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1화
타티아나는 눈에 띄는 편이다.
물론 수년 전부터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근래 들어 그녀는 정말 어딜 가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곤 했다.
그건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은 피아니스트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부류의 관심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잘 안다.
‘그보다 훨씬…….’
자기도 모르게 에르네스트는 옆에서 걷고 있는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류보비와 이야기하며 웃고 있었는데, 그 어떤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놓아도 완벽할 것 같았다.
반듯한 외견뿐만이 아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타티아나에겐 사람의 시선을 잡아채는 분위기가 있었다.
예전에 한창 몸이 약했을 땐 그 분위기가 흐릿했지만, 지금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서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녀가 정말 멋진 사람인 이유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지만.
“…….”
에르네스트의 마음은 조금 복잡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타티아나의 매력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가 반면, 앞으로도 절대 몰랐으면 하는 바람도 뒤섞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유치함이지만 지금 그의 거짓 없는 마음은 그 모순과 유치함 없이는 설명할 수 없었다.
게다가 거기에 당장 자신의 상황과 아나스타샤의 상황.
조금 더 넓게는 루슬란의 감시까지 여러 가지가 샐러드처럼 섞이자 그 이상은 생각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에르네스트는 살짝 뒤처져선 앞서가는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막 돌아선 그녀와 마주하고는 그냥 모든 생각을 던져버렸다.
“왜 그러시나요?”
“아무것도 아냐.”
환하게 웃는 타티아나를 보면 이런 곳에서까지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고 느껴진다. 그저 그녀가 즐겁다면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발걸음을 맞추며 나란히 걸었다.
기념품도 어느 정도 구매하고, 새해 복권까지 샀지만 시간은 꽤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어딘가 앉아서 시간을 때워도 될 일이겠지만, 타티아나는 이 로컬 마켓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무작정 돌아다녀 보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모두는 한뜻으로 승낙했다.
기념품이란 목적이 있어서 그냥 지나쳐버렸던 수많은 가게들이 새롭게 보인다. 그중 타티아나와 류보비는 옷가게에 흥미를 보였다.
브랜드도 없고 어디서 가져온 건지 알 수 없는 옷들이었지만, 그녀들에게 그런 건 전혀 상관없는 것 같았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류보비는 벌써 스웨터를 갈아입고는 타티아나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어때요? 어때요?”
“너무 귀여워요. 사진 찍어도 될까요?”
“에헤헤헷.”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진 요청을 받던 타티아나가 이번엔 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류보비는 너무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이 제일 잘 나올 만한 곳을 찾아야 한다면서 타티아나는 좁은 가게를 돌아다니며 진지하게 촬영을 마쳤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류보비는 바로 다음 옷을 들고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이 패션쇼가 대체 언제 끝날지 에르네스트로선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죄다 여성복뿐인 이곳에서 딱히 끼어들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근처에 어슬렁거리고 있다가 타티아나와 눈을 마주쳤다.
타티아나는 행복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아나스타샤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무슨 말이야?”
“음…… 그런 게 있어요.”
말하다 말고 갑자기 부끄러워졌는지 타티아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마 아나스타샤와 쇼핑을 가면 타티아나가 지금 류보비와 같은 포지션일 테니까.
타티아나는 외모도 출중하고 자세도 좋아서 어떤 옷도 잘 어울린다.
의상 모델로서 이만한 잠재력을 지닌 사람은 흔하지 않겠지. 지금 이 가게 안에서만 보더라도 그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옷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입어달라고 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무턱대고 입어보라 했다가 불쾌한 내색이라도 한다면 정말 최악일 테니까.
때문에 에르네스트가 가만히 있는 사이, 류보비가 다시 이번엔 재킷을 입고 나왔다.
타티아나가 박수까지 치며 칭찬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혼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옆의 에르네스트까지 끌어들였다.
“그나저나, 어떤가요? 정말 귀엽지 않나요?”
“귀엽네.”
“말씀에 영혼이 담겨있지 않잖아요. 조금 더 진실을 담아주세요.”
마치 떼를 쓰듯 그녀가 요구했다.
솔직히 그렇게 말하는 네가 더 귀엽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지금 에르네스트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여러 이유가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물론 그녀에게 다시 반말을 듣고 싶단 생각으로 오늘은 여러 장난을 쳐 보기도 했으니 그에 대한 관성으로 무슨 말이든 해볼 수 있겠지. 정말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오늘은 이쯤 하고 싶었다.
적당히 근처에 사람도 별로 없는 것을 확인한 에르네스트는 잠깐 두 사람이 마음 편히 놀도록 두기로 했다.
어차피 자리를 떠도 빅토르는 타티아나에게 붙어있을 테고.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나도 잠깐 돌아다니다가 올게.”
“예? 어딜요?”
“그냥 여기저기.”
“……그렇게 하세요.”
타티아나는 약간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관심 없는 것처럼 보였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마땅히 설득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금방 오겠다고, 아니면 연락하라고 말한 뒤 에르네스트가 가게에서 나오자 바로 아나톨리가 따라왔다.
“저도 같이 가요.”
가급적 혼자 다니고 싶었지만, 한 명 더 있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몇 걸음 멀어지자마자 아나톨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죽는 줄 알았네.”
다분히 동의를 구하는 듯한 말이어서 에르네스트가 대답했다.
“뭘 죽어?”
“자꾸 물어보니까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타티아나가 에르네스트에게 물어봤던 것처럼, 아나톨리 역시 몇 번 감상을 요청받았다.
류보비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 또래 나이라면 칭찬을 가볍게 잘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에르네스트는 자신도 과거에 그랬음을 떠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뭘 어렵게 생각해. 그냥 귀엽다고 해.”
“형도 아까 그냥 그랬다가 한 소리 들었잖아요.”
“그건 그렇네.”
솔직히 나이를 조금 더 먹었다 하더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타티아나가 모델이었다면 조금 더 진심으로 평할 수 있었을 텐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미련을 접어두고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을 꺼내 지도 앱을 켰다.
무작정 돌아다니는 것보단 이렇게 찾는 편이 빠르다.
지도를 보는 것을 본 아나톨리가 대뜸 물었다.
“어디 갈 거예요? 오락실?”
“글쎄…… 일단 들르고 싶은 곳이 있는데.”
대충 시간을 때울 줄 알았는지 아나톨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진짜로 살 게 있었어요? 그냥 빠져나오려고 핑계 댄 게 아니라?”
“핑계를 대긴 해야 했지.”
“?”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하고 있는 아나톨리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모레 무슨 날인지 알지?”
“크리스마스잖아요.”
“그거 말고.”
“말고…… 아, 누나 생일!”
“그래.”
크리스마스와 겹치는 타티아나의 생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이상할 정도였다.
아나톨리도 지금 막 생각난 것처럼 말하고 있긴 하지만 생일 자체를 염두에 둔 건 꽤 오래전부터였던 것 같았다.
생각을 해도 어렵다는 듯 아나톨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알고는 있었는데…… 아, 망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가벼운 걸로 해. 뭐든지 그 애는 좋아해줄 테니까.”
“작년에 연필도 잘 쓰는 것 같긴 했는데…… 형은 어떻게 할 거예요? 작년에 뭐 했었어요?”
“나? 실내용 슬리퍼.”
“…….”
그 말을 들으니 기억났다는 듯 아나톨리가 올려다본다. 에르네스트는 무슨 문제 있냐는 듯 손을 들어보였다.
작년 타티아나의 생일에 에르네스트가 선물한 것은 실내용 슬리퍼였다. 싼 물건은 아니었다. 3000루블짜리였으니까.
타티아나에겐 그 무엇이 싸지 않겠느냐만.
아나톨리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중얼거렸다.
“솔직히 그때도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싶…….”
“왜? 잘 신고 다니던데.”
“아니, 그래도…….”
아나톨리는 자신의 기준으론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무언가 설명하려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에르네스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선물을 고르고도 당당한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슬리퍼라는 건 그 가격도, 선물 자체의 성의도 조금 모자라게 느껴질 만하다.
심지어 타티아나가 친구들에게 쏟는 정성을 보면 더더욱.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물건으로만 돌려주려고 하면 도저히 기준을 맞출 수 없을뿐더러, 타티아나를 부담스럽게 만들 뿐이라는 걸 에르네스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따로 준비했던 게 있었는데, 조금 늦어졌을 뿐이다.
“원래 하려던 선물이 있었는데,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서 낮췄던 거야. 자신도 별로 없었고. 그런데 이번엔 그냥 하려고.”
조금 솔직한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까지 아나톨리에게 자세한 내막을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스터디룸에서 오래 있었던 아나톨리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듯 보였다.
짧게 이야기했을 뿐인데도 알아들었다는 듯 아나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건방지게 말했다.
“……형도 생각이 많네요?”
“무슨 소리냐. 꼬맹아.”
“아무것도요.”
대충 알겠다는 듯 히죽거리는 모습에 에르네스트는 괜히 아나톨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전혀 아프지 않을 텐데도 아나톨리는 왜 때리냐면서 호들갑을 떨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누나한테 이를 거예요.”
“이르든가.”
시큰둥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그 가벼운 협박에도 뜨끔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이렇게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음을 새삼 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하면서 시장의 섹터를 몇 개 지나쳤다.
에르네스트가 지도의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자, 슬슬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느꼈는지 아나톨리가 말했다.
“아무튼 저도 좀 찾아봐야겠네요.”
그리고 아나톨리도 본격적으로 고민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정해놓은 걸 먼저 사려다가, 그럼 아나톨리를 혼자 돌아다니게 두게 된다는 걸 깨닫고는 일단 그 뒤를 따랐다.
아마 타티아나라면 이렇게 했을 테니까.
***
소치에서의 4일은 정말 황금 같은 순간들이었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기분이다.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한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면서 모두를 돌아보았다.
다들 다시 모스크바에 돌아온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수속 같은 것 없이 공항 옆 휴게실로 향하니 빅토르가 내게 보고했다.
“아가씨. 캐리어와 박스들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즉시 이곳으로 가지고 오도록 했습니다. 캐리어는 개인으로…… 박스는 어떻게 할까요?”
“박스는 제가 직접 보고 확인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빅토르는 모두를 다시 돌아보고 숫자를 세고는, 이번엔 시간을 확인했다.
나와 루슬란 오빠를 빼고도 여덟 명이나 되는 인원들을 어떻게 집으로 돌려보낼지 계산하고 있는 듯 보인다.
난 그의 수고를 조금 덜어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제가 물어보고 정리해서 알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전 직원들과 잠시 이야기를 좀.”
그가 바쁘게 다시 공항 직원들과 이야기를 하러 가고, 난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저마다 잡담을 하고 놀던 아이들은 부르자마자 왜 불렀는지 알겠다는 듯 말했다.
“난 지하철 타고 갈게.”
“나도.”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을 타는 건 힘든 일인데도, 다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난 어지간하면 모두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정 안 되면 아이들만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집에 돌아가서도 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일단 그렇게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기로 정했다. 그런데 갑자기 리처드가 물었다.
“야, 에르네스트.”
“어.”
“너희 집에 혹시 남는 방 있냐?”
“……뭐?”
불길함을 감지한 에르네스트가 되물었다.
리처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괜찮으면 이번 연휴 끝날 때까지 며칠만 나 재워주라. 아, 여기 승우도.”
“내가 왜??”
이건 에르네스트가 야박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만큼 리처드가 대뜸 말한 이야기였으니까.
다들 황당하단 표정으로 보고 있자 한승우가 대신 설명했다.
“그게, 우리 기숙사가 연휴 동안 공사로 가스도 수도도 안 나온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연휴에 머물던 애들도 다들 지금 친구 집이나 호텔에 가 있어.”
“아, 공사한다는 이야기 들었던 것 같아.”
발렌티나가 그 이야기가 진짜라고 증언했다. 물론 기숙사 공사를 거짓으로 말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진짜겠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유학생 두 명은 연휴 동안 갈 곳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여행 동안엔 괜찮았지만, 앞으로 며칠은 더 버텨야 한다.
사정을 듣고 나니 에르네스트도 조금 이해가 간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그래도 흔쾌히 받아들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호텔 구하든가.”
“싼 곳은 없더라고. 그리고 그냥 재워 달란 건 아냐. 숙박비 줄게.”
“얼마 줄 건데.”
“오백 루블?”
“장난쳐 지금? 마당에서 잘래?”
“칠백?”
그 와중에도 리처드는 흥정을 하며 놀고 있었고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썼다.
저기에 한승우까지…… 세 사람이 한집에 있으면 대체 무슨 사건이 벌어질까.
솔직히 궁금하면서도 조금 걱정된다.
때문에 난 조금 더 좋은 방안을 떠올렸다.
“저기, 정 그러시면 저희 집으로 오시는 건 어떠신가요? 음…… 이제야 이야기하지만 7일은 제 생일이라 원래 초대하려고 하기도 했었고요.”
“당연히 좋…….”
“야, 됐어. 그냥 우리 집으로 와.”
리처드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에르네스트가 말을 자르더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정해버렸다.
난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눈빛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곤 그냥 이렇게 정하고 마무리하자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