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4화
길다면 긴 신년 연휴가 끝났다.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의미에서 충분히 쉬고 좋은 시간을 보냈으니 이젠 다시 본격적으로 주어진 본분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건 당연히 학생으로서 등교하고 연주자로서 연습하는 것이다.
바로 아침 연습부터 시작했다.
그간 꽤 많이 빼먹고 있었으니 그사이 조금이라도 녹슬었음이 분명하다.
난 다시 손가락 사이사이 기름칠을 하고 날을 세우듯 정밀하게 스스로를 진단하고 조정했다. 그리 큰 문제가 느껴지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연습을 마치고 나오니, 피아노 소리를 들었는지 아침 운동을 하던 경호원 레오니드가 웃으며 말했다.
“비로소 한 해가 다시 시작된 느낌이군요.”
내가 아침 연습을 다시 시작한 것이 레오니드에겐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와 비슷한 의미인 모양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나도 더 힘이 난다.
“좋은 아침이에요.”
“타티아나!”
등교 시간보다 조금 일찍 교실에 도착해선 먼저 와 있던 바르바라와 인사했다.
난 소치에서 사온 기념품을 바르바라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 역시 미리 준비한 듯 보이는 선물을 내게 주었다.
가족 여행을 가는 바람에 그녀는 내 초대를 사양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이후의 일들이 궁금한지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스키를 타거나 한 것은 아니었기에 난 그저 별장에서 머물며 쉬었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좋겠다. 나도 가족여행 가지 말고 너 따라갈 걸 그랬어.”
“그, 그래도 가족들과 함께 하심이…….”
“진짜 피곤해 죽는 줄 알았다니까? 오로라 봐야 한다면서 밤새 돌아다니다가 결국 못 보고, 그다음엔 바다낚시 하러 가자면서 새벽 5시에 깨워서 끌고 나가고…… 내가 우리 아빠 때문에 일찍 죽을 거야 아마.”
“아하하…… 하하…….”
“난 휴식이 필요하다고!!”
연휴 동안 휴식이 아니라 극한 체험이라도 하고 온 듯한 바르바라는 그르르거리는 묘한 소리를 내며 책상에 풀썩 엎어졌다.
난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녀의 여행에서 뭔가 즐거운 이야기를 끌어내보려고 애썼지만, 오로라도 못 보고 물고기도 못 잡은 바르바라에게선 절망만 느껴졌다.
하지만 울적하게 있던 바르바라는 내가 준 초콜릿을 한 입 먹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 좋아했다.
정말 기념품이라도 안 사왔으면 어쩔 뻔했나 모르겠다.
“그나저나…… 타티아나, 시험공부는?”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는 것 아니었나요?
하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제대로 볼 필요가 있었다.
난 그리 공부를 많이 하진 못했다고 답했고, 바르바라 역시 자기도 그렇다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나 지금 시간 날 때 이거 잠깐 가르쳐주면 안 될까?”
아무래도 뭔가 앞선 이야기들이 많다 싶었는데, 연휴가 끝나고 처음 보자마자 공부를 가르쳐달란 말을 꺼내기가 조금 부끄러웠나보다.
난 귀여운 그녀의 일면을 느끼며 웃었다.
“물론이죠. 어떤 과목인가요?”
“수학…….”
“바르바라는 기본적인 감각이 좋으시니까 금방 잘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예전에도 바르바라에게 몇 번 공부를 가르쳐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금방금방 잘 배우곤 했다.
그때의 실력이 지금도 있다면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바르바라에게 수학을 가르쳐주다가, 뒤이어 온 라리사나 안드레이와 인사를 하고는 똑같이 기념품을 나누어주었다.
다들 사정이 있어 내 초대에 응하진 못했지만 다음에 또 초대해달라며 후일을 기약했다.
약간 늦게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도 왔고, 한승우, 리처드. 그리고 에르네스트도 도착했다.
“…….”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하던 중에 그를 발견해서, 난 따로 말하지 말고 손만 살짝 흔들어 그를 반겼다.
에르네스트 역시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곤 자리로 향했다.
그에게 헌정받은 곡을 가지고 할 말이 정말 많았는데, 언제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혼자서만 계속 보고 있었다.
아마 곡을 놓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 에르네스트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한다.
작곡가가 자기 곡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할지 듣고 싶은 건 당연할 테니까.
슬쩍 바라보니 에르네스트는 딱히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듯 이어폰을 끼고는 책을 폈다. 그냥 공부에나 집중할 모양이다.
물론 시간은 아직 있으니까 급할 건 없다. 당장 눈앞에 닥친 시험을 제대로 잘 치른 다음에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이다.
‘나도…….’
그나저나 그는 이번 일반 교과 시험에서 날 뛰어넘을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우린 항상 수석을 두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관계였으므로 이번 시험 역시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간 누가 몇 번 이기고 몇 번 졌는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한 목표를 두고 비슷하게 경쟁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 사이를 이어놓는 강력한 힘 중 하나임을 깨닫고 있을 뿐이다.
어느 때나 내 입장은 같았다.
그냥 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왜 그래? 타티아나.”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잠깐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라리사가 날 불렀다.
깜짝 놀라며 다시 시야를 내 주변으로 좁힌 나는 친구들이 묻는 것들을 다시 떠올리며 대답해주기 시작했다.
***
수업은 그야말로 악몽에 가까웠다.
10학년은 이제 앞으로 졸업까지 1학년밖에 남기고 있지 않은 고학년이다.
고등교육을 받기 위한 준비가 될 마지막 기반들을 쌓는 시간인 것이다.
물론 우린 대부분 음악원으로 갈 테고, 음악원에선 이런 일반교과 수업을 받지 않는다. 잘 해봐야 외국어 교육 정도.
그러니 미적분을 배워서 어디에 쓰냔 말이 나와도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단지 기술적인 부분에서 그치지 않고 조금만 깊게 들어가보면 음악엔 문학적, 언어적 그리고 수학적 요소가 정말 많이 들어간다.
그런 기초적인 것들에 대한 이해가 없이 제대로 된 음악을 다루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이다.
때문에 학교에선 연주자로서의 기술은 물론이고 품위나 태도, 인문학적 소양 등을 종합적으로 가르친다.
그러니 배워서 어디에 쓰느냔 변명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난 그런 학교의 방침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충실하게 따르는 학생이었다. 이 학교에 다니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
전 세계에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학생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보면 불평불만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교과 시험의 수준과 범위가 그야말로 거의 살인적이라는 부분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난 졸업 못 할 거야…….”
여기저기서 죽는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연휴 내내 거의 놀기만 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그리 여유 있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 있는 모두와 함께 졸업하고 싶었다.
난 우울해하는 아이들을 달래고, 발렌티나가 제발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받아들였다.
작년 말은 실기 시험으로 여러 부탁들을 들어주었다면, 이번엔 필기시험으로 부탁을 들어줄 차례인가 보다.
1월 말에 있을 겨울방학을 모두가 웃으며 맞이할 수 있도록, 난 다 같이 최선을 다해 보자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렇게 오전 수업을 마치고, 식사 후 스터디룸에 가서 다른 아이들은 어떨까 좀 물어볼 생각이었다.
“아.”
“아, 라니?”
막 계단을 오르던 나는 구세프 선생님과 마주치고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가 인상을 쓰는 선생님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반가움 외에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선생님이 무어라 하시기 전에 난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연휴 잘 보내셨나요?”
“오냐. 덕분에.”
성의 없이 대충 까딱이는 인사였지만 난 구세프 선생님 역시 날 보고 반가워하신다는 것을 느꼈다.
싱글벙글 웃으며 올려다보자 선생님은 삐딱하게 물었다.
“넌 다른 녀석들과 놀러 갔었다면서?”
“예. 소치에.”
“소치…… 좋은 곳이지. 스키라도 탔나?”
“그건…….”
내가 말끝을 흐리자 선생님 역시 실언했다는 듯 살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신경 쓰는 것이 너무 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에르네스트를 생각한다면 스키 같은 것을 타는 건 쉽지가 않다.
선생님은 빠르게 대화를 휙 꺾어버렸다.
“아무튼, 놀러 다니는 것도 좋지만 너무 정신 빼놓고 다니진 마라. 넌 지금까지 잘해 왔지만, 난 10학년이 되어서 갑자기 흐트러지는 녀석들도 수없이 봐 온…….”
“…….”
“뭘 웃나?”
“그냥요.”
왜 갑자기 야단이라도 치시듯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너무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선생님이 이렇게 진지한데 웃고 있는 건 예의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날 가만 내려다보던 선생님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그래, 네게 이런 말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알아서 잘 할 테지.”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방금 전까지 걱정이던 아이의 이름까지 꺼냈다.
“에르네스트 녀석도 그렇고.”
“알아서 잘 하나요?”
“그래. 그사이 당연히 노는 줄 알았는데, 내가 한 소리 하기 전에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써 온 곡을 주더군.”
그 말을 듣자마자 뇌리에 떠돌던 곡이 떠올랐다. 난 나도 모르게 그 곡을 특정할 정보를 입 밖에 내고 있었다.
“혹시 다단조의 곡인가요?”
“……역시 네가 헌정받았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선생님은 중얼거렸다.
나 역시 그 곡을 내게 주고 어디에도 내보이지 않는 건 너무나 아쉬운 일이라 생각했기에 약간 안도할 수 있었다.
선생님에게 보여드렸다는 건 그만큼 더 큰 어딘가에도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니까.
에르네스트는 일전에도 곡을 내게 헌정하면서 다른 곳에서 출판하지 않고 그냥 묻어둬도 된다는 태도를 취했지만, 난 그게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헌정이라 함은 저작권과 행사권 일체를 넘겨준단 뜻이 아니라, 그저 그 곡을 쓰는 데에 도움을 준 누군가에게 바친다는 의미일 뿐.
난 그 의미를 받은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니까 에르네스트의 곡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면 한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드는 건 당연했다.
친필로 된 원본은 어차피 내게 있으니까.
“아니다, 음…… 그냥 내가 곡을 보니 네게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 녀석도 비슷하게 생각했겠지.”
“후후후, 그런 걸까요?”
“혹시 이미 쳐 봤나?”
그의 곡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 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연하죠.”
“할 만하든?”
“재밌어요.”
“그게 뭐냐. 똑바로 말해 봐라.”
선배 연주자의 레퍼런스가 없는 악보는 해석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야말로 주어진 지도만을 보고 보물을 찾아 나서는 탐험가의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가끔 답답하고 무섭기도 한 것이 당연한 일이었는데, 에르네스트의 곡을 탐험할 땐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곡에 숨겨진 가치를 내가 과연 어디까지 끌어낼 수 있을까. 그런 두근거리는 기분만이 가득했다.
난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말하는 대신 간략하게 말씀드렸다.
“연구가 조금 필요할 것 같은데…… 언젠가 리사이틀을 하면 제 프로그램에 올리고 싶어요.”
“……그러냐.”
선생님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의미였다.
곡을 이미 보신 선생님이 리사이틀 프로그램으로도 합당하다는 평을 하실 정도라면 이미 검증은 어느 정도 된 것이다.
에르네스트가 다시 한번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난 싱긋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래서 바로 딱 한 번 연주해보고 원본은 보관해뒀어요.”
“무슨 말이냐 그건 또?”
“원본을 계속 보면 상하잖아요? 절대 그렇게 둘 순 없죠.”
어제 악보를 선물받고, 내가 그 원본을 보면대에 올려 둔 건 처음 연주해 본 한 번뿐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누가 예술품을 계속 가지고 다니면서 펄럭거리겠는가?
“사본을 만들어 세 부 뽑고, 파일로도 저장해뒀어요. 그리고 원본은 고서 보관용 특수 코팅을 한 다음 아버지 서재에 보관해뒀죠.”
“뭐라고? 서재엔 왜?”
“훼손되어선 안 되는 문서들을 보관하는 곳이 따로 있어서요. 한 칸만 빌려서 보관해뒀어요. 이걸로 원본은 안전해요.”
“…….”
구세프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날 내려다보았다.
나도 솔직히 말로 하다 보니 조금 너무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은 있지만, 그것도 다 선생님이 친필 악보를 직접 보지 않으셔서 지금 이해를 못 하시는 것 같았다.
사본이라도 보여드리겠다고 말했지만 선생님은 이미 컴퓨터로 반듯하게 사보된 악보를 받아 봤다면서 필요없다고 거절하셨다.
그것과 친필 사본이 같진 않은데…… 난 약간 시무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