이 이미 아나스타샤는 내 코앞에 와 있었다. 손만 닿으면 잡힐 거리.
이미 기습이 들통난 시점에서 내게 승산은 없었다. 그냥 마음대로 하란 뜻으로 난 팔을 내렸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날 보고 깔깔거리며 웃더니 갑자기 휙 하고 내 옆으로 오며 어깨를 감았다.
차가운 무언가를 각오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따뜻한 숨결이 귓가에 닿는다.
“저기, 있잖아. 타티아나.”
“……예?”
“기습도 분명 정당하진 않지만, 난 밀고자를 더 혼내주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내게 탈출구를 제시하고 있었다. 난 고민하지 않고 곧장 받았다.
“당연히 밀고자가 제일 나쁘죠!”
“그렇지?”
“엄벌을 내려야 해요!”
“그래, 그래.”
살기 위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제일 나쁜 것도 사실이었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날 배신하다니. 원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저편의 에르네스트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들 봐줄 생각은 전혀 없다.
내 의사를 확인한 아나스타샤는 저쪽에서 여전히 눈싸움 중인 한승우를 불렀다.
“승우.”
“왜?”
돌아보는 사이 한승우는 등에 눈덩이를 맞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아이들과 놀아주는 건 정말로 그냥 놀아주는 것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에게 지시했다.
“가서 에르네스트 좀 잡아줄래?”
“왜?”
“지금 우리에게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거든. 그러니 너도 끼워줄게.”
그건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한승우에게도 충분한 메리트가 있는 일이었다.
그간 게임을 자주 하면서 묘하게 두 사람은 라이벌처럼 투닥이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물론 그 모든 건 마피아 게임에서 시작되었지만…… 아무튼 이제 우리 사이에선 그게 거의 자연스러운 일처럼 되어 있었다.
“어떠니?”
“좋지.”
한승우는 그 이상 제대로 이유를 묻지도 않고 그대로 에르네스트에게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거의 곰 같아서 멀리서 보던 내가 기겁할 정도였다.
다행히 한승우는 그대로 들이받거나 하지 않고 에르네스트의 뒤로 돌아가서 붙잡았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혹시나 걱정이 되었는지 팔에는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승우도 약간 우악스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섬세한 사람이었다.
“이거 놔. 야, 놓으라고.”
“아나스타샤가 놓으라고 하면 놓을게.”
“네가 언제부터 저 애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이거 놔라 진짜. 험한 꼴 보기 전에.”
“하하하하.”
에르네스트는 발버둥치지 않고 조용히 협박하기만 했지만 한승우는 웃기만 했다.
가끔 곤란하거나 모른 척해야 할 때면 나오는, 러시아어로 떠들어봤자 잘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저런 태도의 한승우에겐 말이 안 통한다.
결국 나와 아나스타샤가 다가갈 때까지 에르네스트는 그 자리에 붙잡혀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지 발렌티나와 아이들도 옆에 모여들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또 사고 쳤어?”
발렌티나가 궁금한지 물어보았고,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확 썼다. 이 상황이 엄청나게 창피한 모양이다.
그리고 밀고자를 법정에 세운 검사 아나스타샤가 구형했다.
“합당한 형벌은…… 당연히 눈으로 하는 게 좋겠지? 이 정도면 납득하리라 생각해. 에르네스트.”
“그냥 사형시키겠다고 해.”
“그건 나중에.”
“나중은 뭔데??”
어이가 없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말했으나 아나스타샤는 신경 쓰지 않고 허리를 굽히더니 눈을 뭉쳤다. 그리곤 내게 건넸다.
“자, 시작해.”
“……뭘요?”
“형을 집행해야지. 그걸로 나한테 하려고 했던 걸 그대로 해 줘.”
“예?”
당황한 내가 되물어도 아나스타샤는 뭐가 문제냔 태도였다. 애초에 내가 하려고 한 일이었으니 뭘 어떻게 할진 내가 안다.
그러니 그녀에게 하라고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녀 입장에선 기습하려던 내가 밀고자를 처리하는 게 가장 좋을 터였다.
아주 정확한 일처리 방식이었다.
난 어쩔 수 없이 눈을 쥐고 에르네스트와 마주 보고 섰다. 그는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울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렇게 보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방금 전까지 느끼고 있던 배신감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에르네스트…….”
“타티아나.”
에르네스트가 하지 말라고 한마디만 한다면 난 정말로 못 할 것 같았다. 다음으로 재판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작은 목소리로 한 말은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어젯밤…… 기억하지?”
“……무슨 말이에요?”
“내가 손 써 줬던 것…… 여기서 다 말해버릴 거야.”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고 있다가, 뒤늦게 생각해냈다.
어제 소태차 잔을 바꿔 주었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이가 없어진 난 그에게 쏘아붙였다.
“아니, 지금 협박하시는 거예요!?”
에르네스트는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듯 웃기만 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때 봐줬으니 이번엔 반대로 봐달라는 건가. 하지만 정말 협박인 걸까.
애초에 그걸 다시 밝히면 분노한 친구들이 다시 소태차를 따라선 내게만 줄까? 아마 주전자 채로 에르네스트에게 먹이려 할 테다. 그럼 본인만 손해잖아?
하지만 웃기는 건, 협박이 내게 먹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소태차를 주전자로 먹든 드럼통으로 먹든 내가 먹는 게 아닌데, 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지 모르겠다.
이를 갈며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 그가 무어라 말하려 했다. 난 그냥 눈뭉치를 그의 얼굴 중앙에 문질러버렸다.
“말하지 마세요.”
“…….”
얼굴이 하얗게 된 에르네스트는 멍하니 있더니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푸 하고 입가의 눈을 털어냈다.
그런데 주위가 조용했다. 그를 붙잡고 있는 한승우는 물론이고 옆의 발렌티나나 아나스타샤, 다른 아이들도 모두 경악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할 줄은…….”
“어라…….”
다들 재미있다는 듯 웃길 바랐는데, 뭔가 이건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과격했나보다.
한승우가 천천히 에르네스트를 풀어 주었고, 에르네스트는 그제야 얼굴을 툭툭 털었다.
미안한 듯 한승우가 그에게 씻으러 가자고 말하자 에르네스트는 두말없이 따랐다.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분위기가 이렇게 되어버려서야 이젠 에르네스트가 완전한 피해자였다.
그 어색한 분위기에서 아까 눈싸움을 하던 발렌티나와 아이들도 모두 나가기 전에 다시 씻고 오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아나스타샤와 단둘이 남았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우리도 씻으러 갈까?”
“그럴까요…….”
이제 에르네스트와 기념품 쇼핑도 가야 하는데…… 큰일 난 것 같다. 난 머리가 딱 아파오는 걸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