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79화 (979/1,277)

##  979화

개략적인 설명을 들어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프로그램이었다.

러시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MC가 인터뷰어로 나와선 한 시기에 주목받는 사람들을 초청해 인터뷰를 하는 방식이었는데, 나도 몇 번 봐서 어떤 프로그램인지 알고 있었다.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각 분야에서 유명하거나 그만한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시작하자마자 내가 눈에 띈 모양이다.

“그거 정말 유명한 프로그램이지 않나요……?”

“그렇긴 하죠.”

표트르는 PD의 부탁이라고 했지만 내게 직접 제안을 보내기 전 의사를 타진해 보는 느낌이었다.

아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직접 제안을 받았다면 조금 고민이 되었을 것 같다.

난 이미 텔레비전에 몇 번 얼굴을 보인 적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로 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건 아무래도 조금 부담감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피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음악만을 듣고 타티아나의 음반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걸 알아본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고 타티아나가 그저 따라 했을 뿐이란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희가 입장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죠.”

마카로프가 차분히 현 상황을 설명했다.

재작년에 낸 음반과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음반을 낸 것으로 이미 난 음악으로 할 수 있는 증명을 마쳤다.

당시에 존재했던 한계를 깨고 이룰 수 있는 음악을 분명하게 보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기자들과 만나 인터뷰를 한 번쯤은 해야겠단 생각이 있었는데,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라면 더 상황이 좋다.

게다가 표트르의 부탁이기도 하다면 더더욱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거기까지 판단을 마친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승낙을 표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하는 것으로 이해하셔도 좋아요.”

“생각을 조금 더 해 보셔도 될 건데요.”

“물론……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여쭈어볼 생각이에요.”

“…….”

아버지의 이름은 언제 어디에서 꺼내도 주변을 살짝 얼어붙게 만든다.

하지만 난 정말로 단순히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지간해선 내가 하는 일을 반대하지 않으신다.

“걱정 마세요. 허락해 주실 테니까.”

“그렇습니까?”

“떼써 볼게요.”

“푸하하하.”

농담조로 이야기하자 그제야 표트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 와인과 보드카가 더 추가되었고, 룸서비스도 더 들어왔다.

실시간으로 표트르가 제공받은 자료들이 다시 한번 화면에 띄워지고 에우테르페 레코즈와 내게 올 수익금의 이야기도 나왔다.

표트르는 그중 일부는 기부하는 쪽이 좋을 것이라 조언했고, 난 아예 전부 기부하겠다고 했다가 잔뜩 혼이 났다.

제발 말 좀 쉽게 하지 말라 하는데…… 애초에 모든 수익을 포기한 표트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싶긴 하다.

그렇게 우리 프로젝트에 대한 거의 모든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이미 시간은 2시간도 넘게 흘러 있었다.

“슬슬…… 저녁 시간이네요.”

슬쩍 말해 보면서 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분위기가 이렇게 좋으니까 괜찮다면 저녁 식사까지 함께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표트르는 그렇게까지 할 건 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오늘 이런 자리 마련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희 주정이나 들어 주면서 시간 쏟지 말고 돌아가서 좋은 소식 전해 주시죠.”

“주정이라뇨…….”

“저랑 마카로프가 했던 이야기 반복하는 것 듣는 것도 고역이지 않습니까?”

음반 제작자로 같은 업종에 있는 두 사람은 서로 공유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는 것도 많았고.

때문에 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꽤 즐거웠는데, 표트르가 보기엔 굳이 그럴 것까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붉어진 얼굴로 웃어 대는 표트르를 보니 확실히 취하긴 취한 것 같았다.

애초에 이곳에 오기 전부터 약간 흥분해 있는 상태이기도 했고.

돌아가는 건 어떻게 가려는 걸까.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표트르는 딱 잘라 이야기했다.

“그런 것까지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뭐, 정 안 되면 마카로프와 밤새 이야기하다가 여기서 자고 가죠. 호텔 아닙니까?”

“아, 그러면 제가 방을 잡아 드릴…….”

“그럴 필요 없대두. 하하하.”

진짜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옆을 보니 마카로프가 그냥 가도 괜찮다는 듯 눈짓했다. 그나마 그는 덜 취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표트르의 말대로 정말 밤을 새워도 넘칠 정도로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더 오갈지 궁금한 마음이 있긴 했지만, 내가 계속 여기에 있는 건 방해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내가 옆에 있으면 조금이나마 신경 써 준다는 것이 느껴지니까.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 봅시다. 타티아나.”

“제가 전화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 다 손을 흔들며 날 배웅했다. 난 외투를 챙겨 입다가 말고 휙 뒤돌아선 잔소리하듯 말했다.

“술은 너무 많이 드시지 말고요.”

“푸하하하. 정말 걱정하는군요?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무엇이 그리 웃긴지 표트르가 껄껄 웃었다. 마카로프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을 두고 밖으로 나오자 엘리베이터 앞쪽에 서 있던 컨시어지가 날 보고는 다가와 물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필요하신 것이라도?”

“아뇨, 전 이만 가 보려고 해요.”

그럼 엘리베이터로 에스코트하겠다는 듯 컨시어지가 팔을 펼쳤다. 그런 그에게 난 에스코트 대신 다른 것을 부탁했다.

“가기 전에 부탁하나 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안에 계신 두 분은 더 계실 예정인데,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하거나 오늘 이곳에서 머물겠다고 한다면 그 비용은 모두 제게 청구해 주세요.”

표트르는 그러지 말라고 딱 잘라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내 멋대로 해도 괜찮지 않나 싶다.

혹시 카드를 맡기기라도 해야 하나 했는데 컨시어지는 별다른 말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내게 청구할 수 있는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그 외의 것은?”

“……오늘 서비스 정말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필요 없다고 대답하는 대신 칭찬을 건네자 그는 기분 좋게 웃었다.

***

10학년 1학기 기말고사 마지막 날.

이미 일주일간의 시험으로 학생들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얼마나 밤샘을 했는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고, 발렌티나도 한데 묶은 머리카락이 잔뜩 상해 있었다.

“마지막엔 뭐라고 쓴지도 잘 모르겠네.”

“나도…… 내가 아는 건 하나뿐이던데.”

“뭔데?”

“내가 모른다는 것.”

뭔가 철학적인 이야기들이 오갈 정도로 많이 힘들어 보인다. 뒤쪽을 보니 안드레이도 비슷한 절망에 빠져 있었다.

라리사는 그나마 표정이 조금 좋아 보였다. 눈이 마주치니 그녀가 웃어 보였다.

내가 그녀에게 시험 기간 동안 공부를 몇 번 가르쳐 준 것이 효과를 조금이라도 본 것 같아 다행이었다.

조금 안도하면서 그 옆을 보니 리처드와 한승우는 서로 격렬하게 무언가 토론 중이었다.

안 봐도 어떤 문제에 대해서 주고받는 것 같았는데, 모쪼록 둘 다 좋은 점수를 받았으면 한다.

그리고 창가 쪽에 앉은 에르네스트.

“…….”

그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몸을 뒤로 기울이고 앉아선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었다.

시험 기간에도 에르네스트는 그리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벼락치기라는 것 자체를 안 한다는 뜻이었다.

나 역시 평소에 공부를 미루지 않고 하는 편이니 그 부분에선 나와 비슷하지만…… 그래도 난 시험 기간엔 조금 늦게까지 공부를 하는 편이다.

에르네스트는 기억력이 훨씬 뛰어난 면이 있어서 시험 기간에도 일찍 잔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결과는 재 봐야 아는 법이다.

난 이번 학기에도 절대 그에게 질 마음이 없었다. 모든 답변은 최선을 다해서 써 냈고, 아마 꽤 고득점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자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이쪽으로 휙 돌렸다.

난 얼른 모른 척 다시 다른 아이들과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에게 가서 시험은 잘 보았냐고 물어보면 될 일이라는 건 알지만, 반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았다.

그때, 바르바라가 갑자기 책상을 탕 치며 소리쳤다.

“다들 왜 그렇게 앓는 소리야? 뭐가 어쨌든 간에 시험은 끝났잖아! 진급이야 뭐 어떻게 되겠지!”

정말 밑도 끝도 없는 발언이었지만 어쨌든 그 말에 힘을 얻은 아이들이 꽤 있는 듯 보였다.

“그건 그래. 지금 교무실로 쳐들어가서 답지를 다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시험 한두 번 쳐 보나.”

노련한 10학년들이 시험 스트레스에서 빠져나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젠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분위기는 교실을 소용돌이치며 모두를 휩쓸리게 했다.

기류를 탄 안드레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난데없이 복도로 난 창문을 열고는 자신의 교과서를 던져 버렸다.

그 충격적인 행동에 난 깜짝 놀랐지만 안드레이는 약간 실성한 사람처럼 웃더니 다른 교과서들도 꺼내 오기 시작했다.

학기말 시험이 끝났으니 이제 볼 필요가 없는 교과서들이긴 하지만……. 차라리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게 좋은 걸까? 적어도 불을 붙이거나 하고 있진 않으니까.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고 넘어가려던 차였다.

“방금 책 던진 녀석 누구냐!”

갑자기 교실 앞문이 벌컥 열리면서 선생님 한 분이 호통을 치셨다.

모두 기겁해서 선생님을 바라보았지만 그래도 아무도 안드레이를 지목하진 않았다. 피아노과 10학년의 우정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우정의 힘은 5초 정도밖에 가지 않았다.

선생님이 복도에 떨어진 교과서를 주워들고는 정확하게 안드레이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따라와라. 방학 동안 봉사 활동을 그렇게 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선생님……! 제발!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봐요!”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안드레이가 끌려 나가고, 교실엔 적막이 감돌았다.

그 사이로 바르바라가 툭 내뱉었다.

“그나저나 말이 나와서 말인데, 방학엔 뭐 할 거야? 다들.”

끌려간 안드레이가 불쌍하긴 하지만 그것도 결국 자업자득이었다. 우린 우리의 방학을 즐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2주 정도의 짧은 겨울 방학이지만 이미 계획이 확실하게 짜여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타티아나, 너는?”

“예?”

갑자기 발렌티나가 물어보았다.

딱히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음반 때문에 필요한 활동이 있다면 하고, 아니면 콩쿠르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별로…… 없어요.”

“그럴 리가? 네 음반이 지금 얼마나 난리인데? 지금 중요한 때 아니야? 어디서 오라는 데 없어?”

발렌티나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내게 접촉해 오는 사람들은 꽤 있었다. 기자들도 있고, 음악가나 평론가들도 있고. 하지만 내가 학기말 시험 기간이라는 것을 다들 이해해 주는지 나중을 기약하고는 그 이상 무언가 제안하거나 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이젠 시험이 끝났으니 다시 연락이 올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얼마 전 표트르가 했던 제안이 떠올랐다.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하는 발렌티나에게 살짝 말해 주었다.

“저…… 어쩌면 방송에 나갈지도 몰라요.”

“응? 뭔데?”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프로그램의 이름을 말해 주자 발렌티나는 거의 기절할 듯 놀랐다.

“뭐? 정말!?”

“예.”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해!!”

“무슨 이야기니?”

발렌티나가 펄쩍 뛰자 아나스타샤도 궁금해졌는지 끼어들었다.

난 아직 촬영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괜히 먼저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어서 두 사람에게만 속닥이듯 이야기했다.

두 사람도 비밀 이야기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언제?”

“그게…….”

문제는 정확한 날짜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필요한 이슈에 따라 인터뷰를 하는 프로그램이니 아마 조만간이란 생각은 있지만 표트르는 처음 제안한 이후로 별말이 없었다. 이래서야 나도 알 도리가 없다.

모르겠다고 하면 발렌티나가 어마어마한 핀잔을 보내 올 것 같단 느낌에 어떻게든 둘러댈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메시지가 하나 왔다.

그걸 읽어 본 나는 발렌티나에게 대답할 수 있었다.

“모레 녹화예요.”

“시험 끝나자마자? 준비할 시간 너무 없지 않아?”

그러게요.

난 당장 이틀 사이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시험으로 가득 찬 머리를 다시 돌려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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