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3화
대기실에서 녹화를 기다릴 때, 타티아나가 잠깐 스튜디오로 나가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리를 듣긴 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건반을 점검하는 듯한 소리에 불과해서 이반은 그 소리만 듣고는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가 아는 건 타티아나가 기교적으로 거의 완성되었다는 평가를 듣는 피아니스트고, 그에 걸맞게 엄청난 고난도의 곡들을 레퍼토리로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장 그녀가 낸 음반만 보더라도 베토벤과 슈만 라흐마니노프를 엮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슈만과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은 한 곡을 완성하기도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난이도로 유명한 곡들이었다.
그런데도 타티아나는 그 곡들로 음악계에 이름을 떨쳤다.
그런 그녀의 음악을 눈앞에서 들을 기회를 마주하니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반은 대본을 보면서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방송으로 전부 내보낼 수 없으니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같은 대곡들을 연주할 순 없겠지만 그보다 짧으면서도 눈에 띄기 좋은 기교적인 곡들을 가지고 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꺼낸 첫 번째 곡은 바로 무치오 클레멘티의 소나티네였다.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 이탈리아 작곡가의 곡은 현대에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나티네는 건반 악기의 태동기에 작곡된 만큼 그 난이도는 상당히 쉬운 편이다.
타티아나같이 막 이슈가 되고 있는 피아니스트가 이런 인터뷰 자리에서 연주하기엔 아쉬운 곡이었다.
훨씬 더 화려한 곡들도 많을 텐데, 왜 이 곡을 선택했는지 이반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의문들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였다.
“첫 곡은…… 무치오 클레멘티의 소나티네예요. 어디선가 들어 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천천히 피아노 주위를 한 바퀴 돈 타티아나가 의자에 앉았다.
자세를 갈무리하는 그 모든 모습은 눈을 떼기 어렵게 만들었다. 확실히 그 외견만으로도 특출한 데가 있었다.
그렇게 시선을 모은 타티아나는 그 집중이 흔들리기 전에 손을 들어 올렸고, 청각에 자극을 쏟아부었다.
음원이 아니라 이렇게 정면에서 타티아나가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다루는 것을 처음 본 이반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익숙한데, 익숙하지 않아…….’
기이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연주 중인 클레멘티의 소나티네 op.36의 세 번째 곡은 정말 자주 연주되는 곡이라 이반도 몇 번이나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다장조에 단순한 리듬감. 열 살 남짓의 어린 피아니스트들도 곧잘 이 곡을 연주하곤 했다.
그런데 그 기억 속의 곡과 이 곡은 일치하면서도 굉장히 다르게 들리는 면이 많았다.
미처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의 정체를 느껴 보려고 하던 이반은 곧 자연스럽게 피부에 와닿는 온도를 느꼈다.
“……?”
지금까지 이반도 콘서트홀에서 음악을 들어 본 적이 많았지만, 항상 그 차이는 소리의 크기나 속도에서 느껴지곤 했다.
어떤 음악은 약하고 느릿하지만 어떤 것은 강하고 빠르다. 그 정도만으로도 이반은 충분히 음악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느껴지는 다른 감각은 이반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타티아나의 피아노 소리는 피부에 닿아 봄날의 햇살처럼 흩어졌다.
이반은 소리가 따뜻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현실에서 직접 느끼고 있는 것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런 음악이었나…….’
이 소나티네의 밝고 따뜻한 표현은 누구나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다.
하지만 그 표현을 현실에 구현하는 방식은 보통 사람이 흉내도 내기 어려울 정도로 고차원적이고 심원했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세우고는 눈만 내리깐 채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퍼포먼스가 약한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왜 음악성에 대해선 단 하나의 논란도 없는지 이반은 바로 이해했다.
단지 더 역동적으로 연주한다고 해서 음악이 감성적이 되진 않는다.
그렇게 스스로의 음악에 심취해야 더 잘 연주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도 있겠지만, 타티아나는 이미 자신의 음악을 내면에 완벽하게 갈무리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하는 일은 간결하고 정교하게 손을 움직여 그 음악을 피아노에 밀어 넣는 일이다.
‘가장 어려운 방법을 택한 것이었어.’
타티아나가 단지 피아노 실력을 과시하고 싶었다면 더 어려운 곡을 택하는 편이 차라리 훨씬 쉽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잘 속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런 쉬운 방법은 재미없다는 듯, 타티아나는 모두가 알 법한 음악을 끌어와선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높은 수준으로 펼쳤다.
결과적으로 이반은 고난도의 곡을 듣는 것보다 지금 더 많은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타티아나가 음악가로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인지 직감적으로 느낀 이반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대단하다는 말 정도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음악가와 평론가들이 거의 눈이 뒤집혀서 타티아나에게 찬사를 쏟아 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거의 넋을 놓고 타티아나가 부리는 마법에 빨려 들어가던 이반은 그녀가 피아노에서 손을 떼어 놓고 나서도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5분 남짓의 소나티네로 타티아나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여실히 증명해 냈다.
“브라바!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반은 자신도 모르게 기립해 박수를 보냈고, 촬영 중이던 PD와 스태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청객은 없지만 청중들은 이렇게나 많았다. 타티아나는 환한 미소를 보내고는 살짝 어깨를 늘어뜨렸다.
“귀여운 곡이죠?”
“너무…… 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후후, 괜찮아요.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타티아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이반에게 무언의 동의를 구했다.
말하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어서 다음 곡을 연주해도 되겠냔 의미였다.
더 들어 봐도 될까? 이미 클레멘티만으로도 이반은 전율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본에 나와 있는 곡은 다 연주되어야 한다.
이반이 말없이 바라보자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다음 곡은 조금 더 신비한 분위기로 가 볼까 해요. 모리스 라벨의 거울miroirs. 제4곡입니다.”
그렇게 설명한 타티아나는 다시 피아노 쪽으로 향했다.
길게 드리운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타티아나는 건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박수를 받고 감사를 표하던 소녀는 없고 곧 피아니스트만이 그곳에 존재했다.
“…….”
수백 킬로그램이 넘는 피아노가 공처럼 통통 튕기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반은 분명히 그렇게 느꼈다.
타티아나는 손끝만을 이용해 이 거대한 공을 양옆으로 튕긴다. 좌우로 주고받기도 하고, 빠르게 두드리기도 했다.
환영처럼 그 손가락 위에 나타난 것은 한 어릿광대였다. 공 위에 올라서도 그 어릿광대는 전혀 균형을 잃지 않았다.
신기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어릿광대가 발을 구른다. 순식간에 공이 굴러 이반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소리가 눈앞을 가득 채운다는 기이한 체험과 마주한 이반은 깜짝 놀라서 목을 뒤로 빼기까지 했다.
살짝 장난을 친 어릿광대는 만족스럽게 웃더니 저글링 묘기를 부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깐 정말 일부분이었어…….’
클레멘티의 소나티네로 보여 준 것은 정말 순수한 표현력의 경지일 뿐이었다.
그보다 난이도 있고 다채로운 뒤나믹dynamik을 포함한 곡을 손에 쥔 타티아나는 그야말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갑자기 소리를 일으켜 모두와 얼굴을 마주하는가 하면, 조용히 사그라들면서도 그 존재감을 무대 전체에 퍼트린다.
공을 놓쳐 버린 어릿광대는 곧 발을 끌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선 누구라도 궁금증을 참기 어려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혹시라도 공에 깔릴까 싶어 멀리 물러났다면, 이번엔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앞으로 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어릿광대의 속임수였다.
청중들이 적당히 가까이 귀를 기울이게 되자 어릿광대가 장악한 무대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잊혔던 소리들이 돌아온다.
미처 도망치기도 전에 다시 어릿광대가 청중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리고 계속되는 묘기로 모두를 현혹했다.
“…….”
타티아나의 손이 건반 위에서 춤추다가 그대로 뚝 떨어지더니 건반을 밀고 쭉 내려왔다.
소위 글리산도라고 하는 기술이다.
이반은 저 기술이 그저 건반 위에서 손을 좌우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건반은 딱딱한 상아다. 그걸 손으로 무식하게 옆에서 밀려고 하면 손만 찢어질 뿐이었다.
콘크리트를 두부로 긁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소리까지 가지런하게 내려면 상당한 기술과 노련함이 필요했다.
게다가 이 곡이 요구하는 글리산도 테크닉은 손을 세워 건반 하나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른손 하나로 2단 글리산도를 연주하게 되어 있었다.
가장 단순하게 보이면서도 까다로운 테크닉이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마치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피아노 건반을 오르내렸다.
그냥 그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도 소리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피아노로 제대로 된 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이반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 악수했을 때의 타티아나의 손을 떠올린 이반은 그 연약하게 느껴지던 손으로 저런 연주가 가능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야말로 묘기라고밖에 말이 안 나오는 광경이었다.
‘어릿광대의 기교…….’
인간의 것이 아닌, 요정 혹은 유령의 기술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밀하고 섬세하다.
정신을 홀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펼쳐지는 이 음악은 이반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내 모두를 휘어잡은 어릿광대는 보다 유쾌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빠른 스텝이 또다시 눈을 어지럽게 만들고, 귀를 간지럽힌다.
음악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피아노 건반 위에 올라가 있던 작은 어릿광대의 모습은 이미 스튜디오를 가득 채울 정도로 커져선 피아노의 강철 현 위를 뛰놀고 있었다.
마치 풍선처럼 점점 더 부풀어 오르던 어릿광대는 어느 순간 화려한 폭죽처럼 펑 하고 터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 연기의 끝을 흐트러뜨리듯 타티아나는 손을 들고 있다가 쓱 저으며 내렸다.
“…….”
방금 전까지 느끼고 있었던 것들이 마치 꿈처럼 사라지자 혼란스러운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꿈에서 깼다면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이반은 벼락처럼 일어나 박수를 쳤다.
“브라바, 브라바!”
타티아나는 일어나선 살며시 묵례했다. 그 깔끔한 인사는 정말 리사이틀 콘서트가 끝난 뒤에나 하는 인사처럼 느껴졌다.
타티아나는 음악이 그렇게 비싸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음악을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펼쳐 놓았지만, 이반은 이런 음악을 그냥 들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이 음악을 그저 독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 주었으면 한다.
그 기분이야말로 타티아나가 원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소수의 몇몇이 향유한다고 해서 음악의 가치가 올라가진 않는다.
하지만 어쩐지 타티아나의 음반의 가치가 더 올라가고 말 것이란 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좋았습니다, 타티아나.”
타티아나가 다시 게스트석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반은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약간 부끄럽다는 듯 타티아나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느낀 바를 어떻게 조금이나마 진실되게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이반은 말을 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다채롭게 피아노를 연주하실 수 있습니까? 어떨 땐 부드러웠다가, 어떨 땐 강렬하게…… 저 딱딱하고 무거운 피아노를 타티아나가 그렇게 완벽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정말 경이롭군요.”
그 어떤 경향성이나 제약도 없다는 듯 타티아나의 음악은 변화무쌍하게 바뀌며 모든 표현들을 드러냈다.
그냥 마법처럼만 느껴지는 이 일이 어떻게 인간에게 가능한 것인지 이반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마법의 비밀에 대해 타티아나는 별로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피아노는 딱딱하지 않아요. 아마 현존하는 거의 모든 악기 중에 가장 말랑말랑할 걸요?”
“……?”
이해가 안 가는 말을 하는 타티아나를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자 그녀는 직접 이해시켜 주겠다는 듯 다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