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5화
난 악보를 이렇게까지 소중하게 보관해본 적이 없었다.
그 가치가 매우 높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연주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보는 악보는 늘 사본이었고, 그 위에 필기를 하며 공부를 한다 해도 전혀 상관없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내 손에 라흐마니노프의 친필 악보가 들어온다면 과연 내가 어떻게 관리했을까?
난 그런 상상력 위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고, 그 결과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그래서 구세프 선생님에게도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선생님은 시큰둥한 반응이셨다.
“뭐 악보는 잘 보관해뒀다가 나중에 팔아먹든지 그건 알아서 하고.”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말씀이 지나치시다. 선생님이 괜히 심술궂게 구시는 일이 종종 있다는 걸 알아도 이런 말을 들으면 속상하다.
내가 눈을 흘기자 선생님은 헛기침을 하시더니 어물쩍 이야기를 넘겼다.
“아무튼, 그보단 네 이야기를 하자.”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면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말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던 이야기를 해 드려야 하나? 아니면 올해의 계획에 대해?
두서없이 생각하며 되물었다.
“제 이야기요?”
“뭘 모른 척이냐? 네 음반 말이다.”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선생님은 인상을 팍 쓰시며 말씀하셨다.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단지 음반을 낸 뒤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어서 지금 당장 선생님과 할 이야기가 별로 없을 뿐.
“아…… 그렇지 않아도 오늘 프로듀서에게 전화해볼 생각이었어요.”
“오늘?”
“예…… 그, 안 되나요?”
“안 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연휴 동안은 속세와 담쌓고 지냈나보군? 정말로 그사이 한 번도 안 알아봤나? 궁금하지 않든?”
궁금하긴 하다.
내 음반이 어떠한 평가를 받는지, 작년의 음반과 제대로 연결되어졌는지.
그리고 타티아나라는 피아노 연주자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
나도 평범하게 그런 욕구 정도는 가지고 있었고, 또 스마트폰으로 원하는 정보 등을 적당히 검색할 줄도 안다.
하지만 난 일부러 관련 정보를 전혀 찾아보려 하지 않았다.
연말에 음반을 내자마자 외부 연락을 끊은 것은 소치로 간 후에는 오로지 친구들에게만 신경을 쏟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 음악을 들어 주는 사람들 역시 중요하긴 하지만, 함께 여행을 가 있을 땐 눈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실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미 세상에 던져진 음악은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며 움직인다. 굳이 내가 전전긍긍 감시하고 있지 않아도.
“제가 신경을 쏟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진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이 녀석아!”
“화, 화내지 마세요…….”
내 생각들을 일축한 한마디는 너무 짧았고, 그건 선생님에게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시는 바람에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선생님은 더 무어라 하시려다가 간신히 참으시는지 손을 들어 옆머리를 짚으며 침착하게 말씀하셨다.
“하…… 그래, 아무튼. 연휴 내내 쉬지도 않고 기삿거리 하나 잡으려는 기자들에게 꼬리를 밟히지 않고 네가 꽁꽁 잘 숨어있었던 덕분에, 정보들이 나와 미하일에게까지 왔다.”
“선생님에게 기자들이 연락했나요……?”
“그래.”
“죄, 죄송해요…….”
내가 무작정 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끝나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나와 연관되어있음이 공개되어있는 사람들에게 그 전화가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급히 사과하자 선생님은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니다. 네가 잘 되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
“하지만 네가 세상에 던진 디스크로 어떤 파문이 일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계속 봐 둬야 한단 말이다. 네 스스로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말로 관심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고 친구들에게 집중하고 싶었을 뿐이지만…… 그마저도 선생님이 보시기엔 탐탁잖으신 게 분명했다.
내가 잘못을 인정하자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기울여 난간을 짚었다.
“하…… 칭찬을 해줘도 모자랄 상황에 또 혼이나 내고 있자니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나도 난데없이 호통을 들어서 기분이 그리 좋은 건 아니었지만, 칭찬이란 말엔 관심이 갔다.
뭔진 모르겠지만 아마 음반에 관련된 일이겠거니 싶어서, 칭찬해주실 일이 있다면 얼른 해달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그래도 이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듯 말씀해주셨다.
“아무튼, 네 음반이 벌써 골든 레코드 인증 기준을 넘어섰다. 타티아나.”
“……골든 레코드요?”
미국이나 영국, 독일 등에선 음반 판매량 인증music recording certification 시스템이 있고, 각 판매량에 따라 골드, 플래티넘 등의 등급을 매겨준다.
당연히 러시아에도 이런 인증 시스템이 있으며 음반을 낸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일전에 표트르가 자세한 이야기를 해준 덕분에 난 이 시스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이 잘 풀려서 뭐라도 받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1주일이 조금 지났는데 골든 레코드는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못 믿겠단 눈빛으로 보니 구세프 선생님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지, 재차 말씀해주셨다.
“내가 협회 쪽에 다시 확인도 받았으니 확실한 이야기다.”
협회라 하심은 전국 축음기 제작자 협회national federation of phonograph producers를 말씀하시는 거겠지.
인증에 대한 모든 것을 총괄하는 곳이다. 그곳에 문의하셨다면 내가 더 물어볼 것도 없다.
그런데 내 음반이 골든 레코드 인증을 받을 수 있단 말을 듣고도 조금 현실감이 없었다.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
음반 제작자인 두 분이 제일 좋아하고 계실 것 같단 생각이 우선 들었다.
이 판매량 척도는 우리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
조금 일찍 연락을 해 봤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난 조금 웃으며 말했다.
“잘 되어서 다행이네요.”
“그냥 잘 된 정도냐 그게? 협회의 친구가 그러더군. 21세기 들어 가장 빠른 기록 경신이었다고. 심지어 신년 연휴였는데 말이다.”
선생님은 약간 흥분했는지 빠르게 말씀하셨다.
미처 상상도 못 했던 나머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멍하니 있긴 했지만, 골든 레코드 인증 기록을 최단기에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점차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구세프 선생님이 멍한 내 반응을 보며 답답해하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고양되는 기분 속에서도 난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이슈가 된 덕분일까요? 제가 작년에 한 일이 있으니까요.”
이번 음반은 한 장으로만 승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작년에 냈던 음반과 엮여서 하나의 프로젝트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주목을 많이 끌 수 있었고, 그건 곧 판매량으로 이어졌다.
오롯이 음악만으로 평가받은 것이 아니란 생각은 있었다.
때문에 마냥 좋아하기보단 조금 차분하게 상황을 바라보려고 했는데, 선생님은 그렇게까지 어렵게 생각할 건 없다는 듯 말씀하셨다.
“그래, 그게 사람들의 관심을 확 끌어모으긴 했지.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이다, 네가 녹음을 잘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게다.”
“그야 그렇…….”
“네 생각 이상으로 넌 잘 해냈다. 왠 줄 아나? 네가 조금이라도 어설펐다면 바로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을 평론가들이 내가 아는 것만 열 명이 넘었거든.”
작년 음반엔 온갖 억측과 루머가 난무했었고, 망신을 당한 평론가들도 있다는 건 안다.
그 사람들이 악감정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구세프 선생님이 아는 것만 그 정도니 실제론 더 많겠지.
나도 모르게 경직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껄껄 웃었다.
“하지만 결국 네 이번 음반을 들어본 그 모두가 침묵했지.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조용히.”
아무 비평도 내지 않았다는 건, 날 인정했다는 뜻일까.
확실하진 않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약간 통쾌하다는 듯 연신 웃으면서 난간을 탕탕 쳤다.
“어중간한 누가 주목을 끌겠답시고 이런 기획을 진행했다면 내가 무조건 말렸을 게다. 하지만 너라서, 너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해보라고 한 거였다. 알겠나? 타티아나.”
“……예, 선생님.”
“그러니까 당당하게 기뻐해라. 넌 그럴 자격이 있어.”
평소 엄한 구세프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기쁘다.
환하게 웃으며 바라보자 선생님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씀하셨다.
“어쨌든, 과할 정도로 성공해버린 바람에 클래식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 다들 구매하려 나서고, 심지어 작년 음반은 프리미엄이 몇 배나 붙었다.”
“아하하…….”
“그런데 그것뿐이었다면 기록 경신은 못 했겠지.”
구세프 선생님은 팔짱을 끼시더니 보다 현실적인 부분에서 충족된 조건을 정확하게 짚어주셨다.
“일반적으론 그렇게 이슈가 되어서 빠른 속도로 팔리더라도 물량이 없어서 못 판다. 클래식 음반은 그리 많이 찍어내지 않으니까.”
“유명 음반들은 금방 매진되는 일이 잦았죠.”
“그런데 네 음반은 초도 물량을 얼마나 찍어놨는지, 단번에 수만 장을 팔아치우고 있다.”
어떻게 보더라도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선생님의 눈엔 일목요연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너와 손잡은 라예프스키 레코즈가 이 일에 정말 사활을 걸었던 모양이군.”
프로젝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신 구세프 선생님은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사장인 표트르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다.
높은 판매량을 그 누구보다 강하게 예측했던 건 다름 아닌 표트르였다.
그가 대형 음반사인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자원을 써서 음반의 대량 제작과 물류를 맡아주었기에 지금 이 모든 상황이 가능해진 것이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얼마 못 가 매진이 되어버렸을 테지. 난 새삼 그의 유능함을 느끼며 말했다.
“표트르가 힘을 많이 써 주셨죠.”
“그래, 아마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겠지. 그런데도 제작비 외엔 전혀 받지 않겠다고 했다고?”
“예.”
“……아마 이게 끝은 아닐 게다. 콩쿠르 전에 이렇게 이목을 끌었으니, 만약 네가 콩쿠르에서 결과를 잘 내기만 한다면 올해는 너의 해가 될 테지.”
음악가로서 오랜 시간을 살아온 구세프 선생님은 예리하게 말씀하셨다. 살짝 진지한 어투였다.
“그때 본 목적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표트르는 내 음악에 반했다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원봉사자는 아니다.
분명 그는 내게 원하는 것이 많은,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난 그의 욕심에 끌려다닐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보여준 의지만큼 어느 정도는 따라줄 의향이 있었다.
아마 이것도 그대로 말하면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말이겠지. 그래도 난 괜찮다는 판단하에 움직이고 있다.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넌 사람을 잘 보는 편이지.”
“물론 대가 없는 호의가 드물다는 건 알아요. 그러니까 만약 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의심이 간다면 바로 도움을 청하면 된다.
바로 생각나는 분들만 하더라도 오빠와 아버지,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처럼 든든한 분들이었다.
자연스레 도움을 구할 사람들을 떠올리고 믿을 수 있다는 건 큰 심적 안정감을 가져와 주었다.
“……그 와중에도 드물다고 하는군.”
선생님은 중얼거리며 날 내려다보더니 이내 알아서 하라는 듯 말씀하셨다.
“그래, 알겠다. 아무튼 축하하마.”
“감사합니다.”
“플래티넘과 더블 플래티넘 레코드 인증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는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 절반도 안 되는 나이에 나와 동급에 서겠군.”
진지한 이야기가 지나가고, 다시 구세프 선생님이 농담조로 음반 이야기를 해온다.
선생님과 동급이라니 당치도 않다.
게다가 지금은 CD가 예전에 비해 훨씬 덜 사용되므로 덩달아 인증 조건도 엄청나게 완화된 상태다.
“선생님 땐 기준이 훨씬 높지 않았나요?”
“그렇긴 하지.”
“그럼 아직 한참 멀었어요.”
실력도 지혜로움도 모든 것이 난 여실히 부족하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자각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언제나 보고 배울 수 있는 분들이 가까이에 계시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느긋하게 이야기하자 선생님은 피식 웃었다.
“내 때도 너 같은 피아니스트는 드물었다. 타티아나.”
약간 들떠 있던 마음이 거세게 뛰었다.
지금 그 말은 아마 선생님이 내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