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82화 (982/1,277)

##  982화

방송국의 제4 스튜디오. 이곳은 토크 쇼나 인터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특별한 장소였다.

수많은 유명인이 이곳을 거쳐 갔고, 앞으로도 거쳐 갈 예정이다.

스튜디오의 구조는 단순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빙하는 만큼 인테리어는 모던한 분위기였고, 그 한가운데에 사회자를 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게스트를 위한 의자는 그 옆에 나란히 마련되어 있었는데, 다른 곳과 차별되는 한 가지 다른 점은 스튜디오 구석의 공간에 그 게스트가 어떤 사람인지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물건들을 놓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점이었다.

화가라면 그림, 작가라면 책, 음악가라면 악기 등 여러 물건들이 항상 바뀌면서 스튜디오의 한 면을 장식한다.

그리고 오늘은 그 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피아노가 세팅되어 있었다.

“피아노 조율 상태에도 문제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 바랍니다.인터뷰어로서 이반은 이 장소를 오랫동안 지켜 왔다.

가장 중요한 점은 어떤 상황에서든 객관성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타티아나 역시 지금 그에게 있어선 인터뷰 대상에 불과하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면서 이반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이반.”

PD인 키릴이 마지막으로 물었고,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신호가 떨어지자 스태프들이 있는 곳의 조명이 꺼지고 모든 빛이 앞쪽으로 고정되었다.

카메라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느끼자마자 이반의 태도는 방송인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대본에 따른 인사말을 유창하게 읊으면서 그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나갔다.

“그리하여 어렵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반은 대본을 들고 17세의 이력이라기엔 꽤 화려한 그녀의 이력을 읽어 내렸다.

“러시아 연방의 공로 예술가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 청소년 콩쿠르 우승자. 앙팡 테리블, 건반 아래의 안내자 등 여러 별명을 지니고 최근 뭇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그 인물.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와 이 시간 함께하겠습니다.”

방청객이 있는 건 아니기에 박수 소리가 따라오진 않았다.

단지 조명이 입구 쪽으로 향했고, 검푸른 원피스를 입은 타티아나가 천천히 스튜디오로 발을 들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뿐인데도 이반은 기이할 정도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함을 느꼈다.

그녀만큼 어린 게스트들도 많았다.

특히 연기자 등은. 그런데 그중에서도 지금 타티아나처럼 우아하게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수없이 되뇌이면서도 이반은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타티아나가 이반 앞에 섰고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타티아나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시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멀리서 걸어오시는 모습만 봐도 피아니스트 같더군요. 바로 이 의자가 아니라 피아노 쪽으로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농담을 건네자 타티아나는 피아노 쪽을 힐긋 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 들어올까요?”

“허허, 바로 피아노로 가시려고요?”

“그래도 된다면요.”

녹화 방송이니까 뭐 어떠냔 투였다.

정말 이 정도로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러워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타티아나의 태도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앞으로 그녀와 대화를 해야 하는 이반의 입장에선 당연히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그는 계속 인터뷰어로서의 태도가 흐트러진다고 느꼈다.

가볍게 손짓하여 타티아나를 게스트용 의자로 안내한 이반은 자신도 의자에 앉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손에 잡히는 카드 대본은 두께가 꽤 있었다.

그는 타티아나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그것도 기대되긴 하지만 그보단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에게 들을 수 있는 말들이 궁금할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지금 그녀를 이곳에 불러 앉힌 건 피아노 실력이 알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런 게 필요했다면 이곳 제4 스튜디오가 아니라 콘서트 룸으로 가야 했겠지.

짧게 피아노를 칠 시간이 주어지긴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타티아나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었다.

이반이 농담조로 그 부분을 짚자 타티아나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옅게 웃었다.

“저도 알아요. 그래서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제 음악보다 제 말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으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고요.”

혹시 연주자 앞에서 말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수습하려던 찰나, 타티아나는 별로 신경 쓰이진 않는다는 듯 말했다.

“물론 결론이 난 이야기예요.”

“어떻게 말입니까?”

“음악을 들어 달라고 제 말로 설득해야겠죠?”

간단명료한 말이었지만 그 뒤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강한 의사가 담겨 있는지 느껴진다.

단순히 음반이나 티켓 따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언어는 음악 외엔 그 무엇도 아님을 분명하게 하고 있었다.

타티아나의 강렬한 프라이드를 느끼며 이반은 살짝 다르게 말했다.

“하하하하, 그것도 좋지만…… 제가 드린 말씀은 약간 다른 겁니다.”

“?”

“무슨 말이냐면, 이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음악을 들어 본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거죠. 그 음악을 듣고 궁금한 점이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타티아나는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해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아.”

“예, 음반 이야기입니다.”

이반은 대본을 넘기며 그녀가 지금 주목받고 있다는 증거인 데이터들을 읽어 내렸다.

“발매 한 달도 안 되어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음반은 수많은 기록들을 갱신하고 있죠. 음악 차트에서 클래식 1위, 전체 6위. 심지어 디지털 음원 없이 순수 음반 판매량과 주목도만으로 집계된 것이 이 정도고요.”

여러 요소를 고려하는 음악 차트에서 첫 음반으로 저 정도 성적을 낸다는 건 정말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눈여겨볼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NFPF 골든 레코드 인증 기준 충족…… 이건 판매량에 따라가는 것이니까. 곧 플래티넘 레코드 인증 이야기까지 있더군요?”

“많은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첫 음반에 이런 관심이 따라오긴 어렵죠.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타티아나가 이룬 결과물들을 쭉 이야기하던 이반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바로 그 결과의 원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혹시 이것이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두 번째 음반이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물론 갑작스러운 질문은 아니다.

이미 타티아나에게 간 질문지엔 이런 대본이 다 설명되어 있었고, 타티아나는 거기에 대답하기로 합의가 되어 있다.

그래도 되도록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으나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타티아나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으론 첫 번째가 맞다고 해도 될까요?”

“하하, 그렇긴 하죠.”

“단지 제가 편하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실제로 전 작년에 이룬 음악들이 이제야 비로소 완전해졌음을 느끼고 있으니.”

이번이 첫 번째니 두 번째니를 따지자면 피곤하니 그냥 모르쇠로 일관하겠단 의미가 아니라 보다 확고한 이유가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반은 그것을 전부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타티아나처럼 어린 연주자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하는 것이 당연할 테고, 그렇다면 굳이 어느 한 시점을 완전하다고 해야 할 필요가 있나 느꼈기 때문이었다.

재작년 타티아나의 음반을 들어 본 적은 없지만, 평론만 놓고 본다면 그때의 그녀도 이미 충분히 임펙트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고 그냥 잊히는 게 전부였을 테니까.

단순한 실력 이야기가 아님을 직감하며 이반이 다시 물었다.

“어떤 기준이 있는 겁니까?”

“이전에 기준이 있었다기보단…… 이제야 기준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 같아요.”

아예 기준이라 할 만한 것조차 없이 타티아나는 그저 음악만을 앞세워 나가다가 간신히 답을 찾아낸 사람처럼 보였다.

이반은 아직 타티아나란 사람을 잘 모른다.

그전엔 소문으로만 접했을 뿐 어제 처음으로 프로필 등을 받아 보았고, 지금 역시 그녀에 대해 아는 건 활자로 된 몇 가지 데이터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타티아나의 옆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 말을 전부 이해할 순 없어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선 조금 알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그 진지한 태도는 이반의 예상을 몇 단계는 뛰어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제가 저로서, 제 이름으로 음반을 낸 건 그래서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타티아나는 간신히 양해를 구하겠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말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을 미처 다 설득하지 못할지도 모른단 우려가 느껴진다.

깊게 생각해 보고 할 수 있는 만큼 이야기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이 정도면 충분하긴 했다.

타티아나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음반 프로젝트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이 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는 것이 전부였으니.

하지만 여전히 묻고 싶은 부분이 많다.

이반은 자신이 어디까지 허락받을 수 있을지 가늠해 가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공식 답변을 받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만 더 물어보죠.”

“예, 모쪼록.”

“재작년에 이름 없이 음반을 낸 것에 대해 여러 추측이 오가고 있습니다. 그 추측들과 지금 해 주신 답변을 종합해서 정리하자면…… 혹시 공식적인 음반을 내기 전에 미리 테스트해 보고자 하는 의미도 있었습니까?”

꽤 현실적인 의문이었다. 실제로 이런 추측이 매우 많기도 했고.

타티아나는 지금 가진 이력도 화려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실력에 비해선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유명세가 확 올라갔다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녀 정도로 천재라면 어려서부터 잔뜩 주목을 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중앙음악학교에 편입하기 전까지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는데,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건 그녀의 배경으로부터 비롯될 만한 어떠한 압력 등이었다.

타티아나는 피아니스트로서 주목받기 전에 베르체노프의 영애로 알려진 인물이었으니까.

때문에 그녀 개인의 의지로만 이 음반들을 낸 것이 아니고 어떠한 다른 이유들이 있을지도 모른단 말들이 많았다.

약간 기분 나쁘게 느낄 수도 있는 질문이었는데 타티아나는 가볍게 인정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무척 실험적인 음반이었으니까요. 저나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나.”

그러나 유리 알렉세예비치나 베르체노프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진 않았다.

타티아나는 그 모든 것이 자신과 음반사의 기획이라 밝혔다.

차라리 그렇다면 이야기하기가 조금 편하다. 이반은 슬쩍 떠보듯 물었다.

“그럼 그 판매량을 보고 안도하셨겠군요?”

“판매량? 아뇨, 그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재작년엔 제 음반을 판매했던 것이 아니었으까요. 사은품이었죠.”

이반은 말실수를 깨닫곤 얼른 덧붙였다.

“아, 아…… 그랬었죠.”

“혹시 테스트라 하심이 판매량에 대한 것이라면…… 그건 아니에요. 제가 알고 싶었던 건 목소리와 영혼이 음반에 얼마나 실리고 얼마나 전달되는가에 가까워서요.”

타티아나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그녀의 음반이 거둔 성적을 앞세워 이야기하는 것이 뭔가 무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인터뷰 대상이 진정 원하는 질문을 잘 골라서 할 수 있는 것이 인터뷰어의 능력이라 믿고 있는 이반에겐 약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음악가들을 여럿 인터뷰하면서도 그리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던 이반은 지금은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정말 고민이 되었다.

“영혼이 음반에 실린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타티아나는 정말 음악가로서의 프라이드가 강해 보인다.

뭐라도 거기에 걸맞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이반은 결국 그 음악의 가치를 숫자로밖에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약간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말을 이어 나갔다.

“그 덕분이겠군요. 사은품이었던 음반이 지금 수만 루블을 호가하게 된 건.”

“그건…… 너무 비싸네요.”

“충분히 그렇게 비쌀 만한 가치가 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음악은 그 정도로 비싸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는 타티아나의 눈빛에서 이반은 이곳에 그녀가 나온 두 번째 목적을 읽어 냈다.

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일이다.

이반은 유쾌하게 웃으며 피아노 쪽으로 손짓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그 모습은 이 스튜디오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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