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77화 (977/1,277)

##  977화

마카로프는 삐딱하게 기운 채로 이야기를 들었다.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예전 음반들도 모두 들어 봤습니다. 평소 함께 하시던 작품들의 방향성과 이번에 라예프스키 레코즈와 합작하여 추진하신 음반의 방향성이 조금 다르다고 느껴지는데요, 혹시 답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체 무슨 질문인지도 잘 모를 질문을 받으며 마카로프는 인상을 찡그렸다. 눈앞에 마이크가 가까이 있었다.

제발 좀 부탁이니 음반을 다 들어 봤다느니 하는 헛소리 좀 집어치우고 나가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저 영세 음반사의 사장이 아니었다.

신년이 밝자마자 클래식계를 뒤흔들어 놓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데뷔 음반을 기획하고 제작한 프로듀서인 것이다.

그가 성격대로 말을 하고 기자들을 모두 내쫓아 버린다면 그건 그대로 타티아나의 평판에도 영향을 끼친다.

노련한 마카로프는 그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강제로 모두 몰아내지도 못하고 기자들의 무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애초에 신년 연휴에 맞춰서 음반을 낸 건 며칠간 인터뷰나 답변을 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무명 음반과의 연관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사실 파악과 루머 등을 양산해 낼 것이다.

그것을 바로 해소시켜 주지 않고 잠시 내버려 두는 쪽이 이슈가 되기 좋다고 제안한 것은 바로 표트르 쪽이었다.

머천다이징에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그는 글로벌 대형 음반사를 이끄는 사람인 만큼 어떻게 해서 상황을 가장 효율적이고 유리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표트르의 기획에 따라 음반을 냈고, 연휴 사이 증폭된 이슈는 일주일 만에 판매량 3만 장과 기자들의 방문을 만들어 냈다.

이제 그걸 감당해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

하지만 연휴 사이 아예 모든 연락을 차단한 타티아나 대신 인터뷰 상대로 붙잡혀선 맞지도 않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해 대는 건 정말 익숙해지기 어려운 일이었다.

타티아나가 돌아와서 오늘 학교에 갔다면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해 봐야 그다음 방침을 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타티아나의 개인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지금 전화를 하기에도 애매했다.

직접 보여 주고 나눌 말이 많으니 만나자고 하기엔 기자들이 너무 많았고, 어디 몰래 숨어서 전화로만 이야기하자니 어른으로서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마카로프는 이 복잡한 상황을 어느 정도나마 정리하고 나서 타티아나를 불러내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 대충이나마 기자의 질문에 답변해 주고 있을 때였다.

[잠시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런데, 혹시 제가 있는 곳까지 와 주실 수 있나요?]

타티아나로부터 온 메시지를 보고 마카로프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이 상황을 전부 꿰뚫어 보고 있기라도 한 건가?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음.”

궁금해하는 기자에게 대충 둘러대며 마카로프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답변했다.

그러자 다음으론 타티아나가 지금 있는 곳의 주소를 보내왔다.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 리셉션 룸이었다.

“미안하지만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야겠습니다. 잠시 나가 봐야 할 일이 있어서.”

“아, 혹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양입니까?”

“아뇨.”

처음으로 나온 정확한 질문이었지만 마카로프는 그것을 부정하고는 외투를 입었다.

그가 스튜디오의 불을 다 꺼 버리자 기자들도 별수 없이 물러났다.

주차장에서 차를 뺄 때까지만 해도 혹시 따라붙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살펴야 했지만, 마카로프의 행적 하나하나를 쫓아다니며 추적할 필요까진 없는지 그런 분위기는 없었다.

어차피 스튜디오에 매여 있는 사람인 건 뻔하니까 언제든 찾아오면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마카로프는 피식 웃고는 시동을 걸고 타티아나가 가르쳐 준 주소로 향했다.

타티아나와 만나 나눌 대화를 생각하며 미리 꽃을 사기도 하고, 설명해 줘야 할 것들 역시 정리하다 보니 호텔까지 가는 시간은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다.

도착한 호텔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그냥 대화를 하는 것이라면 카페 같은 곳에서도 가능하겠지만, 타티아나는 되도록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곳을 제대로 고른 듯했다.

발레파킹을 거절하고 직접 주차한 뒤, 호텔 안내 데스크로 가서 이름을 대자 바로 컨시어지가 따라붙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마카로프는 컨시어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런 호텔의 리셉션 룸은 보통 기업들이 회의하거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라서 평소 그가 갈 일은 전혀 없는 곳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가도, 가만 생각해 보면 타티아나는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영애이고 자신은 어쨌든 간에 음반사 사장이니 그럭저럭 자격은 되는 느낌이었다.

도착한 층엔 다양한 크기의 비즈니스용 리셉션 룸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엔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콘퍼런스 홀 만한 곳도 있었는데, 타티아나가 고른 곳은 서너 명 정도가 대화를 할 수 있는 적당한 곳이었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

나무를 쓴 무게감 있는 인테리어에 은은한 조명이 그 깊이를 더한다.

어떤 장식도 절대로 부족하거나 과하지 않았다.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과 의자들 모두 최고급품임이 분명해 보였다.

아마 다섯 살짜리도 이곳에선 마음대로 뛰어다니지 못하고 차분해지지 않을까.

심리 치료용으로 사용해도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 가운데 의자에 타티아나가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보고 있던 그녀는 마카로프를 보고는 자세를 바로 하며 인사했다.

“오셨어요?”

“아, 타티아나.”

그녀를 못 본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그사이 어딘가 많이 달라진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평범한 교복을 입고 있으니 특정해서 칭찬하기도 애매하고.

한참을 그 이유를 고민하던 마카로프는 마침내 가장 적합한 인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늦었지만 열일곱 살이 된 것 축하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여기.”

다가가 꽃다발을 건네자 타티아나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너무 예뻐요.”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여러 가지로.”

생일도, 음반도 모두 축하한다는 의미였다.

타티아나에겐 여러모로 뜻깊은 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꽃을 품에 안고 있던 타티아나는 그 향을 들이쉬는가 싶더니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야말로요, 프로듀서.”

타티아나가 한 손을 내밀어 왔다. 일으켜 달라는 건가?

평소 이런 부탁을 하지 않는 그녀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마카로프는 그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랬더니 타티아나는 약간 당황한 것 같았지만, 제대로 일어서선 손을 놓지 않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제야 마카로프는 그녀가 악수를 청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번엔 역으로 당황한 마카로프가 혼란스러워하자 타티아나가 미소를 지었다.

“프로젝트의 성공 축하드려요.”

“성공은…… 타티아나가 잘해준 덕분이죠.”

“후후, 여기저기서 제 음반으로 떠들썩하긴 하더군요.”

역시 휴가 중에 모든 연락을 끊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할 순 없었다.

그렇게 담담하게 세상에서 뻗어 오는 시선을 마주하는 듯 서 있던 타티아나는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마카로프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지만 제가 이 정도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건 마카로프께서 추구하던 염원에 저와 함께하고 싶다고 해 주었기 때문이에요.”

마카로프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도 많고 우연찮게 만난 음악가들이다.

그런데도 바라고 있는 것이 비슷하다는 건 처음부터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타티아나는 방법을 몰랐고, 마카로프에겐 음악이 없었다.

때문에 이해관계가 맞은 두 사람이 음악과 방법을 모은 것이 바로 지금의 결과인 것이다.

타티아나는 그 모든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 깜짝 놀랄 정도로 사려 깊은 면모를 보이곤 한다. 마카로프는 간신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아니었어도 타티아나는 음반을 냈을 겁니다.”

“글쎄요, 아마 콩쿠르가 끝난 뒤에도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결국 대형 음반사의 표준 기획에 따라가지 않았을까요?”

“설마요.”

“설마가 아니에요. 전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에요.”

무명 음반이라는 방법을 타티아나가 알지 못했더라면 아마 음악을 손에 쥐고는 헤매는 기간이 꽤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지닌 구도자적 기질이 곧 숙고와 인내 그리고 배회의 성질을 함께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마카로프는 작은 스튜디오에 못 박혀 시간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두 음악가가 만난 건 운이 정말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짚으며 타티아나는 기쁘게 웃더니 옆으로 손을 뻗었다.

“앉으세요.”

의자는 보기에만 고급스러운 것이 아니라 착좌감도 뛰어났다.

마카로프는 느긋하게 이곳의 분위기를 즐기며 비로소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기자들과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던 걸 생각하면 이곳은 천국에 가까웠다.

“조용해서 좋군요.”

“그렇죠? 사실 아까 스튜디오 앞까지 갔었어요. 그런데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도저히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요.”

상황을 꿰뚫어 보고 예견한 게 아니라 직접 와서 보고 갔었구나…….

그냥 들어오지 않고 이렇게 따로 불러낸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마카로프는 웃었다.

“시끄러운 건 싫어하시죠?”

“그렇긴 해요. 하지만 언제까지 피하고 다닐 건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절 찾는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가지 않도록 제가 매듭을 지어 둘 테니……. 아, 물론 프로듀서를 취재하려는 기자들은 환영이지만요.”

지금 이슈를 쫓아다니는 기사들은 몇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재작년 무명 음반과 이번 타티아나의 음반의 연관성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 타티아나 개인에 대한 관심사에 대한 인터뷰, 프로듀서를 파헤쳐 보려는 목적 등 다양한 포커스들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중에 마카로프를 향한 이목은 굉장히 적었다.

타티아나는 아마 그걸 조금 더 늘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마카로프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절 취재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 거절했습니다.”

“어, 왜요?”

“귀찮거든요.”

“아하하.”

짧게 이야기해도 충분히 알아듣는 모습이었다.

이미 마카로프가 인터뷰 욕심 등은 전혀 없고, 원하는 것은 거의 다 이루었다는 걸 타티아나는 잘 알고 있었다.

마카로프는 가지고 온 짐들을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타티아나가 흥미를 보이자 그중 종이 가방을 바로 그녀 쪽으로 밀어 주었다.

“음반 여유분 가지고 왔습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고마워요! 필요했었는데.”

“그리고 판매 현황에 대해서도 설명을 드려야겠군요. 여기…… 자료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보시죠. 아셔야 할 부분입니다.”

두 사람은 친구이기도 했지만 비즈니스적인 부분에 대해선 면밀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마카로프는 일전에 계약서도 쓰지 않고 타티아나와 음반 녹음을 하다가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총수에게 질책당했던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을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러시아 내에서 지난 연휴 동안 매출량과 그에 따른 인터넷 검색량 상승, 언론에서의 언급량 추이 등을 보기 좋게 정리해 놓은 자료들을 몇 개 보여 주었다.

타티아나는 직관력이 좋은 편이라 몇 가지 그래프들을 금방 읽어 내고는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미분값이 생각보다 천천히 낮아지네요. 저희가 아무 답변도 내지 않은 까닭일까요?”

“아마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예리한 안목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그녀에게 마카로프가 다음으론 태블릿 컴퓨터에 자료 화면을 띄웠다.

“글로벌 머천다이징에 대한 결과는……. 음, 이건 표트르에게 다시 요청해 봐야겠군요. 잠시 전화 좀 해도 되겠습니까?”

“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

“곧 오실 거라서요.”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타티아나! 우리들의 빛나는 태양!”

술이라도 한 잔 마신 게 아닌가 싶은 텐션으로 표트르가 들어왔다.

그에겐 이 방의 심리 치료가 전혀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타티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표트르.”

“그렇지 않아도 우리 축하연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곳 장소 좋군요.”

“조용한 곳이 필요해서요.”

“훌륭한 선택입니다. 아, 그렇지. 이거 받으시죠.”

그리고 표트르도 가지고 온 꽃다발을 타티아나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더 큰 걸로 하려다가 그건 다음에 또 하면 되지 않나 싶어서.”

“후후, 괜찮아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타티아나는 가볍게 웃으며 안고 있던 꽃다발을 다시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이제 슬슬 이야기해도 좋겠단 투로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만 축하받는 것 같은 분위기는 싫어서…… 저도 준비를 해 왔어요.”

“뭡니까?”

표트르가 관심을 보이며 고개를 쭉 뺐다. 타티아나는 의자 옆에 있는 가방에서 커다란 병을 하나 꺼냈다.

마개가 잠겨 있는 방식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샴페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텐션 높던 표트르가 눈을 빛냈다.

“샴페인이라니! 정말 제대로 준비해 오셨군요, 타티아나!”

“급하게 사 와서 적당한 것이긴 하지만요.”

“하하하, 그건 상관없……. 그나저나 타티아나, 올해 성인인 겁니까? 그럼 샴페인도 같이 한 잔 마셔야겠군요.”

“어…… 그건 사양할게요. 저 아직 열일곱 살이라서.”

“오, 그럼 어떻게 산 겁니까?”

타티아나가 나이를 속이고 샴페인을 구매한 건 아닐지, 그런 작은 일탈에 대한 에피소드를 기대하던 표트르는 그녀의 경호원이 대신 구매해 줬단 말을 듣곤 빠르게 차분해졌다.

농담 삼아 술이라도 먹여 볼 생각이었나 본데, 그랬다간 뒷감당이 쉽지 않으리란 걸 뒤늦게 깨달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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