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9화
모두들 다시 말끔하게 씻고, 옷에 묻은 눈들을 털고는 다시 주차장 쪽으로 모였다.
여기도 눈은 많이 쌓여 있었지만 아까 신나게 한바탕 논데다가, 그 끝마무리가 충격적이어서 그런지 다들 적당히 점잖게 하고 있었다.
난 일단 뭐가 어찌 되었든 사과를 해야겠다 싶어 에르네스트에게 살짝 다가갔다.
“저기…… 에르네스트.”
“응.”
그런데 그는 전혀 화가 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친구들이 옆에서 보기엔 분명 충격적인 장면이었겠지만, 당사자인 에르네스트는 별 사감이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가 날 배신해서 이유를 제공한데다가, 나중엔 붙잡혀 있으면서도 협박을 해서 날 자극하기도 했으니 사실 난 억울했지만…… 그걸 그도 이해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가만 올려다보니 에르네스트는 또 뭔가 하기라도 할 거냐며 양팔을 약간 벌렸다.
마음대로 해보라는 것 같은데, 이런 걸 보니 뭔가 감정이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어쩐지 내게 심한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대체 날 건드려서 뭘 얻어내려는 건지 모르겠다.
“뭔가…… 원하는 것이라도 있나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는 주위를 슥 보더니 피식 웃기만 했다.
“원하는 게 있긴 한데, 지금은 아니고.”
“말씀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안 될 것 같아.”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입술을 삐죽이고 있자 에르네스트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낮게 웃으며 다시 삐딱하게 섰다.
아무래도 더 이상 뭘 물어도 소용없을 것 같다.
잠시 후 빅토르가 차량을 한 대 더 몰고 왔다.
아예 두 팀으로 움직이기로 했으니 차도 따로 타기로 했던 것이다.
“루슬란 님은 안 가십니까?”
“예,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고 해서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리처드가 빠진 것처럼 루슬란 오빠 역시 기념품은 우리끼리 사러 갔다 오라며 빠졌다. 때문에 우린 네 명씩 갈라지게 되었다.
“이따가 봐요. 네 분.”
“응.”
아나스타샤를 필두로 한 네 명이 차에 올라타는 걸 보고, 나도 남은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갈까요? 아나톨리, 류보비.”
“네.”
“진짜로 기대 중이에요!”
잔뜩 들뜬 두 명을 먼저 차에 태우고 그 뒤를 따라 나와 에르네스트도 탔다.
빅토르가 운전하는 차량은 금방 도로를 빠져나와선 소치 시내로 향했다.
그저께 시내를 돌아다녔을 땐 식물원이나 아쿠아리움 등의 볼거리를 중점으로 봤지만, 유명한 관광도시인 만큼 소치엔 대형 쇼핑몰들도 정말 많았다.
먼저 빅토르가 향한 곳은 시내 정중앙에 있는 모어몰moremoll이라는 쇼핑몰이었다.
“저번에 여기 지나오면서도 뭔가 했었는데, 쇼핑몰이었네요.”
3층짜리로, 그리 높진 않지만 옆으로 굉장히 넓은 건물이었다.
소치에서 가장 큰 쇼핑몰로, 물건을 파는 것은 물론이고 레스토랑이나 푸드코트, 영화관, 엔터테인먼트 시설도 갖추어진 곳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유리로 된 천장과 기다란 회랑 구조가 장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정중앙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앞으로 다가올 날을 미리 축하하고 있었다.
주변의 가게들도 형형색색으로 예쁘다. 모두들 크리스마스 특집 행사로 꾸며놓아서 온통 반짝였다.
너무 화려한 곳들이 많아서 그저 돌아다니면서 놀기만 해도 충분히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우리에겐 지금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뭐 사가실 거예요?”
“생각해둔 건 있는데…….”
소치는 러시아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라서 기온이 다르고 다양한 식물들이 자란다.
때문에 카프카스 지역의 향신료나 차 종류에 조금 관심이 있었다. 그런 건 위쪽에선 흔하게 구하기 어려울 테니까.
아니면 이 밑으로 연결되어있는 다른 문화권의 공예품 등도 있었다.
일단은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보고 싶었기에 우린 옷가게 등이 아니라 특별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 종류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네요.”
“쇼핑몰이라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아쿠아리움 등에선 이런 장식들을 못 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물고기들이 있는 한가운데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두면 그건 정말 이상한 광경일 테니까 말이다.
뭐든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보기에 좋은 법이다.
그리고 지금 잔뜩 펼쳐져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정말 예쁘게 보였다.
그렇게 우린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보았다. 아나톨리와 류보비는 가족들과 선생님에게 줄 선물 정도만 고른 듯했다.
에르네스트도 비슷한 것 같았지만, 난 그 외에도 챙길 사람이 많다 보니까 조금 더 신경이 쓰였다.
“향신료는 여기가 아니라 로컬 마켓에서 찾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누구 주려고?”
“드미트리 셰프요.”
“아.”
당연히 향신료 같은 걸 사서 아버지에게 드려봤자 별 의미가 없다.
내 머릿속엔 이미 누구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어렴풋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 신중하게 찾고 있는 중이고.
그런데 옆을 보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약간 이국적인 대나무 공예품을 몇 개 샀다. 활용성은 약간 떨어질지 몰라도 부담 가지 않고 괜찮은 선물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내 눈에 괜찮아 보이는 도자기 공예품을 몇 가지 샀다.
아마 터키의 양식이 약간 흘러들어오지 않았나 싶은데,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보기에 예쁘니 좋지 않나 싶다. 정 안 되면 내 방에 둬도 되고.
백화점을 어느 정도 돌아본 우리는 잠시 쉬었다가, 이번엔 로컬 마켓으로 나왔다.
“여기도 좋네요.”
“그러게. 난 아까 쇼핑몰보다 여기가 마음에 드는걸.”
눈이 내린 시내는 여전히 새하얗지만, 사람들의 열기가 닿는 곳들은 알록달록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 그리고 연휴에 함께 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두가 분주하게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활기가 내게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들어가서 볼까요? 에르네스트.”
“그러자.”
그리고 우린 그 열기 속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많아서 혹시라도 서로 떨어질까 싶어서 난 수시로 아나톨리와 류보비를 살폈고, 에르네스트 역시 부쩍 신경 쓰는 모습이 보였다.
날 도와서 철저하게 지키려는 모습이 느껴졌다. 그 태도는 조금 믿음직스러웠다.
난 원하던 향신료도 구매했고, 다른 모두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좋은 기념품들을 더 샀다.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이나 통조림은 몇 개나 더 사도 괜찮을 정도로 종류도 다양하고 특이했다.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활기차고, 친구들과 함께 이번 여행을 마무리 짓는 기념품 쇼핑도 즐겁다.
살짝 앞서 걷던 내가 뒤돌아보자 에르네스트가 눈을 마주하더니 웃었다. 그 역시 기분 좋아 보였다.
“타티아나, 저쪽.”
“?”
그런데 그가 무언가 발견했는지 내 옆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을 보니 새해를 맞이하여 복권을 판매하는 곳이 있었다.
올해의 운을 보기 위함인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운세나 점 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난 그런 것에 사실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모두가 한다면 따라서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가볼까요? 줄을 서야 할 것 같은데.”
“바로바로 파는 거니까 금방 빠질 거야.”
아나톨리와 류보비도 복권을 사보자며 흥미를 보였다. 어차피 소액으로 사는 거니까, 운세 대신의 의미가 크다.
그렇게 우리 네 명은 그 줄의 뒤쪽으로 가서 기다렸다.
앞을 보니 전화로 누군가에게 아무 숫자나 불러 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숫자들을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 광경에 자극받았는지 아나톨리와 류보비도 서로의 행운의 숫자를 두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난 7이야. 넌?”
“음…… 2, 3, 8…… 10? 아니다. 12로 할래.”
“뭐가 그렇게 많아.”
“많으면 안 돼?”
“그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것이 많은 류보비는 좋아하는 숫자도 많나 보다.
그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냐며 에르네스트에게도 동의를 구했다.
“오빠는요? 행운의 숫자 있어요?”
“있지. 2, 3…….”
“와!”
“5,7,11,13…….”
“진짜 많네요!?”
류보비는 에르네스트와 앞선 두 숫자가 겹치기도 하고, 많은 것이 같은 게 기쁜지 방방 뛰기까지 했다.
가만히 듣던 난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소수를 좋아하시나요……?”
“어떻게 알았어?”
“그 정도는 알죠.”
수학에 그리 강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낮은 자리의 소수 정도는 바로 인지할 수 있었다.
날 바라보던 에르네스트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소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한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아봐주었다는 것이 마음에 든 것 같다.
그가 기뻐한다면 나도 좋지만,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긴 또 약간 마뜩잖아서 난 아무 말 않고 딴청을 부렸다.
이따가 복권을 구매할 시점에, 그냥 무작위로 할 생각이었는데 방금 들은 숫자들은 몇 개 넣어볼까 싶긴 했다.
그렇게 줄을 서면서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복권 구매하십니까?”
갑자기 누가 말을 걸길래 깜짝 놀랐다. 옆을 보니 척 봐도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마이크를 앞세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을 비롯해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상황은 바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약간 어색하지만 그래도 유창한 러시아어로 마이크를 든 남자가 물었다.
“저희는 터키 ATV 방송국의 기자들입니다. 전 유수프라고 하고요. 러시아의 크리스마스 풍경을 취재하고 있는 중입니다.”
“취재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짧은 인터뷰 괜찮을까요?”
러시아 기자에게 음악가로서 인터뷰를 받는 일은 많았지만, 날 알아보지 못하는 다른 나라 사람에게 갑자기 길거리에서 이런 인터뷰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데 왜 나한테 말을 건 걸까?
옆을 살짝 보니 에르네스트는 이 상황이 신기하다는 듯 보면서도 결국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을 펼쳐 보였고, 아나톨리와 류보비는 방송국이란 말에 내 옆으로 달라붙으면서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수프가 물었다.
“나이와 이름 정도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타티아나…… 열일곱 살이에요.”
“옆의 분들도 모두 일행이십니까?”
“맞아요. 친구들이에요.”
이번엔 반대로 유수프가 신기하다는 듯 이어서 에르네스트의 이름도 물어보더니,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그들이 궁금해하는 건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예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같은 문화와 종교에 얽힌 이야기 등이었다.
터키는 기본적으로 이슬람 문화권이고, 예수는 선지자로서 존경받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어난 날을 크게 축하하진 않는다.
때문에 다른 곳에서 예수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것을 조금 색다른 문화로 바라보는 면이 있었다.
특히 정교회의 크리스마스는 1월 7일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보다도 늦는 편이고.
난 크리스트교뿐만이 아니라 이슬람교나 불교 등의 다른 여러 종교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기본적인 이해가 있었다.
“저희는 율리우스력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있답니다.”
유수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설명을 들었다.
그 뒤의 사람들도 뭔가 서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설마 길거리에서 무작위로 섭외한 내게 이런 설명을 들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유수프가 내게 질문했다.
“혹시 산타클로스의 고향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적당히 모른 척할까 싶었지만, 이건 답해줘야 할 것 같았다.
“터키 아닌가요?”
내 대답에 유수프와 그 뒤 모두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심지어 내 옆의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이쪽으로 집중됨을 느낀다.
우리는 제드 마로스라고 하지만, 세계적으로 산타클로스라고 한다면 약간 북유럽 쪽의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그 정확한 역사는 터키에 있다.
“성 니콜라스 주교가 산타클로스의 기원이라 알고 있어요.”
“정확합니다! 설마 정답을 맞히실 줄은 몰랐네요.”
하나도 기대하지 않고 물어보고, 내가 모른다고 고개를 저으면 설명해주려 했던 것 같다. 애초에 그런 인터뷰였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내가 원래 대본을 망쳐놓은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유수프는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박수까지 쳤다.
난 내친김에 그에게 물었다.
“상품은 없나요?”
“상품? 아, 아하하하!”
정말 쓰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웃어대던 유수프는 뒤로 돌더니 갑자기 가지고 있는 것 다 꺼내 보라며 소리쳤다.
난 그런 것까지 바라진 않았기에 약간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