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76화 (976/1,277)

##  976화

그렇게 악보와 음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냐.”

지나가던 학생 한 명이 구세프 선생님에게 인사했고, 그제야 난 복도에 서서 오래 이야기할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오후엔 레슨실에 계실 거죠?”

“그래야지.”

“그럼 레슨실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

금방 반에 들렀다 갈 생각으로 그리 말하자 선생님은 오늘은 조금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지 마라. 레슨이 있으니까.”

“정말 잠깐이면 되어요.”

“……고집하고는.”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점심시간이니 잠깐 정도는 괜찮다는 의미였다.

물론 나도 선생님의 시간을 많이 뺏을 생각은 없었다. 선생님의 오후 스케줄도 빡빡할 테니까.

나도 모르게 조금 서두르게 된다. 얼른 인사하고는 난 도로 계단을 내려와 반으로 향했다.

그리고 챙겨야 할 것들을 챙겨서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실로 향했다.

선생님도 금방 들어오셨는지 이제 막 책상 위를 정리하고 있다가 날 돌아보셨다. 할 게 있다면 빨리 하란 눈빛이다.

얼른 가지고 온 물건을 건네드렸더니, 선생님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뭘 보여주려고 기다리라 하나 했더니, 뭐냐 이건?”

“소치에서의 선물이죠.”

내가 사온 건 지갑에 넣을 수도 있는 카드형 멀티툴이었다.

카드만 한 사이즈이지만 철제로 되어 있어서 여러 용도로 쓸 수 있다.

이제 박스 테이프를 잡아 뜯으시거나 병따개가 없어서 병뚜껑을 책상에 걸쳐놓고 손으로 내리쳐 따시는 일은 없겠지.

선생님은 선물을 이리저리 돌려보셨다.

별것 아닌 물건이지만 한눈에 봐도 유용할 거란 걸 느끼셨는지, 꽤 마음에 드신 모습이다.

그 앞에서 내가 싱글벙글 웃으며 반응을 기다리고 있자, 선생님은 툭 말씀하셨다.

“원 참, 누가 이런 거 가져오라 했나.”

구세프 선생님은 항상 심술궂으신 건 아니지만, 이렇게 잔뜩 기대하고 있으면 쉽게 원하는 대로 해주시는 분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도 괜히 퉁명스러우시지만, 내심 좋아하시기에 이러신다는 건 이미 잘 안다.

아마 정말로 마음에 안 드셨다면 반대로 고맙고 잘 쓰겠다고 하시겠지. 선생님은 원래 그런 분이다.

그 모든 것을 잘 알면서도 난 장난을 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줬다가 뺏으려는 건 아니지?”

“아하하.”

선생님은 절대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듯 바로 지갑을 꺼내선 내가 준 선물을 집어넣었다. 난 안도하며 웃었다.

그제야 선생님은 더 퉁명스럽게 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아셨는지 비스듬하게 책상에 걸터앉았다.

“이런 건 어떻게 살 생각을 한 게냐?”

별로 특이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가격도 안 비싸고.

난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멀티툴을 싫어하는 남자는 없다고 들었거든요.”

“뭐……?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는데?”

“아나스타샤요.”

“아…… 그래.”

뭔가 당황해하던 선생님은 여전히 멀뚱멀뚱 서 있는 날 보더니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지 손을 휙휙 저었다.

“줄 거 다 줬으면, 가봐라.”

“그렇긴 한데…….”

“뭐냐?”

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번 에르네스트의 곡을 연구하면서 살짝 확신이 없는 부분이 있는데, 선생님에게 도움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

원래는 짧게나마 레슨을 요청할 생각이 없었다. 점심시간엔 선생님도 쉬어야 하니까. 선물만 드리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레슨실에 들어온 순간, 선생님의 눈빛을 보자마자 난 알아차렸다.

이미 선생님은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길 기대하고 계시다는 걸.

그리고 그렇게 기대하고 계신 음악이 무엇인진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적당한 핑계와 타이밍을 생각해낸 다음 슬쩍 끼워넣자 선생님은 이번에도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뭔가 정돈되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레슨은 미하일에게 가지.”

“에르네스트의 지도 선생님께서 보시는 뷰가 어떤지 의견을 듣고 싶어서요.”

“……그럴 수도 있겠군.”

미하일 선생님에게도 당연히 레슨을 받을 예정이다. 내가 근래 연구 중인 곡들은 꽤 많으니까.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이 곡은 이미 악보를 받아 보시기도 한 구세프 선생님에게 부탁드리는 편이 효율적이다.

이렇게 멋대로 선생님들을 골라가면서 레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형편 좋은 일인가.

감사히 생각하다 보니 구세프 선생님이 그럼 와서 앉아 보라는 듯 손짓했다.

얼른 가라며 바깥쪽으로 젓던 손짓과는 정반대의 손짓이었다.

난 싱긋 웃으며 선생님이 손짓하는 피아노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래서, 어떤 부분이냐?”

“음…… 첫 주제 하이라이트 부분이에요. 한번 해볼게요.”

겨우 하루 정도 연구한 것에 불과했지만,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아 계속 붙잡고 있던 선율은 이미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고민하고 고안했던 해석들 역시.

이제 선생님은 하루 만에 내가 곡을 외워온 것으로 놀라거나 하시지 않는다.

당연한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주려고 하실 뿐이었다.

***

구세프 선생님에게 짧은 레슨을 받고 나선 곧장 미하일 선생님을 찾아갔다.

다행히 오늘 미하일 선생님은 첫 레슨이 없어서 꽤 느긋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선물도 전해드렸다.

책상에 전시할 수 있는 작은 모빌이었는데, 선생님은 마침 책상 인테리어를 바꿔볼 생각이었다면서 마음에 들어하셨다.

차를 마시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음반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난 네가 두 번째 음반은 내지 않을 줄 알았단다.”

“……예?”

당황한 내가 바라보자 선생님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냐고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난 네가 첫 음반을 무명으로 내겠다고 결정했다고 했을 때, 그걸로 끝낼 작정이라고 생각했지.”

“전…….”

“아, 물론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은 계속되겠지? 하지만 라이브 연주자로만 살아가지 않을까, 그렇게 느꼈단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라서 조금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선생님도 아무 근거 없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아니었다. 확실히 재작년의 나는 그렇게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합심해서 무명으로 음반을 낸 건, 만약 영생하게 되더라도 내 음악을 영생하게끔 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내 이름까지 함께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늘 내겐 잠재되어 있었다. 때문에 음악만으로 평가받고 싶단 욕구가 있었고.

하지만 이젠 그런 생각이 별로 없었다. 앞으로 미래가 어찌될진 모르겠지만, 이제 검은 새와 나는 영원히 함께다.

때문에 난 첫 번째로 낸 음반까지도 모두 내 이름 아래에 예속시킨 것이다.

원래는 이럴 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예상외인 것은 미하일 선생님이 아니라 바로 내 쪽이었다.

“선생님께서 느끼신 부분이 정확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선생님은 자신이 옳았음에 기뻐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나아간 길을 보며 인정해주실 뿐이다.

“하지만 네가 이제 그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걸 보니,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선생님…….”

“잘되었다. 타티아나.”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같은 프로그램 구성으로 음반을 내겠다고 했을 때, 이미 선생님은 내 변화를 눈치채셨을 것이다.

하지만 한 말씀도 않으시고 그저 응원만 해주셨던 것이다. 날 믿었기 때문에.

알아차리신 시점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

그저 지켜보다가 문제가 생길 것 같다면 잡아 준다. 그게 미하일 선생님의 방식이었다.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네 음반에 대해선 내가 도와준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렇지 않아요…….”

“괜찮다. 타티아나. 그보다 음반이 굉장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기뻐하지 그러니.”

약간 감성적이 된 내가 할 말을 못 찾아서 두리번거리자 미하일 선생님은 그럴 것 없다며 농담조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작은 캔 음료를 꺼내선 내게 건네주곤 건배를 제안했다.

건배를 하고 나선 칭찬의 연속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세운 기록들이 정말 전무후무할지도 모른다면서 앞으로도 내가 음악가로서 살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하셨다.

그런데 솔직히 난 그런 기대까진 없었다. 여전히 현실감이 그리 들지 않기도 했고.

“오늘은 스튜디오에 가보겠구나?”

“예, 그러려고 해요.”

일단 스튜디오에 가서 다시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감이 좀 날까?

미하일 선생님과의 면담도 끝나고, 원래 하려고 했던 대로 스터디룸에 잠깐 들러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공부를 봐주었다.

그리고 사실 별일 없으면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계속 피아노를 붙잡고 있는 것이 내 일과였는데, 오늘은 일찍 학교에서 나왔다.

일찍 나온 내가 바로 집으로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 빅토르가 물었다.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스튜디오로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아, 그 전에 잠시 백화점에 들를 수 있을까요?”

바로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만나볼 생각이지만, 미리 연락을 하진 않았다.

난데없이 찾아가서 조금 놀라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맨손으로 갈 수가 없다. 이미 그를 위한 기념품도 사오긴 했지만, 당장 오늘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닐 테니까.

그래서 난 백화점에서 샴페인 한 병과 음료를 구매했다. 물론 주류를 내가 살 수는 없어서 빅토르가 대신 사주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날 보고 점원이 미심쩍은 눈빛을 하긴 했지만, 어차피 내가 마실 것도 아니니 난 양심상 거리낄 것이 없었기에 떳떳했다.

“이제 스튜디오로 가죠.”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그렇게 보이나요?”

실제로도 난 꽤 들떠 있었다.

지금까진 음반 실적을 가지고 계속 칭찬만 받았는데, 그럼에도 그게 완전히 현실감있게 내게 다가오진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한 것이 재작년의 음악을 보다 더 완성도 있게 반복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결과물엔 나 역시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지만, 음반의 실적을 신경 쓸 사람은 내가 아닌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표트르였다.

때문에 이번에 두 사람을 만나면 내가 앞장서서 성공을 축하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스튜디오에 도착할 즈음, 난 뭔가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뭔가 길가에 차도 많고…… 사람들도 많다.

“……?”

이 부근은 원래 한적한 곳이라서 사람들이 많지 않다. 이 열기는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그렇게 의아함을 느끼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빅토르가 그 근처로 서행하는 사이 난 스튜디오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바로 여러 곳에서 온 기자들과 음악계 관계자들인 것이다.

심지어 스튜디오 건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보니 지금 저 안에도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빅토르가 넌지시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난 약간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냥 지나쳐 주세요.”

지금 바로 저 한가운데에 던져져서 아무렇지도 않을 자신이 없었다.

분명 음반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질 텐데 그에 대해 어느 정도 대답을 할 순 있다고 해도, 그 전에 프로듀서와 조율해야 할 부분들도 있었기에 나 혼자 멋대로 다 이야기할 수 없었다.

비로소 현실감이 확 든다.

그냥 도로를 쭉 달리길 한참 지나서, 신호등에 걸려 차가 멈춰 서자 빅토르가 내게 말했다.

“현명하셨습니다.”

“그런 건……. 글쎄요.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알아본 것 같았는데요.”

“아마 알아봤을 겁니다.”

“하…….”

이 방탄 차량은 겉보기에 최대한 일반 승용차와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생김새나 크기가 다르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차량은 아니었다.

눈이 밝고 눈치가 빠를 기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내가 한숨을 쉬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 빅토르가 웃었다.

“그래도 지금 바로 마주하지 않은 건 잘하신 겁니다. 이제 연락이 온다면 전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그렇게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조용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으로 모실까요?”

아무래도 빅토르에겐 내 마음을 읽는 초능력이라도 있나 보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게 부탁해요.”

그리고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밖으로 어떻게 불러내야 할지 메시지 내용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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