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1화
아나스타샤는 곧장 나와 발렌티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막 시험을 치고 난 이 상태로는 돌아다닐 수 없다며 발렌티나가 저항했다.
나 역시 조금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다. 사실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건 집에 가서 피아노나 치다가 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험에 찌든 우리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한다면서 아나스타샤는 굽히지 않았다.
“시험에 후유증이 미처 다 풀리지 않은 얼굴로 텔레비전에 나가고 싶은 건 아니겠지, 타티아나? 응? 그건 내가 허락 못 해.”
“…….”
오늘내일 푹 쉬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모처럼 신이 난 것처럼 보이는 아나스타샤에게 따라 주고 싶었다.
그렇게 우린 아르바트 거리로 향했다.
거리에도 사람이 많았다. 이 시간에 돌아다닐 젊은 사람들이라면 그 정체가 뻔했다.
지금부터 시작될 2주간의 겨울 방학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이었다.
묘한 동질감을 느끼면서 우린 그 거리로 스며들었다.
겨울 코트도 슬쩍 보고, 새로 생긴 카페에도 관심이 생기긴 했지만 우리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스파 시설이었다.
“저기 어때? 괜찮은 것 같던데.”
“그러자. 더 멀리 가지 말고.”
시험 피로를 풀어야 한단 아나스타샤의 주장과 이대론 못 돌아다닌다는 발렌티나의 불만이 이루어 낸 목적지였다.
난 사실 지금 목적이야 어찌 되었건 두 사람과 함께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에 아무 의견 없이 따라갔다.
예약 없이 갔기 때문에 잠깐 기다려야만 했다. 때문에 로비에서 차를 홀짝이고 있을 때였다.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막 들어온 누군가 우릴 보더니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잠깐만…… 타티아나?”
예전 같았으면 깜짝 놀랐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시냐고 물어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나도 그분의 낯이 익었다. 순간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이름을 떠올려 냈다.
“아델리나?”
“이런 곳에서 다 보네? 반가워. 옆에 두 사람도.”
천진난만한 웃음이 매력적인 이분의 이름은 아델리나 페트로브나 세르지엔코.
저번에 볼쇼이 극장에서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았을 때 옆자리에 있던 그녀가 해 주었던 네잎클로버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의상 디자이너로서 러시아에 있는 시간보다 해외에 머무는 기간이 더 길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분이었는데,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아델리나의 팬이라 했던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는 시험 피로 같은 건 바로 날려 버린 눈빛을 하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가볍게 우린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당연히 이 시간에 교복을 입고 스파에 와 있는 우리가 조금 특이하게 보일 만도 했다.
시험이 끝났단 말을 꺼내자마자 아델리나는 깔깔거리며 웃더니 말했다.
“시험 끝났구나? 맞아…… 시험 끝나고 친구들이랑 놀러 가는 것보다 재미있는 게 없지. 나 땐 교외의 사우나에 가긴 했지만 말이야.”
흐뭇하게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던 아델리나는 살짝 상체를 숙이며 내 어깨를 만졌다.
“아무튼…… 교복 너무 예쁘다. 이렇게 보니 네가 학생이라는 게 새삼 느껴지네.”
“내년에도 학생일 예정이에요.”
“그렇겠지? 하지만 요즘 네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걸 보면 정말 핫하던데?”
핫하다고까지 할 것 있나 싶어 나도 모르게 손사래를 쳤으나 아델리나는 웃으며 이어 말했다.
“난 네가 어떤 활동들을 이어 나갈지 꽤 기대했었는데…… 음반을 냈다고 이 정도로 난리가 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정말 유망주답네.”
“그렇게까진…… 아니에요.”
“아니긴 뭘 아니야? 그렇게 겸손할 필요 있어?”
그렇지 않냐는 듯 아델리나가 내 옆의 두 사람에게 동의를 구했고, 두 사람은 마치 놀리듯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칭찬이라면 몰라도 가까운 친구들의 칭찬은 여전히 견디기 힘겨웠다.
거의 도망가기 직전까지 몰린 내가 발끝을 불안하게 움찔거리고 있자 그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아델리나가 이야기를 바꿔 주었다.
“그나저나 연주회는 언제쯤 할 예정인데? 네 아버지께서도 허락해 주셨는데. 연주회 때 의상 입혀 보게 해 주신다고. 그래서 난 네가 언제 연락을 줄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제야 난 살짝 그녀에게 실례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물론 내 의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아델리나 쪽이 먼저였으니까 그녀가 적극적인 게 맞지만, 그래도 내가 긍정적인 답을 내어 주었던 건 사실이다.
그녀를 기대하게 했다면 이후에 적절하게 연락도 했어야 할 책임이 내게 있었는데, 그사이 연주회는커녕 계속 시험과 음반, 그리고 또 이어지는 시험으로 정신없이 바빠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미안함을 느끼며 일단 변명하듯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앗…… 그게, 아마 콩쿠르 전까진 연주회를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어라, 그래? 준비 중인 콩쿠르는 언제인데?”
“5월이에요.”
이제 곧 2월이니 5월도 그리 멀지 않다.
아델리나는 그 시간을 가늠하는지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흐음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음반 하나 냈으니까 그때까진 그럼 활동 안 하고 피아노만 치겠네?”
“그건…….”
“그렇진 않을걸요? 타티아나가 다음 주엔 텔레비전 프로에 나올 예정이라서요.”
아마 그렇게 될 거라 대답하기 전에 발렌티나가 내 대답을 가로채 대신 말했다.
그 말에 곧장 아델리나가 흥미를 보였다.
“오? 어떤?”
“러시아K에서 하는 인터뷰 프로그램인데요. 아델리나 페트로브나께서도 하셨던 적 있을 거예요.”
이번엔 아나스타샤가 말을 받았다. 어떤 프로그램인지 설명하자마자 아델리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아하, 맞아. 그 프로에 섭외되었구나?”
“예. 맞아요.”
“그럼 일찍 말해 주지! 인터뷰를 위한 의상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이번에도 그녀는 내게 뭐든지 해 줄 수 있다는 듯 말했다.
아까는 약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어물쩍 호의를 받아들여선 안 된다.
난 정신을 잡으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태도를 바로 세웠다.
“그건 너무 실례라 생각해서요. 귀중한 의상은 제가 무대에 오를 때 의뢰를 드리고 싶은…….”
“무슨 소리야? 거기 가서도 피아노 칠 거잖아?”
아델리나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물었다.
이미 연주자를 섭외하면 뭘 시키는지 전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델리나는 시계를 슬쩍 보더니 제안했다.
“음…… 안 되겠네. 너희들 이다음에 예약 잡아 둔 것 있어? 아니면 잠깐 따라올래? 내 공방 보여 줄게.”
그 말이 나오자마자 내 양옆에서 두 친구가 바짝 달라붙으며 속삭였다.
“무조건 가겠다고 해, 타티아나.”
“무조건!!”
이 정도로 강한 압박을 받아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여기서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다간 두 사람에게 원망을 살지도 모른다. 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교복이 아닌 어떤 의상으로 인터뷰에 응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던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전문가의 도움을 조금 받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피아노 앞에 서는 만큼 신경 써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
쇼 프로그램 진행과 인터뷰어로서 이반 마르코프 이고레비치는 오랜 기간 텔레비전에 모습을 비춰 왔다.
그가 여러 분야의 저명한 프로들을 만나 보면서 느낀 것은 특정한 경력이나 실력은 필수 조건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분명하게 지니고도 반짝여 보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만큼 스포트라이트의 개수는 제한적이고 도전자는 많다.
이반이 생각하는 어떠한 분야의 정점에 이르려면 특별한 에너지와 운이 필요했다.
그는 그것에 대한 일종의 믿음마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반은 이번 인터뷰 상대에 대한 데이터들을 받았다.
'역시나……'
원래 준비 중이던 사람이 미뤄지고 갑자기 인터뷰하게 된 것은 근래 잔뜩 조명받는 열일곱 살짜리 피아니스트였다.
이반도 그 이름을 자주 들었기에 어쩌면 조만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예상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데이터를 받은 이반은 별로 어려울 건 없을 거라 생각하며 그것을 대충 넘겨 보았다.
물론 그 내용은 범상치 않았지만 훨씬 더 긴 이력도 수없이 봐 온 이반을 놀라게 하기엔 이 정도론 부족했다.
이반은 이미 피아니스트들을 인터뷰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그녀를 만나는 것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 정도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첫 대면 자리에서 이반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입니다.”
가볍게 악수를 청해 오는 타티아나를 보며 이반은 순간 머뭇거리기까지 했다.
그가 평소 중요하게 생각하던 직감이 꿈틀거렸다.
열일곱 살이란 어린 나이에 이만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보며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상당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리 운이 나쁘더라도 타티아나라면 어디에서나 주목받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되레 인제 와서 그녀가 세간에 드러난 것이 이해가 안 갈 지경이었다.
타티아나에게선 분명히 그런 특별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반은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이반 마르코프 이고레비치입니다. 흠, 갑자기 일정이 잡혀서 많이 긴장되지 않습니까?”
“준비할 시간이 하루 정도만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어요.”
“미뤄 볼까요? 제 재량으로.”
“후후, 제 재량껏 최선을 다해 볼게요.”
타티아나는 가벼운 농담도 능숙하게 받아치면서 웃었다.
이반은 그녀가 원하는 것들이 분명 인기몰이를 하는 것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인기가 곧 힘이나 다름없는 연주자이기도 하고, 지금은 정말 생애에 몇 번 안 올 완벽한 기회였으니까.
때문에 이반은 야심가일 것이 분명한 그녀가 원할 만한 것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 기회만을 기다렸을 테니 음반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나 콩쿠르 출전에 대한 어필을 하겠지. 자신의 때를 놓치지 않고 붙잡으려고 애를 쓸 테다.
그리고 이반에겐 그런 그녀를 돋보이게 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잘 협조한다면 이반은 시청률을, 타티아나는 대중들로부터의 응원을 쉽게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곧장 꺼낼 줄 알았던 타티아나가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당연하면서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곡 정도 준비해 왔어요. 그 정도면 괜찮을까요?”
“아…… 예?”
“피아노 연주를 해 주었으면 한다는 요청을 들었는데요.”
그제야 이반은 다시 타티아나를 내려다보았다.
포멀한 원피스 차림으로 미팅에 참여한 타티아나는 언제라도 피아니스트로서의 존재감을 보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진지한 기백 앞에서 이반은 잘 치켜세우고 편집해서 띄워 주겠단 농담조차 똑바로 하지 못했다.
그가 무언가 하지 않아도 타티아나는 오롯이 돋보일 사람이었다.
“한 곡에 30분씩 하는 것만 아니라면 상관없습니다.”
“후후, 그렇게 길진 않아요.”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도 이반은 그녀에 대한 믿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짧은 인사 뒤에 타티아나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넓은 대기실 안의 대부분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그녀 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반은 잠시 후 있을 인터뷰 분위기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에 대해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저 운 좋게 인기와 기회를 얻은 어린 연주자를 인터뷰한다고 생각하고 임했다간 정말 큰코다칠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절대로 얕보면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성 높은 대가를 인터뷰하듯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민이 가득한 머리로 이반은 인터뷰 대본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질문 순서를 확인하고 그녀와 주고받을 만한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