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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80화 (980/1,277)

##  980화

표트르에게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듣고 난 후부터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그리 당황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레 촬영 예정이라고 하면 조금 갑작스럽다.

그도 최대한 시험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알려 주기 위해 점심시간을 틈타 메시지를 보내 준 것 같았다.

난 조용한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빈 연습실로 들어가 표트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타티아나. 시험은 잘 쳤습니까?

첫인사부터 역시 시험에 관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 시기의 학생들에게 향할 관심사라곤 그런 것이겠지. 난 낮게 웃었다.

“잘 봤어요. 통화 괜찮나요?

-물론입니다.

그는 전화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흔쾌히 대답했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메시지 봤어요. 모레라고 하셨는데…… 시간이 많지는 않네요.

-아, 미안합니다. 시험이 끝나고 가장 빠른 일정이 그렇다 하더군요. 원래는 시간을 꽤 두고 섭외를 하지만…… 타티아나는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혹시 바로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딱히 표트르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이 이야기를 아예 처음 듣는 건 아니었으니까.

일정이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마음의 대비 정도는 충분히 할 만한 시간이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는 것도 이미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내 목소리에서 약간의 흔들림을 느꼈는지 표트르가 넌지시 제안했다.

-어렵다면 미뤄도 됩니다. 다음 주나 다다음 주 정도로.

“이미 미룰 만큼 미룬 것 아닌가요?

-그렇긴 하죠. 벌써 1월 말이니까.

음반을 낸 것이 12월 31일. 그러고 나서 일주일은 신년 연휴였고, 지금까지 난 학기말 시험에 집중해야만 했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지금까지 나와 에우테르페 레코즈는 쭉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청중들에게 감상과 평가를 맡기겠다는 듯.

그사이 내 음반에 대한 평론이 뜨겁게 오갔고, 지금도 식지 않고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표트르는 지금이 최적의 시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생각도 비슷했다.

시간을 더 지체해서 2월로 넘어가 버리면 그동안 왜 침묵하고 있었냔 말에 대답하기가 어려워진다. 시험이 막 끝난 지금이 적기였다.

“진행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어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죠?

내가 결정을 내리자 표트르가 잘되었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아, 그럼 제가 PD에게 전화를 드리라 전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직접 이야기를 해 보시는 편이 낫겠죠. 전화번호는…… 이 개인 번호 말고 공용 번호로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겠어요?

그렇게 PD와 연결까지 해 주고 나면 이후 표트르가 할 일은 없다. 모두 내게 넘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표트르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사과해 왔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미안합니다. 타티아나.

“후후, 괜찮아요.

난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겐 내게 무언가 부탁했단 것 자체가 약간 후회로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그건 내가 몇 번이고 거의 조르듯 말한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내가 감당해야 할 문제다.

그가 내 음반 일에 아무 노림수 없이 뛰어들어 일해 주려 했다는 그 진심에 대한 의심은 전혀 없다.

저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났던 표트르와 지금의 표트르는 분명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니까.

그러니 이건 내가 반대로 그에게 미안함을 느끼기에 하는 일이다.

간단하게 그리 생각하니 조금 더 의욕이 생겼다.

“……음.

일단 빅토르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 두었다. 방송국 PD에게서 전화가 오면 내게 돌려 달란 내용이었다.

그리고 화면에 캘린더를 띄우고 날짜들을 확인해 보았다.

2월 중순경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비디오 사전 선택 후보자들이 발표된다.

그리고 거기에 문제없이 통과하게 된다면 5월까지는 정말 본격적으로 콩쿠르 준비로 꽤 바빠질 것이다.

그러니까 이 방송 출연 일은 이번에 마무리 짓는 것이 옳았다.

물론 시간이 약간 있긴 하지만 일주일 정도 시간을 더 얻는다고 해서 더 잘할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피아노 연주처럼 내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기준과 가늠이 있는 일이라면 시간을 더 얻어서 충족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내가 모르는 곳에 나가서 해야 하는 방송 일이니까.

“…….”

다시 생각해 보니 살짝 긴장된다. 조금 있으면 모르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 올 테고, 난 그 사람에게 협조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시간도 짧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으로 뛰던 내 심장은 곧 고양감의 박동으로 바뀌었다.

여유 같은 단어는 조금 어색하게 들린다. 난 늘 주어진 제한과 조건 내에서 결과를 내는 일에 단련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이틀 후 무대에 선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결과를 냈을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인터뷰에 응하는 일은 차라리 쉽다.

-아가씨, 말씀하셨던 전화입니다. 넘겨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기다리던 전화가 걸려 왔다.

잠시 삐 하는 신호음이 들리고는 이번엔 빅토르가 아닌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음…… 여보세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가 전화받았습니다. 누구시죠?

-하하하, 이것 참. 반갑습니다. 러시아K의 PD인 키릴입니다.

약간 머쓱한 듯 그가 말했다.

러시아에서 가장 큰 문화 예술 채널의 PD라면 이런 전화도 익숙하리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물론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이야기하는 데에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어차피 목적이 분명한 전화였으니.

난 프로그램 출연 의사가 정확하게 내게 향한 것이 맞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것이 맞다면 응하겠다고 답했다.

키릴은 산뜻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도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로 보답드리겠습니다.

“모레 촬영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렇습니다. 정규 촬영일이죠. 방영은 다음 주에 나갑니다.

이미 날짜까지 다 듣고 알고 있는 내게 더 이상 긴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키릴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바로 가능하시겠습니까?

이미 마음속 대답은 정해 놓았지만, 거기에 대답하기 전에 난 키릴에게 되물었다.

“제가 반대로 여쭙고 싶어요. PD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

“준비 없이 카메라 앞에 서도 괜찮을까요?

지금 당장 날 인터뷰하더라도 내가 뭔가 말은 하겠지. 하지만 그것이 프로그램의 기준에 안 맞고 키릴의 눈에 안 찬다면 문제가 생긴다.

나 역시 지금은 내 개인의 평판뿐만 아니라 걸려 있는 것들이 꽤 많다 보니 신경을 써야 하고.

그런데 내 말에서 어떤 걱정을 읽어 냈는지 키릴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준비는 그리 필요 없으실 겁니다. 학교를 인터뷰 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를 초청해서 인터뷰하는 것이니까요.

“그런가요?

-그리고 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공개 석상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몇 번 봤습니다. 그 정도로 하신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전혀.

키릴의 말대로 난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할 기회를 몇 번 얻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떨리긴 했어도 그럭저럭 잘 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다행히 나쁘지 않게 본 듯했다.

가벼운 목소리로 그가 이어 말했다.

-아, 그래도 피아노로 한 곡 정도는 연주해 주셨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 정도는 괜찮아요.

-좋습니다. 좋아요. 그럼 질문지는 오늘 저녁 내로 보내 드릴 테고…… 그 내용은 즉석에서 대답해도 될 정도로 쉬우니 걱정 마시고요. 그리고 촬영 당일 메이크업 등도 만약 필요로 하신다면 저희 측에서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의상도 포멀하기만 하면…… 아예 교복을 입고 오셔도 좋고요.

인터뷰이는 질문과 외견을 제대로 갖추면 준비가 끝난다. 키릴은 그 정도는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 같았다.

나도 다른 건 준비를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복은 아니었다.

학생으로서 난 교복을 입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우리 교복을 다른 사람들이 조금 신기하게 본다는 건 알지만…… 이건 학생으로서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드러난다.

인터뷰에서 음반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얼마 후 있을 콩쿠르 이야기도 해야 한다는 걸 생각한다면 되도록 연주자로서 인터뷰에 응하는 편이 나았다.

“의상은 따로 알아볼게요.

-하하, 그렇습니까? 아무튼 크게 긴장하실 것 없단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되도록 자연스럽고 생생한 모습을 담고 싶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들 전문 방송인이 아닌 내가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키릴은 내게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해 주었고, 나 역시 그가 그렇게 신경 써 준다면 협조적으로 잘할 생각이 충만했다.

약 10분 정도 이어진 전화 통화 끝에 이틀 후 방송국으로 찾아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사실 사전 미팅을 먼저 한 번 하고 나서 촬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는 터라 오전에 미팅하고 오후에 촬영하는 일정이었다.

“후…….”

전화를 끊고 고개를 내리니 닫혀 있는 피아노가 보인다. 거기서 연주도 한 곡 해 주면 좋겠다고 했었지.

뭘 연주하면 좋을까.

무심결에 피아노 앞에 앉아서 떠오르는 곡들을 오른손으로 선율만 짚어 나갔다. 순간적으로 몇 곡이나 휙휙 스쳐 지나간다.

너무 난해한 음악은 일단 제쳐 놓는다. 현대 음악들도 보류였다. 그리고 기교적으로 너무 화려한 곡들은 되레 분위기를 해할 것 같았다.

되도록 표제 음악으로 부드럽고 듣기에 편하며 짧은 곡.

그렇게만 카테고리를 정해 놓자 자연스레 손아귀에 잡히는 곡들이 있었다. 난 그것들을 잘 염두하고는 연습실에서 나왔다.

반에 돌아가 봐야 할 일이 없어서 스터디 룸에 들렀다.

“아니, 그거 내놓으라니까?”

“조금만 보고 준다고.”

“와, 와. 얘들아. 이것 좀 봐 봐. 신기하네.”

시험이 끝난 후의 스터디 룸은 당연히 그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못 하기 마련이다.

문을 열자마자 떠들썩한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날 발견한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다가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어서 와.”

“이번에도 수석인 거예요?”

마구 들려오는 질문 속에는 참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도 섞여 있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일단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랬더니 이번엔 눈치가 빠른 발렌티나가 스르륵 다가오더니 내게 물었다.

“뭐야? 어디서 뭐 하다가 왔어?”

“전화 좀 했어요.”

“전화? 누구랑?”

표트르에게 메시지를 받고는 한참이나 있다가 왔으니 내가 어디서 뭘 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궁금해 죽겠다는 눈빛의 발렌티나를 살리려면 일단 이야기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K의 PD와 이야기했어요. 모레 촬영 예정이에요.”

“와, 진짜구나.”

“뭐라고?”

“어디요? PD?”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의 시선이 다시 내게 꽂힌다.

인터뷰 프로그램에 나간단 이야기를 내 입으로 하는 건 약간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어차피 다음 주에 방영될 예정이라면 지금 이야기하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방송도 방송이지만 그것을 해야 하는 내 입장에 걱정이 많은 듯 보였다.

“그사이 준비는?”

“준비할 것 별로 없다던데요?”

“……뭐?”

무슨 순진한 이야기를 하고 있냐는 듯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눈을 부라렸다.

박력에 깜짝 놀란 내가 멍하니 바라보니 그녀가 내 어깨를 콱 붙잡고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니!? 일주일 내내 시험을 치자마자 아무 준비 없이 바로 카메라 앞에 선다고? 우리 지금 얼마나 큰일 났는지 아니?”

“……?”

“여기 내 눈 좀 보라고. 거의 죽다 살아난 것처럼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잖아.”

그건 아나스타샤의 눈이지 제 눈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그녀가 사인펜으로 내 눈 밑을 칠해 버릴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절대로 안 돼. 당장 오늘내일은 관리를 받으러 가야지.”

그냥 아나스타샤가 놀러 가고 싶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한데, 어쨌건 그녀의 말대로 해서 손해 볼 일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서 다 같이 놀고 싶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모레 있을 중요한 일의 준비까지 된다면 정말 그보다 좋을 순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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