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8화
표트르는 흥얼거리기까지 하며 샴페인을 땄다.
그 모습은 그를 처음 본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나와 오빠를 앉혀 놓고 음반 기획을 프레젠테이션하면서 표트르는 열정적으로 자신을 어필했었다.
지금도 잔뜩 텐션이 올라 흥분해 있는 건 음반의 성공이 고무적인 까닭이겠지. 난 그런 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잔을 준비했다.
샴페인을 막 딴 표트르는 약간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물었다.
“정말로 안 되겠죠?”
“안 돼요.”
나도 흥미가 없는 건 아니다. 약간 흐트러져도 상관없을 것 같단 생각도 있고. 하지만 단지 좋은 날이란 핑계로 멋대로 굴고 싶진 않다.
게다가 카페인에도 나약한 내 몸이 알코올엔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되기도 하고.
나중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실험이라도 해 봐야 하나.
내 몸을 가지고 하는 실험이라는 건 조금 무섭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아직도 난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럼 타티아나에겐 이걸 따라 드리죠.”
표트르는 내 앞에 주스를 따라 주었다. 세 명의 잔이 가득 차자 우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잔을 들었다.
경쾌하게 건배사를 외친 건 에너지가 넘치는 표트르였다.
“자. 우리의 빛, 타티아나를 위하여!”
“위하여.”
“위…… 아니…….”
아까도 태양이니 어쩌니 했을 땐 모르쇠로 웃으며 넘겼지만, 자꾸 이런 부끄러운 수사를 붙이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머뭇거리며 잔을 마주치자 표트르가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었다. 이 사람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잔을 한 번 비우고 나자 표트르의 목청이 더 커졌다. 술이 약한 사람은 아닌데, 분위기에 취해 버린 모습이었다.
“정말 좋은 날이군요. 물론 앞으로도 이런 날들만 있겠지만.”
난 물끄러미 표트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번 음반의 판매 기획에서 큰 부분을 담당하고도 거기에 대한 수익은 전혀 손대지 않고 모조리 내놓았다.
때문에 음반이 아무리 성공적인 기록을 남기더라도 그가 얻어 낼 수 있는 건 이름값 말고는 전무했다.
이미 여기에 대해선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표트르는 브랜드 가치라는 것 역시 중요하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기에 나로선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진심으로 이렇게 기뻐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조금 움찔거리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잔 더 해야겠군요. 마카로프도?”
“그보단 음반 이야기를…….”
“그건 술 마시면서 해도 되니까. 자.”
“나 참…….”
마카로프는 조금 난처한 듯 내 눈치를 살폈다.
아마 그가 바라는 건 표트르와 함께 체계적으로 자료들을 놓고 내게 설명해 주는 것이었겠지.
이 리셉션 룸은 그런 비즈니스적 목적으로 쓰기에 딱 좋은 분위기이기도 하고.
그러나 애초에 내가 여기 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 건 어떠한 보고를 받거나 설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잔뜩 고생해 준 내 사람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난 신경 쓰지 말란 뜻으로 웃어 보이며 아예 인터폰을 들고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그제야 마카로프도 피식 웃으며 잔을 들었다.
잠시 후, 룸서비스가 들어왔다.
메뉴 같은 건 잘 몰라서 샴페인이 있다고만 이야기했을 뿐인데 이 분위기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치즈 카나페와 새우 요리 등이 들어왔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와인 향기와 잔뜩 들떠서 이야기하는 목소리, 그리고 테이블 위의 아기자기한 요리들까지. 회의보다는 작은 파티를 하는 느낌이었다.
난 이런 분위기도 좋아했기에 그냥 오늘은 이렇게 보내도 상관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분위기에서도 적절한 타이밍을 틈타 표트르는 프로다움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자…… 그러면 기분 좋게 이야기를 계속해 볼까요? 오늘 아침까지 수집한 글로벌 통계를 보여 드리죠.”
그러면서 표트르는 노트북을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즉석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파티 도중에 갑자기 설명을 시작하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난 마치 빨려 들어가듯 표트르의 설명에 집중했다. 그가 준비한 자료와 설명은 한눈에 알아보기 쉬워 정말 좋았다.
“이런 높은 숫자를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요.”
그러면서 표트르는 계속해서 날 칭찬하고 추켜세우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그것도 여기 두 사람이 유능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표트르가 준비를 잘해 주신 덕분이죠.”
“전 정확하게 수요와 타당성을 따져 계산했을 뿐입니다.”
조금이나마 표트르에게 초점을 돌려 보려 했지만 그는 도저히 듣질 않았다.
난 결국 포기하고 일단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수밖에 없었다.
“유럽뿐만이 아니라 북미에서의 반응도 예상했던 것 이상입니다. 제가 미리 알아본 바로는 재작년의 음반이 리핑되어 북미에도 흘러 들어갔다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 때문인지 이젠 북미의 리스너들이 재작년 음반도 실물을 구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다고 합니다. 현지의 바이어들과도 긴밀히 협상 중인데…… 재발매에 대해선 타티아나가 잘 생각해 봐야 할 일이라 봅니다.”
그 이야기는 구세프 선생님에게 이미 들었던 이야기였다. 재작년의 내 중고 음반이 프리미엄이 붙어서 팔리고 있다고.
되도록 많은 사람이 내 음악을 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에 난 그런 과도한 경쟁은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소유욕이 내게 향하고 있다는 건 약간 묘한 기분이었다.
재발매에 대한 의견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해 보고 있는데, 표트르는 당장 답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죠. 무엇보다…… 이건 타티아나의 팬덤이 제대로 생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난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음반 발매 후 어떤 마케팅을 벌일 것인지 약속했던 것들.
그땐 날 상품처럼 취급하려고만 든다는 것에 거북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가 내게 그런 바람이 없음을 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선보이고 싶다는 마음만은 같다.
음반을 취급하는 사업을 하는 이유 중 가장 순수한 이유를 꼽자면 아마 그 부분이 아닐까.
표트르는 낮게 웃었다.
“아직 미성년자에 국제 콩쿠르 경력도 없는 피아니스트에게 말입니다. 그야말로 타티아나의 음악성 그 자체가 모두를 끌어들였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이미 먼 미래의 어딘가를 바라보듯 고개를 들며 말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가서 우승이라도 하신다면…… 그 후엔 어떻게 될지 정말 기대되는군요.”
이번엔 구세프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선생님은 이렇게 음반을 성공시킨 것도 단지 시작일 뿐일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콩쿠르에서 좋은 결과를 낸다면 이 이목이 한층 더 증폭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 표트르가 본 목적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종합해 보면…….’
표트르가 날 상품으로 보고 있지 않단 믿음은 있다.
보다 순수한 목적으로 날 대중들에게 보이고 싶단 마음 또한 이전보다 더더욱 강해졌음을 느낀다.
그리고 만약 그에게 진짜 목적이 따로 있고, 그것이 콩쿠르 후 만약 보다 많은 이목이 집중되었을 때 드러난다면 아마 그가 잘하는 마케팅에 관련된 무엇일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게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난 어지간하면 따라 줄 생각도 있었다.
“표트르.”
“예.”
“혹시…… 그 후엔 제게 바라는 것이 없나요?”
지금이라면 뭐든 좋으니 말해 달란 눈빛으로 바라보자 표트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지?”
“아…… 그게…….”
난 약간 당황했다.
지금까지 표트르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고, 난 그것을 잘 이해하고 믿고 있지만 음반이 이렇게나 성공했으니 그의 바람도 조금은 들어줘야 할 것 같단 기분이 들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을지 듣고 싶어졌다…….
그런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어떻게 들어도 그를 믿지 못하겠단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난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릿속에서 어휘력의 한계를 느꼈다. 뭔가 끼릭거리는 느낌마저 든다.
표트르는 가만 날 보더니 껄껄 웃고는 샴페인을 잔에 더 따르며 말했다.
“녹음하는 장면을 보는 것으로 이미 충분했다고 그렇게 말씀드렸건만. 아직도 오해하시는 것 같군요. 결과가 이렇게 나오고 나니 의기양양한 제가 말을 바꿀 것 같습니까?”
“아뇨, 아니에요. 그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시죠.”
잔을 모두 채운 그는 그것을 들어 올리더니 마치 허공의 무언가와 건배하듯 살짝 흔들었다.
“불신자였던 표트르는 죽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제가 자만하고 이 성공이 제 덕이라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건 온전히 타티아나가 연주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죠.”
장난기도 있지만 분명한 진심이 서린 그 목소리는 정면으로 마주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또렷하고 강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나이의 두 배도 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불신자였다니? 그럼 지금은? 난 어쩔 줄 몰라 쭈뼛거리며 팔을 매만졌다.
일부러 그러는 기색이 역력한 표트르가 다시 웃으며 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말의 뒤를 마카로프가 받았다.
“그 말엔 저도 동의합니다. 타티아나가 아닌 다른 연주자라면 절대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죠. 괜히 제가 무명으로 음반을 내는 방법을 그저 생각으로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역시 그 부분에선 마카로프도 생각이 같군요. 앞으로는 어떨 것 같습니까? 아마 무명의 음반들이 꽤 나올 성싶은데.”
“제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을 겁니다. 장담하죠.”
“저도 그건 장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두 사람이 합심해서 날 부끄럽게 만들어 죽일 셈인가 싶었지만, 사실 그건 무작정 날 치켜세우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니었다.
어떤 음반사가 무명 음반을 기획한다고 치더라도 유명한 프로 음악가라면 그런 걸 할 이유가 없고, 하더라도 예민한 청중들이 금방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아마추어를 기용하자니 검증되지 않은 음악으로 그런 음반을 내는 건 정말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카로프가 내게 제안했던 건 결코 쉽게 시도할 수 없었던 일인 것이다.
“…….”
어쨌든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날 자꾸만 칭찬하니까 어떻게 끼어들어 그만하라고 할 타이밍도 잡기가 어려웠다.
괜히 머뭇거리면서 치즈만 조금씩 떼어 먹고 있자니 표트르가 그럼 이렇게 하자는 듯 말했다.
“제가 정말로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해 봤자 아무래도 타티아나는 마음의 빚을 느끼는 것 같군요. 저도 그건 별로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결국 이런 부분에선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난 그에게 분명히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억지로 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뿐.
표트르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러면 작은 부탁이라도 해 볼까요?”
난 테이블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면서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들어드릴게요.”
“타티아나. 사람 좋은 건 좋지만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특히 저 같은 사람한텐.”
“……예?”
갑자기 진지해진 표트르에게 당황해서 되묻자 그는 어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뭐…… 음반에 관한 건 마카로프가 맡고 있으니까…… 연주회 같은 건 어떨까 싶긴 한데.”
라예프스키 레코즈가 주최하는 연주회를 열고 싶은 것이라면 얼마든지 메인 연주자로 나가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해도 좋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표트르는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콩쿠르를 앞두고 연주회를 제안할 정도로 정신 나가진 않았습니다.”
난 살짝 정신 나간 사람인 걸까?
물론 콩쿠르가 지금 내 시기엔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사이 연주회 준비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차피 무대에 설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만드는 게 좋지 않나?
어쨌든 할 말이 없어져서 물끄러미 바라보니 표트르가 이어 말했다.
“아니면 타티아나의 팬들을 위한 계획 같은 것도 좋겠군요.”
“그건 어떤……?”
“예전에 했던 이야기 기억납니까? 피아니스트의 손을 본뜬 기념품 같은 것을 만들 수도 있다고.”
청중들에게 연주자가 줄 수 있는 건 단지 음악뿐만이 아니다.
예전의 나는 음악이면 전부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에르네스트가 팬 서비스를 어떻게 하는지도 봐 왔고, 나도 여러 번 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음악이 아닌 친필 사인 등을 요청하는 건 이미 자연스러운 문화다. 그런 소유욕은 나 역시 가지고 있었으니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표트르는 그 점을 처음부터 부각하는 사람이었다.
프란츠 리스트가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마저도 그를 따르던 팬들에겐 높은 가격에 팔려 나갔다면서, 음악 말고도 무엇이든 팬 서비스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부분엔 이제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익숙해진 건 이제 겨우 사인과 사진을 찍는 일 정도였다.
손을 본뜬 기념품? 그런 건 들어 본 적도 없고, 진짜 유명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그런 걸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창피해 죽을 것 같다.
“손은 좀…….”
“거북합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지문이 있잖아요? 스마트폰도 지문으로 풀 수 있는 시대잖아요. 보안상 어떨지…….”
“오, 보안. 그것도 그렇군요.”
“그렇죠?”
“그럼 발은 어떨까요?”
“?”
아무렇지도 않게 표트르가 말했다.
난 순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가, 곧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장난치시는 거죠.”
“크크…….”
“제발 그만하세요.”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나도 이젠 모르겠단 의미로 고개를 돌려 버리자 표트르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제가 아는 방송국 PD로부터 부탁을 하나 받아서 말인데, 인터뷰 프로그램에 출연해 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부탁하려던 것이 있었잖아요? 표트르.”
“제 건 아니라서.”
표트르는 뻔뻔하게 이야기했지만, 그가 꽤 어렵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정도도 들어주지 못할 것이라면 애초에 뭐든지란 말 자체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