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70화 (970/1,277)

##  970화

한 아름이나 되는 상품을 받은 타티아나는 그것을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류보비에게 주었다.

그 내용물들을 보니 대부분 터키의 사탕이나 과자 등이었다.

류보비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옆의 아나톨리를 툭툭 쳤다.

아나톨리는 왜 그러냐고 보다가 짐이 무겁다면 이리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으나,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옆에 있는 사람과 지금의 기분을 공유하고 싶을 뿐이었다.

“하하하하,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예, 맞아요.”

슬쩍 올려다보니 타티아나는 다시 터키 방송국에서 온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타티아나는 평소엔 나긋나긋한 성격에 어디 나서거나 주목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필요할 때면 피하거나 미루지 않고 직접 마주한다.

류보비는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의 타티아나를 좋아했다.

당황하지도 않고 딱 부러지는 태도로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앞으로 꼭 저렇게 되고 싶단 마음이 절로 들 정도였다.

‘저 아저씨들도 태도가 달라졌는데?’

인터뷰 관련한 이야기만 조금 나누었을 뿐인데 마이크를 들고 있는 기자의 거리는 어느새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타티아나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류보비는 그 사이를 가로막을까 싶다가도, 그럴 필요까진 없음을 느꼈다.

왜냐하면 바로 옆의 에르네스트가 말없이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저렇게 보고 있는데 멋대로 접근하진 않을 것이다.

“아차, 음…… 3시간 만에 처음 정답을 찾아내서 제가 조금 흥분했나 보군요.”

아니나 다를까, 기자는 눈치껏 슬쩍 물러났다.

류보비는 자기도 모르게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조금 더 확실하게 타티아나의 옆에 섰다.

슬슬 인터뷰도 막바지였다. 애초에 거리의 분위기 파악과 간단한 질문 정도가 목적이었던 만큼 더 타티아나를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던 것이다.

그런데 슬슬 기자가 마무리 멘트를 하려던 때, 옆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하나둘 섞여들어왔다.

“저거…….”

“맞지?”

복권을 사러 선 줄에 카메라와 기자들이 취재를 하고 있자 거기에 관심을 가진 몇 명이 이쪽을 보다가 타티아나를 알아본 듯했다.

게다가 그 옆엔 원래 유명한 에르네스트가 있기도 했고.

터키에서 온 기자들은 모르겠지만, 여기 두 사람은 이미 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꽤 있는 유명인들이다.

류보비는 그 사실에 대해 더 크게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 수군거림을 느끼고도 그리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피아니스트가 아닌 그저 친구들과 연휴를 즐기러 나온 사람이었고, 그걸로 만족하고 있었다.

이쯤 하면 되지 않았냐는 듯 타티아나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지만 기자는 이제 막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알아차린 상태였다.

눈치 빠르게도 그 모든 관심의 방향이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곧장 그는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내밀려 했다.

“…….”

그 기자를 보며 타티아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작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을 뿐이다.

작은 거절 표시였을 뿐인데, 겨우 그것만으로도 기자는 마이크를 내려버렸다.

뭔가 끈질기게 더 물어볼 것이라 예상했던 류보비는 기자의 담백한 포기에 살짝 힘이 빠지는 기분마저 느꼈다.

하지만 왜 기자가 바로 포기해버렸는진 이해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말을 앞세우지 않고도 사람들을 휘어잡고 설득할 줄 안다.

류보비는 앞으로 그녀처럼 되고 싶다고 바라면서도, 그 카리스마는 도무지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진짜 어른들도 꼼짝을 못 하네.’

심지어 기자 정도 되면 산전수전 다 겪어본 사람들일텐데도 타티아나에게 함부로 하지 못한단 사실에 류보비는 신기함을 느꼈다.

타티아나는 확실히 보통 사람과는 조금 다르다.

그런데 기자 역시 만만찮았다.

“음…… 그럼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고, 그나저나 두 분 잘 어울리시는군요.”

“……예?”

잠시 주저하던 기자가 지나가듯 꺼낸 말에 타티아나가 처음으로 당황했다.

빠르게 에르네스트 쪽을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휙 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 번도 흔들림 없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 그런 거 아닌데요.”

“그런 거라뇨?”

이 사람, 언니를 가지고 놀고 있잖아.

기자는 지금 타티아나가 단지 일반인이 아니라는 것도, 그리고 에르네스트과 가까운 관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자는 타티아나가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하니까 약간은 골려먹으려는 의도로 관계성 쪽을 쿡 찔러 본 것이다.

류보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의도가 훤하게 보이는 장난성 짙은 공격이었는데, 타티아나는 흡족할 만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자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웃었다. 타티아나는 약간 맥이 풀린 듯 미소를 지었다.

“…….”

이대로 가볍게 지나갈 일이었지만, 류보비는 살짝 화가 났다.

그 관계는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무신경하게 찔러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멋대로 말하지 말라고…….’

두 사람이 분명 가까운 사이인 건 맞지만 실제로 사귀거나 하는 건 아니었고, 또 에르네스트가 다치는 바람에 어쩐지 조금 더 복잡해지기까지 했다.

타티아나는 말 그대로 에르네스트의 일이라면 벌벌 떨고 있었다.

그건 어떻게 보더라도 그리 좋은 건 아니었다.

때문에 류보비는 가급적 다른 누가 대충 보이는 대로 말하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끼어들어서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귀중한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약간 답답한 마음으로 보고 있는 사이, 기자는 웃으며 감사를 표하고는 뒤편을 향해 손짓했다.

타티아나의 즐거운 시간을 더 이상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본 듯했다.

타티아나도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좋은 추억이 되었어요.”

“별말씀을.”

그렇게 깔끔하게 답한 기자는 뒤편의 사람들과 함께 다음 목표를 찾아 떠났다.

기자가 사라지고 나자 류보비는 답답했던 마음이 그래도 조금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리고 멋지게 인터뷰를 한 타티아나의 손을 붙잡고는 말했다.

“진짜진짜 멋졌어요!”

“아하하, 별 이야기도 없었는걸요…….”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지만, 다른 나라 방송국 기자들의 인터뷰에 아무 사전 준비 없이 이렇게 훌륭하게 답하는 건 절대로 쉽지 않다.

류보비는 싱글벙글 웃으며 더더욱 타티아나에게 달라붙었다.

아까 인터뷰 내용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타티아나는 문득 생각났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음악가가 아닌 입장으로 이런 인터뷰를 받는 건 처음이라 조금 놀랐네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저에게 온 걸까요.”

류보비는 거기에 답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는 어딘가 빛이 나는 것 같은 특별함이 있었다.

단순히 친한 관계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류보비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기자들도 빛을 찾아왔으리라.

타티아나는 피아노와 함께 있을 때 정말 그 특별함이 두드러지는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밖에 나와 있을 때도 확실히 눈에 띈다.

그 얼굴이나 태도, 여러 분위기가 존재감을 이루고 있는 듯했다.

새삼 타티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마침 전화가 걸려와서 타티아나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아, 잠시만요. 빅토르네요.”

양해를 구한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빅토르의 이름을 부르고는 몇 번쯤 긍정했다. 류보비는 그녀가 전화를 받는 모습마저도 좋아했다.

“그냥 두세요.”

짧은 전화는 타티아나의 허가로 끝났다.

빅토르와 한 전화니까 딱히 알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해져서 바라보니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까 그 인터뷰 방송에 나가도 되겠냐고 물어봐서요. 괜찮죠? 모두들.”

“인터뷰는 네가 다 했는걸.”

“그래도요.”

에르네스트는 멋진 인터뷰였다면서 재차 칭찬해주었고, 타티아나는 약간 부끄러운지 그만하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보고 있던 류보비는 한 가지 깨달았다.

타티아나가 그냥 두라고 하지 않았다면 빅토르가 아까 그 기자들에게 어떤 수를 써서 방송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그간 류보비는 왜 타티아나 같은 사람이 더 빨리 유명해지지 않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평소 쓸데없는 가십거리는 수없이 다루는 언론들도 타티아나, 그리고 에르네스트에 대해선 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SNS를 안 해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더라도 타티아나의 정보가 제한적으로 풀리고 있는 건 그만큼 억제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모르는 사람들이 멋대로 떠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류보비는 그 점이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티아나가 다른 사람들과 철저하게 벽을 두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저기……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줄을 끝까지 서서 복권을 사서 나오자마자 타티아나에게 몇 명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아마 줄을 서 있을 땐 방해가 될까 싶어서 기다렸다가 여유가 생긴 지금에야 말을 거는 것 같았다.

팬을 자처하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타티아나는 환하게 웃으며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사인도 사진도 전혀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티아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거의 다 에르네스트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살짝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류보비는 옆의 아나톨리를 툭 쳤다.

“왜.”

“그냥.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아나톨리는 듣자마자 인상부터 썼다.

“내가, 너랑? 왜?”

“……죽을래?”

솔직히 상처받아버린 류보비는 아나톨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아나톨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유명해지는 걸 목표로 삼으면 안 된다고 했어. 음악가로서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목표로 하는 지점에 다다르면 인기는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누가 그런 소리 듣고 싶대? 진짜 너 너무 싫어.”

“갑자기 뭔데…….”

서슬 퍼런 류보비의 반응에 약간 당황해서 움츠러든 아나톨리는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아무튼, 바랄 거면 저 이상을 바라야지.”

“이상?”

“아까 그 터키 사람들도 바로 알아보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그 말에 류보비는 뭔가 한 가지 배운 기분이 들었다.

아나톨리가 밝힌 포부는 지금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를 자연스럽게 뛰어넘고 있었다.

지금 보기에 저기 두 사람은 정말 어른처럼 보이지만…… 아직 그렇지 않다.

그러니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훨씬 더 높은 곳으로 갈 테고, 그걸 예상한다면 류보비와 아나톨리 역시 그 높은 곳을 목표로 겨냥해야 하는 것이다.

뒤만 졸졸 따르면 절대로 같은 위치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도 그렇네.”

류보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저기 있는 두 사람과 달리 류보비는 아나톨리를 그저 친구로 볼 뿐이지만, 그 실력만큼은 확실히 같은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도 굉장히 특출나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니 꼭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잘 되었으면 하는 응원의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류보비 역시 자극을 받아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면서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가 팬 서비스를 끝내길 기다리던 류보비는 이윽고 두 사람이 투닥거리면서 돌아오는 걸 보고는 의아해했다.

“제 머리에 장난을 치시면 어떡해요?”

“뭐 어때? 재미있잖아.”

“아, 정말…… 그분들에겐 중요한 추억이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더 특별하게 해준 거지.”

무슨 일인지 가만 들어보니, 팬과 함께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에르네스트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타티아나의 머리 뒤에 해서 뿔처럼 보이게 했다고 한다.

에르네스트가 무뚝뚝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장난을 잘 치는 성격도 아니라는 걸 아는 류보비는 그가 조금 변한 것 같다고 느꼈다.

“너도 아까 내 얼굴 눈범벅으로 만들었잖아.”

“…….”

그것도 주고받음이 있는 덕분일까.

출발하기 전 타티아나가 했던 일까지 끄집어내면서 에르네스트는 유치한 장난을 이어나갔다.

이내 타티아나가 결국 항복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에르네스트는 기분 좋게 웃으며 재미있어하기만 했다.

지금껏 두 사람의 관계가 약간 복잡하다고 봐왔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류보비는 일단 지금은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정하고는 이참에 다 같이 사진을 찍자며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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