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4화
음악학교 피아노과 4학년인 마야는 방에서 스마트폰을 쥐고 뒹굴거리며 영상들을 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세상엔 별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많았고, 마야는 방학이 시작하고 일주일 내내 그런 쉬운 재미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방에는 피아노도 있지만 그쪽으론 일부러 시선을 두지 않았다.
“…….”
사실은 불안했다. 지금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빨리 피아노 연습을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온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저번 1학기 마지막 실기 시험을 엉망으로 망친 걸 생각하면 도저히 의욕도, 자신감도 생기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건반을 눌러 보더라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뭘 해도 어차피 선생님들은 못마땅해하실 테고, 그녀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할 테니 계속 무언가 하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인생이란 뭘까……’
10년간의 고된 인생을 돌이켜 보며 마야는 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재미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인다.
마야는 다시 침대에서 뒹굴 하고 반바퀴 돌고는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했다. 오늘은 중요한 방송이 있는 날이었다.
“이제 하는 건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의 인터뷰 예고편이 나온 것을 보고 마야는 일주일 전부터 오늘만을 기다려 왔다.
1년 전, 송년 연주회 방송에서 타티아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야는 그녀의 팬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베르체노프란 이름을 가지고도 피아노를 전공한다거나,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쁘다거나 하는 건 다 부차적인 이유였다.
마야는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음악들을 정말 좋아했다.
타티아나의 기교는 정교하고 멋있어서 피아노 전공자로서 선망할 수밖에 없었을뿐더러, 그 기술로 펼치는 음악은 정말 꿈에서나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표현력과 깊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마야의 학교엔 이미 그녀 말고도 타티아나의 팬이 수두룩하게 많았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마야가 자신을 조금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타티아나의 첫 음반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재작년 사은품으로 받은 무명의 음반을 듣고 마야는 그 연주자를 알아보려 애썼다.
그건 재미난 퀴즈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클래식 평론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그 음반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수많은 전문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하며 매일같이 음반을 반복해서 듣던 마야는 어느 순간 그 연주자가 타티아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물론 너무 터무니없는 추측이라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 실력자인데 무명이면서 특정한 리듬감을 지닌 연주자는 타티아나 외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1년이나 계속된 그 믿음은 이내 결실을 맺게 되었다.
타티아나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음반을 내면서 사실상 그전의 무명 음반 역시 자신의 것이라 밝혔기 때문이었다.
‘피아노는 끔찍하게 못 쳐도 타티아나의 팬은 할 수 있겠지.’
슬럼프를 느끼고 있는 마야가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건 타티아나 덕분이었다. 때문에 오늘 타티아나의 인터뷰도 그녀에겐 굉장히 큰 의미가 있었다.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 광고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마야는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
이반에게 소개되어 스튜디오 위로 등장한 타티아나는 단정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마야는 하마터면 탄성을 지르며 침대 위를 구를 뻔했다가 가까스로 자제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도 놓치지 않기 위해 화면에 집중했다.
타티아나는 우선 음반에 대한 것을 인정했다.
무명으로 음반을 낸 것에 대한 설명을 듣고도 마야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타티아나가 자신이 없어서 그리한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음악에 자신이 없었다면 절대로 이름값 없이 음악으로만 승부해 보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타티아나는 음악 자체로는 충분히 성공시킬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자기 스스로 충족해야 했던 무언가가 부족했을 뿐이다.
그 정도만으로도 마야는 만족했다. 타티아나가 이런 도전적인 행보로 주목을 잔뜩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
그리고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에 앉기도 했다.
“어!?”
타티아나가 건반의 첫 음을 누르자마자 마야는 기겁해선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클레멘티의 소나티네 3번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 소나티네는 마야도 작년에 쳤던 곡이다. 그런 곡을 타티아나가 연주한다고 하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잔뜩 공감대를 느끼며 마야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마야는 이것이 과연 자신이 연주했던 곡과 같은 곡이 맞는지 의구심을 가져야만 했다.
“어…….”
스마트폰의 안 좋은 음질로 들어 봐도 타티아나가 구사하는 소나티네는 마야의 것과 말도 안 될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제야 마야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는지, 왜 슬럼프에 빠진 것인지 약간 이해했다. 이 곡을 쉽게 치고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그 정도면 되었다고 했지만, 곡을 제대로 완성하지 않고 그냥 계속 더 어려운 곡들만 찾아가다 보니 지금 결국 벽에 막히게 된 것이다.
“…….”
뜻하지 않게 인터뷰 프로그램을 보다가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해 낸 마야는 더더욱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다.
그다음으로 타티아나가 연주한 라벨의 곡 역시 너무나 좋았다.
연주가 끝나고 마야는 자신의 피아노를 돌아보았다.
만약 타티아나가 고난도의 곡들만 연주했다면 마야는 약간의 체념을 느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연주한 클레멘티의 소나티네는 마야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약간의 의욕을 느끼면서 마야는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인터뷰는 계속되었다.
-가장 말랑말랑할걸요?
-?
타티아나의 말에 MC인 이반이 의문을 표했고, 마야 역시 그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야에게 있어 타티아나는 피아노의 신과도 같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피아노가 말랑말랑하다는 이상한 말은 도무지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마야는 손을 뻗어 앞에 있는 피아노를 만져 보았다. 무척이나 차갑고 딱딱하다.
화면 너머의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맴돌며 말했다.
-이렇게 보면 피아노는 참 위압적인 물건이죠. 크고, 어둡고…….
그 말대로 피아노 앞의 사람은 정말 작게 보인다.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옆에서 보실 때 딱딱하다고 느끼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요. 강철과 나무의 구조물인 이 피아노는 그 자체로 이렇게 무거우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손을 뻗어 피아노를 밀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당연히 피아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앞에서 보면 조금 달라요.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 의자에 앉았다. 카메라가 움직이며 타티아나를 등 뒤에서부터 포착했다.
뒤에서 본 타티아나는 어쩐지 더 작게만 보였다. 이렇게 작은 사람이 어떻게 저 큰 피아노를 다루는 걸까 새삼 신기함을 느낄 때였다.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타티아나가 물었다.
-이렇게 제가 앉은 상태에서 피아노를 어떻게 다룬다고 생각하세요?
-그야 건반을…….
-맞아요, 이렇게 말이죠.
그리고 타티아나는 건반을 짚었다. 조용하던 피아노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고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타티아나는 이어 말했다.
-페달은 이렇게 사용하고요.
-아!
그제야 알겠다는 듯 이반이 탄성을 내며 말했다.
-왜 말랑말랑하다고 하셨는지 알겠습니다. 피아니스트의 손발이 닿는 곳은 모두 움직이는군요?
-그렇죠. 손발에만 의식을 집중하면 허공에 붕 뜬 기분마저 느낄 때가 있어요.
마야는 충격에 휩싸였다. 더듬더듬 그녀는 자기 앞의 건반 덮개를 열고는 손을 뻗어 보았다.
다른 악기들에 비해 피아노는 항상 딱딱한 악기의 대명사처럼 불리고 있었다.
단지 건반만 딱딱한 게 아니라 음들을 부드럽게 이어 연주하는 레가토조차도 인위적일 수밖에 없다. 마야는 그것을 상식처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앉아서 타티아나가 하는 대로 만져 보니 피아노 건반은 마야가 원하는 대로 쑥 들어가 주었다.
타티아나가 왜 말랑하다고 표현했는지 마야는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도 해 보지 못했던 인식이었다.
-현악기나 관악기 등 손에 쥐고 연주해야 하는 악기들은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제대로 쥘 필요가 있어요. 온몸을 사용해서 결속하기도 하죠.
타티아나의 말대로 바이올린 같은 악기는 어깨와 목, 턱 모두를 사용해야 붙잡을 수 있다.
그리하여 악기는 그야말로 연주자와 일체화된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는 듯 타티아나가 다시 건반을 훑었다.
-하지만 피아노는 연주자가 붙잡을 필요가 없어요. 그저 날려 보내기만 하면 되죠.
이반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날려 보낸다……?
-혹은 바닥 아래 깊은 곳으로 잠수하게 할 수도 있고요.
피아노는 단지 가볍고 물렁하게만 연주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이 악기의 무거움을 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마야는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지금 타티아나가 해 주는 이야기는 시시각각 마야의 인식과 고정 관념을 헤집어 놓으며 시야를 넓게 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피아노 전체를 어디론가 보내면 소리는 자연스레 따라와요. 반대로 피아노를 꽉 붙들어 놓으려 하면 원하는 소리를 내기가 정말 어렵게 되죠.
-허…….
감탄의 숨을 내뱉은 이반이 타티아나에게 부탁했다.
-조금만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이렇게 할까요?
그 부탁에 응해 타티아나는 곧 이름 모를 한 곡을 짧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정말 가볍다. 단지 손은 허공을 누빌 뿐인데 그 밑에 건반이 우연히 있을 뿐인 것처럼 느껴진다.
손끝으로 끌어낸 음색은 너무나 부드럽고 찬란했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선율을 이리저리 흩뿌리던 타티아나는 느닷없이 태도를 바꾸어선 이번엔 저음부터 쾅 하며 피아노를 내리찍었다.
커다란 피아노가 삐걱거리며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느낌마저 난다.
멈추지 않고 타티아나는 계속해서 피아노를 더 깊은 곳으로 파묻었다. 곧 피아노는 납작하게 무대 전체에 깔리게 되었다.
그 위에서 타티아나는 마지막으로 연주를 갈무리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
놀라움에 감탄도 안 나올 정도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 연주가 끝나자마자 마야는 자기도 모르게 건반에 손을 얹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보여 주었던 모든 것을 따라서 집중하며 건반을 짚어 본다.
단지 흉내만 내 보려 했을 뿐인데도 뭔가를 느낄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면에선 이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정말로 피아노를 날려 보냈다가 내리꽂는 느낌입니다……. 힘도 거의 들이지 않고……. 실제로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 어렵습니다.
-힘으로 이 피아노를 들고 던지려면 세계에서 제일 힘이 센 사람이 와도 어려울걸요? 후후.
타티아나는 가볍게 웃더니 다시 피아노 건반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하지만 조금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피아노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이 지금 마야에게 직접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래도 마야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피아노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란 말은, 그리고 실제로 해내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는 건 마야에게 그 자체로 확신이자 희망이었다.
다시 게스트석으로 돌아온 타티아나에게 이반이 말했다.
-그렇게 들어도 솔직히 저 같은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 음…… 그런가요? 제가 괜한 이야기를…….
피아노의 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상황에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타티아나는 약간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나 그게 정말 쓸데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방송으로 나오고 있을 리가 없었다.
중간에 편집 한 번도 없이 모든 장면을 그대로 내보낸 것은 방송사에서도 타티아나가 방금 보여 준 것을 굉장히 가치 있게 보고 있단 증거였다.
-아뇨! 아닙니다. 하지만 이 인터뷰를 보고 도움을 얻을 사람들이 정말 많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도움이요?
-피아니스트 중에서도 피아노를 무겁게 생각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마야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다시 말하는 것처럼 타티아나는 화면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만약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네요.
피아노의 신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마야는 건반을 짚고 있는 손을 떼지 못했다.
다시 카메라가 이반 쪽으로 향하고, 그는 타티아나의 연주회 경력 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실력을 보여 주었으니 이제는 자연스레 앞으로의 향방 등을 이야기하는 분위기였다.
-큽……. 콜록, 콜록!
-타티아나?
갑자기 격한 기침 소리가 나더니 카메라가 타티아나를 향했다.
빨대가 꽂힌 물병을 내려놓으며 타티아나가 콜록거리고 있었다. 이반이 괜찮냐고 물어보니 타티아나가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사레가 들려서…….
-빨대를 빼고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연주도 하고 말도 많이 하느라 목이 마른데 빨대로 물을 많이 마시려다가 사레가 들린 모양이었다.
마야는 타티아나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며 웃고 말았다.
지금까지 피아노의 신이 방송에 모습을 드러낸 줄 알았는데, 그런 신도 긴장하여 실수 정도는 하는 것이었다.
한참이나 어쩔 줄 몰라 하던 타티아나는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급히 수습하려는 듯 말했다.
-그럼 다시, 다시 할게요. NG죠?
물론 녹화 방송이니 보이기 싫은 모습이 있다면 편집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마야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는 건 타티아나의 의견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이반은 박장대소하며 어림없다는 듯 말했다.
-푸하하하, 뭘 다시 합니까? 타티아나. 그리고 우리 PD님은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은데요.
-무슨 말씀이세요? 편집해 주시는 것 맞죠?
당혹스러워하는 타티아나를 카메라는 더더욱 가까이에서 찍고 있었다. 마야는 방송국에 감사의 편지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