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72화 (972/1,277)

##  972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한 팀은 일단 공항버스를 타고 모스크바 도심까지 이동한 다음, 지하철로 갈아탔다.

지하철 안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한 손만으로 캐리어를 끌고 다니려니 절로 진이 빠졌다.

하지만 이 정도는 익숙해질 만했다.

타티아나는 차량으로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거절한 것에 대해 추호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는 다른 모두도 비슷한 생각인지 불만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전혀 없었다.

각자 캐리어를 들고 지하철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선 이번 여행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먼저 내릴 때가 되었다.

“모레 봐. 다들 올 거지?”

“가야지.”

“바이바이.”

타티아나의 생일 파티는 크리스마스와 겹치는 홈 파티 형식이라서 빠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녀 본인은 그것을 되도록 더 간소화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두 사람이 내리고 나자 네 명이 남았다.

“…….”

에르네스트와 사샤, 그리고 리처드, 한승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들 스마트폰을 보면서 무언가 눈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리처드까지도 말을 삼가고 있다는 것에 에르네스트는 조금 충격이었다.

살갑게 구는 건 소름 끼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삭막한 것도 좋지 않다. 심지어 이번엔 그가 호스트인 입장이니까.

“먼저 기숙사에 들른다고?”

“어. 일단 이 짐들 놓고…… 가지고 올 것도 있어서.”

“그럼 다음에 내릴 준비 해야겠네.”

“아니면 먼저 가 있어. 찾아갈 테니까. 저번에 가봐서 어딘지 알아.”

“됐어. 그냥 같이 가.”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하는 것이 자신의 스타일이었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저번에 봐서 알겠지만 우리 집 그리 안 넓어. 있는 것도 뭐 없고. 베르체노프 별장에서 받았던 대접을 기대하면 실망할 거야.”

“아무도 그런 기대 안 해.”

“농담도 잘하네 에르네스트.”

이 자식들 진짜 그냥 길바닥에 버리고 갈까.

기가 살아난 리처드와 한승우를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그래도 에르네스트는 꾹 인내했다.

지난 며칠간 타티아나가 신경 쓰고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다시 며칠간 이 두 녀석을 맡는 일은 생각만 해도 싫었다. 심지어 얼마나 잘해 줄지 생각하면 더더욱.

“다음 역에 내려야 돼요.”

“아, 그래. 사샤.”

참고 인내하는 사이 지하철은 테아트랄나야 역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캐리어와 짐들을 들고 걸어서 20분. 중앙음악학교 기숙사까지 가는 길이다.

기숙사에 도착하자 에르네스트는 정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리처드와 한승우는 끄떡도 없는지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캐리어를 집어들고 계단을 거의 뛰어 올라갔다가, 1분도 채 안 지나서 다시 돌아왔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할까?”

“…….”

그걸 말이라고 묻나.

에르네스트는 택시를 부르고는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한승우가 캐리어를 들어주겠다며 자진했지만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사양했다.

그는 환자가 아니다. 그런 사소한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대중교통으로 오는 길이 힘들었다면, 택시로 집까지 가는 길은 정말 편했다.

물론 네 명이나 되다 보니 앞좌석에 에르네스트가 타고 뒷좌석은 세 명이 끼어 앉는 형국이 되었지만, 아직은 사샤가 작아서 충분히 탈 만했다.

그렇게 익숙한 도로들을 지나 집에 도착할 때 즈음 되니 기분이 조금 더 풀어졌다.

그리고 어쨌거나 친구를 집에 데리고 간다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저번 생일 때 초대했을 때도 솔직히 즐거웠었다. 에르네스트는 그것까지 굳이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저희 왔어요.”

초인종을 누르자 곧 문이 열리며 이자벨라가 두 팔 벌려 맞이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모두들 반가워. 어서 들어와.”

“실례합니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리처드와 한승우는 깍듯하게 인사하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미리 연락을 해둔 덕분인지 연휴에 친구들을 초대해도 이자벨라가 당황하는 일은 없었다.

집도 어쩐지 조금 말끔하게 보인다. 아마 청소를 미리 하신 것 같아서 에르네스트는 조금 미안했다.

“아버지는요?”

“친구를 봐야 한다고 나갔지.”

“그래요.”

아무래도 연휴에도 바쁘신 분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캐리어를 방 근처에 가져다 놓았다.

적어도 이 캐리어의 정리와 빨래는 직접 할 생각이었다.

그런 그의 옆에 이자벨라가 슥 다가왔다. 아무래도 궁금한 부분이 많은 눈빛이었다.

“그보다, 여행은 즐거웠니?”

“예. 정말 좋았어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음…… 그러려무나. 타티아나는 잘 있고?”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했는데도 소용없었다.

그냥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는 어머니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짧게 말했다.

“잘 있죠.”

“크리스마스에 생일일 텐데.”

“초대받았어요. 그래서 모레 또 볼 예정이에요.”

“그렇구나? 잘됐다. 에르네스트.”

어머니가 타티아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진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에르네스트는 지금 어머니의 흥미에 만족스럽게 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럴 성격도 안 되고.

대충 웃어넘기고 나서, 그는 이어 리처드와 한승우에게 방을 보여주었다.

“오, 서재야?”

“그래. 침대는 없지만 매트 정도는 줄게.”

“그거면 충분하지. 책 봐도 돼?”

“제자리에 꽂아놓기만 하면. 다른 데 두면 아버지가 난리 나시거든.”

“그건 걱정 마.”

한승우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에르네스트는 어차피 더 복잡하게 이러쿵저러쿵해 봐야 의미도 없고 피곤하기만 하리라 생각하며 일단 대충 짐만 풀고 나오라고 전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네 명이서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다.

뭘 해야 할지 고민할 것도 없이 사샤가 게임기를 가지고 나와선 같이 하자고 졸랐다.

리처드와 한승우는 놀러오자마자 게임기부터 잡는 것에 약간 부담감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이자벨라는 신경 쓰지 말고 놀아도 된다고 하고는 과일과 간식 정도만 내어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는 정말 신경 쓰지 않고 놀아버리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번에도 내 승리네. 하하하.”

“어이, 핸디캡 조금 더 줄까?”

왼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에르네스트는 컨트롤러를 조작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기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하고, 일단은 유학생 둘과 사샤가 노는 모습이었지만 그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문제는 유학생 둘이 전혀 자비가 없었다는 건데…… 어린 사샤를 위해 핸디캡을 달았지만, 그다음엔 정말 봐주는 일 없이 게임하고 있었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승부의 세계가 냉혹하다는 걸 몸소 겪으며 사샤는 울상이 되었다.

“사샤, 잠깐만.”

“응?”

에르네스트는 유심히 지켜보면서 느낀 리처드와 한승우의 약점을 파악해선 사샤가 공략할 수 있는 난이도로 설명해주었고, 이해가 빠른 사샤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엔 에르네스트가 코칭해준 대로 게임에 임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사샤는 한승우를 쓰러뜨렸다. 사샤는 소파로 컨트롤러를 던져버리고는 만세를 외쳤다.

“와! 이겼어!”

“휴…….”

직접 게임에 참가는 못 하지만, 한 번도 못 이기게 해줬으면 형으로서 위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뻔했다.

에르네스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기대었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느낌이다.

사샤가 잠깐 코칭받은 것만으로도 빠르게 기술을 습득하는 걸 본 한승우는 다른 것들도 사샤에게 가르쳐주었다.

“와, 뭐예요? 어떻게 한 거예요?”

“이런 기술은 몰랐지?”

난생처음 보는 기술을 한승우가 선보이자 사샤는 대번에 흥미를 보이며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다.

그리곤 한승우가 가르쳐주는 대로 금방금방 배워나갔다.

수제자를 얻어 기분이 좋아진 한승우와 사샤가 게임기를 가지고 노는 사이, 에르네스트는 잠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지금 게임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사이에 짐 정리나 좀 하고 빨래도 돌려놓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사온 것들을 꺼내놓는데 언제 따라왔는지 리처드가 말을 걸어왔다.

“뭐 해?”

“정리 좀 해놓으려고. 너희들 것도 빨래하려면 일단 지금 세탁기 비어 있을 때 뭐라도 넣어둬야 할 테니까.”

“우리 것까지?”

“그럼 안 할 거야? 며칠 내버려두면 썩을걸?”

당연한 일이었는데 리처드는 그래도 약간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누가 그렇게 보는 것이 싫었다.

정리하던 것들을 책상에 대충 던져놓고는 다시 리처드를 돌아보았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조금 의외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

또 이상한 소리를 하기에 짜증을 냈지만 리처드는 웃기만 했다. 그는 원래 약간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나가라고 하려는 찰나, 리처드가 다시 물었다.

“생일 선물은 뭐 샀어?”

“선물?”

“그래. 타티아나에게 줄 선물.”

난데없이 따라와선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리처드도 선물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나톨리와 같이 돌아다니면서 선물을 고르기도 했었지만, 그 대상이 리처드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에르네스트는 딱히 친절해질 생각이 없었다.

“그건 왜 물어보는데?”

“혹시 곡이야?”

“그건 왜 물어보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경계심이 확 자극된다. 에르네스트는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리처드는 괜히 짜증내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네가 그 애를 만나서 어떤 곡들을 쓰고 있는지, 거기에 대해선 나도 흥미가 있거든.”

영국에서 유학까지 올 정도니 리처드도 음악에 얼마나 미친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정도다.

그러니 친구가 쓰는 곡이라면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이렇게 물어보려고 하면 에르네스트가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에르네스트 개인이 아니라 타티아나와 엮으면서 흥미롭다는 듯 무언가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것 같은데, 그런 건 그냥 웃고 넘길 수가 없었다.

“신경 꺼. 네가 들을 일은 없을 테니까.”

“글쎄, 어차피 타티아나가 무대에서 연주하지 않을까? 그럼 자연히 나도 듣게 될걸.”

“…….”

“그 애는 네 곡을 정말 좋아하잖아. 바로 해 줄걸?”

반론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처드의 말대로 타티아나는 그럴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미 에르네스트가 헌정한 곡을 전혀 두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리사이틀에 초연으로 올렸다.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정말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리처드에게 확인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딱히 내 곡이라서가 아니라…… 원래 타티아나는 성격이 그렇잖아. 그러니까 해주는 거겠지.”

때문에 대충 둘러대는 말이 나왔다.

세상엔 에르네스트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작곡가들이 많다.

타티아나에게 곡을 헌정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나오겠지. 그럼 타티아나는 그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속이 편하진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게 한 리처드에게 그 짜증을 돌렸다.

하지만 리처드는 태연하게 되물었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가?”

“그 애는 너한테밖에 안 그래.”

갑자기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에르네스트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진 그녀에게 곡을 준 사람이 더 없을 테니 그렇겠지만…… 앞으로도? 그리고 왜 리처드가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는지도 잘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다른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심지어 지금처럼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가 아닌 상황에선 더더욱.

더더욱 인상을 쓰면서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됐으니까 너도 가서 네 짐이나 정리해.”

“그래야겠다. 저녁엔 뭐 하고 놀까.”

“놀긴 뭘 놀아.”

“?”

갑자기 따라와서 머리 아프게 하는 리처드에게 에르네스트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기말시험 준비 안 할 거야? 오늘 내일은 나도 사샤도 공부할 생각이니까 놀 거면 나가서 놀아.”

농담이 아니었다. 연휴가 끝나면 10학년 1학기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다.

실기는 그래도 연말에 먼저 시험을 쳐놔서 압박이 심하지 않지만, 필기는 그야말로 가차없었다.

바로 시작되는 기말시험은 아무 생각 없이 연휴 내내 늘어져 놀다가 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여행까지 갔다 왔으니 정말 공부를 해야 하긴 하지만…… 지금 에르네스트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의도는, 괜한 소리를 한다면 나도 짜증나게 해 주겠다는 의도에 가까웠다.

리처드는 멀뚱거리며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왜 그런 것까지 닮는 거야?”

“뭔 소린데 또.”

“아무것도 아냐.”

하지만 리처드도 에르네스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닌지 그 이상 말하지 않고 다시 거실 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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