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5화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나는 배신감을 느끼며 어깨를 떨었다.
“키릴……!!”
그 사람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촬영을 마치고 나올 때, PD인 키릴은 내가 걱정할 만한 부분은 알아서 잘 편집해 줄 테니 일주일 후에 텔레비전으로 확인하라며 호언장담했다.
당연히 나로선 그를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물을 마시다가 캑캑거리는 모습은 있는 그대로 방영되어 버렸다.
심지어 편집해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까지도.
“아…… 아아…….”
이 배신감을 힘으로 치환할 수 있다면 지금 끌어안고 있는 이 베개를 터뜨려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게 그런 힘은 없었다.
옆에 내려놓은 스마트폰이 웅웅거린다. 지금 누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건지 보고 싶지도 않다.
당혹스러워하는 텔레비전 속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리모컨을 찾아 헤매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찾던 리모컨은 이미 아나스타샤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
“아하하하핫.”
눈이 마주치니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내 평생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절대로 미워할 일은 없을 것이라 맹세했건만, 지금 그 맹세가 흔들리려고 한다.
말없이 손을 내밀어 리모컨을 달라고 청했지만 아나스타샤는 내 제스처를 본체만체했다.
이 재미있는 걸 꺼버릴 이유를 전혀 못 찾겠다는 것 같다.
격한 배신감에 몸서리치며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에르네스트와 리처드도 앉아서 내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망치고 싶어.’
지금 이 아이들이 우리 집 응접실에 모여 있는 이유는 내가 유명 인터뷰 프로에 나오는 모습을 다 같이 보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내가 자진해서 초대한 건 아니다. 맨 처음 이야기는 리처드가 꺼냈다.
오늘 아침, 난데없이 리처드는 방학이기도 하고 할 일은 없는데 한승우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없고 심심하니 놀러 가도 되겠냐며 전화를 걸어 왔다.
난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별 상관없으니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듣자마자 리처드는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오늘 방영될 인터뷰를 같이 보잔 것이었다.
그제야 그의 계략에 속아 넘어간 걸 깨달은 나는 급히 핑계를 만들어 보려 했지만 그 후에 리처드는 바로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까지 불러선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솔직히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혼자서 인터뷰했던 것을 다시 보는 것도 부끄러워서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친구들과 다 같이 봐야 한다니? 그 자체로 고문이나 다름없다.
어떻게든 핑계를 댔어야 했는데…….
“저렇게 말하면 절대로 편집 안 해 줄 텐데.”
에르네스트가 애석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이 옳았다는 건 지금 텔레비전 화면이 증명하고 있었다.
목 아래 어딘가가 바들바들 떨리는 기분이 든다. 난 정말로 어디론가 숨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곳엔 리처드가 날 괴롭히려는 생각이 다분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듣자 하니 인터뷰도 질문이나 대본이 다 정해져 있다던데 혹시 저것도 다 대본이야? 그런 거라면 연기 진짜 잘한다. 타티아나.”
“…….”
저 애를 어떻게 하지? 곱게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졌는데.
살기등등한 눈으로 바라보니 리처드는 그제야 여기가 어딘지 인지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 아버지와 오빠가 없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지, 아쉽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상황을 그리 즐기고 있지 못하다는 걸 알아차린 아나스타샤는 뒤늦게 날 달래 주었다.
“그래도 이전에 했었던 연주랑 테크닉 강의는 정말 좋았어.”
“그래도라니…….”
“아하하, 계속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물 마시다가 사레가 들린 게 전국에 방송으로 나갔다는 건 그냥 못 미덥게 보였다고 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테크닉에 관련한 이야기는 나도 즉흥적으로 꺼낸 이야기치고는 꽤 마음에 드는 이야기였는데, 바로 그 직후에 그런 짓을 해 버리다니.
난 혹시나 내 설득력에 흠결이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내 얼굴을 가만 바라보더니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저 정도는 귀엽다고 생각해서 PD도 그냥 내보낸 거 아니겠어? 네가 지금부터 뭘 하더라도 네가 보여 줬던 건 절대로 안 바뀌어.”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내가 어떤 걱정을 하는지 정확하게 꿰뚫어 본 아나스타샤가 이렇게까지 말해 준다면 조금 걱정을 덜 수 있다.
어깨를 늘어뜨리며 베개를 무릎에 내려놓자 에르네스트가 대화를 받았다.
“피아노가 바이올린보다도 더 유연한 악기라는 표현은 처음 들어 본 것 같아. 그런데 듣고 보니 나도 그런 식으로 피아노를 다루고 있었던 것 같더라고.”
아나스타샤에 이어 그까지 내게 동의해 주니 점점 더 자신감이 붙는다.
하지만 난 그가 지금 과거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말았다.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 엄격해지지 않으려 해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는데……. 괜히 그를 탓하고픈 마음이 든다.
하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에르네스트가 엄격한 건 지금 재활 훈련에 최선을 다하는 만큼 모든 기준을 회복에 두고 싶다는 의미였다.
의사로부터 전해 듣기론 그만큼 빠르게 호전되고 있다고 하니까,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리라.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 이야기로 옮겨 갔다.
“제 느낌대로 이야기했을 뿐이라…… 지적이 들어올지도 모른단 생각은 있어요.”
나름대로의 노하우이긴 했지만 테크닉에 대한 설명치고는 너무 추상적인 느낌이 짙었다.
피아노 교수법을 혼자서 어설프게 배운 탓이었다. 전국의 연주자들이 내 인터뷰를 보면 기함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내가 보기엔 전혀 안 그럴 거 같은데.”
“누가 지적하면 타티아나는 더 좋아할걸? 그럼 직접 만나서 어떤 식의 피아노 테크닉을 가졌는지 교류하고 싶다고 할 것 같아.”
“맞아, 그럴 것 같네.”
괜한 이야기를 했나 보다.
세 사람은 마치 내가 어떻게 행동할진 이미 안 봐도 다 알겠다는 듯 서로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가 분명 이 아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고 말 것 같다는 점이었다.
결국 뭘 어떻게 해도 일단 다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이 상황에서 내가 시달리지 않을 방법은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난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직 내 편집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키릴에겐 감정이 조금 있었지만, 그래도 그 전의 연주 영상이나 다른 이야기들을 하는 장면은 제대로 잘 찍어 준 것 같아서 항의 전화는 참기로 했다.
“…….”
텔레비전 속의 나는 누가 봐도 피아노 연주자처럼 보였다.
아델리나가 준비해 준 원피스는 연주회용 드레스만큼 본격적이진 않으면서도 정확하게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돋보이게 해 주었다.
그녀에겐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준비된 연주자 타티아나는 인터뷰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연주회는……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당분간은 콩쿠르에 집중하려 해요. 그래야 어떤 결과를 받아 보더라도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연주회를 한다고 해서 콩쿠르에 소홀해지진 않는다. 어차피 내가 익힌 곡들이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 콩쿠르 전에 연주회 등을 진행한다면 불안해할 사람들이 많다. 괜히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이반도 그 점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군요. 음, 공로 예술가 훈장을 수여받으실 때 말씀하셨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하시겠다고.
-예, 맞아요. 지금은 DVD 심사 중이겠네요.
-혹시 쇼팽 콩쿠르가 아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가기로 결심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미리 질문지로 전달받았던 내용이었기에 막힘없는 대답이 나왔다.
-쇼팽 콩쿠르에선 쇼팽의 곡밖에 연주하지 못하죠. 물론 전 쇼팽의 곡들도 좋아하지만…… 다양한 곡들로 세계 각지의 연주자들과 겨루어 보고 싶었어요.
사실은 그것 외에도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난 쇼팽의 곡을 객관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걸 있는 그대로 말할 필요는 없기에 가장 편한 이유를 내세웠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기에 움츠러들 건 없었다. 되도록 여러 곡들을 무대에 올려 보고 싶었다. 그만큼 준비되어 있기도 하고.
일주일 전의 나는 꽤 당당하게 보였다. 마음에 들었다.
이반은 손가락을 튕기며 웃었다.
-아하, 그렇죠. 저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좋아하는 터라 쇼팽의 곡들만 연주한다고 했으면 조금 아쉬워했을 것 같군요.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짓던 이반은 카드 대본을 덮어 놓고는 갑자기 물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올해는 두 개의 큰 콩쿠르가 동시에 열리는 해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로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어 할 만도 하지만…… 이제 막 열일곱 살로 참가 가능한 나이가 되자마자 참가하면서 조금 긴장되진 않습니까?
1년이라도 경험을 더 쌓는 편이 무대에서 결과를 내기에 좋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반도 그 부분에 있어서 내가 불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 염려를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긴장되어요. 아직 전 미숙하기도 하고요.
1년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내가 혼절하면서까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음악을 기록했던 무명의 음반과 지금 낸 첫 음반 사이의 간극이 1년이었다.
그사이 내 음악의 완성도는 굉장히 높아졌다.
바닷가재의 껍질처럼 내 음악은 계속해서 깨어지고 새롭게 더 커지며 단단해지고 있다.
시간을 가지고 더 공을 들여 보고 싶단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큰 무대를 미루고 몇 년을 더 기다리기엔…… 당장 주어진 기회를 그냥 보내고 싶진 않아서요.
4년 혹은 5년 후에도 내게 문제가 없다면 난 피아노를 치고 있겠지. 하지만 ‘혹시’ 하는 생각은 늘 내 마음속에 차가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예전처럼 당장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단 불안감이 드는 건 아니다.
그렇게 떨지 않으면서도 난 미래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겪은 일을 보면서 느낀 바가 있었기에 무작정 여유롭게 있을 순 없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 국제 콩쿠르에 어떻게든 참가하면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겠지.
결과 자체에 대한 욕심 외에도 내겐 그런 여러 이유가 있었다.
-DVD 심사의 결과는 언제쯤?
-2월 중순이에요.
-얼마 남지 않았군요?
이반은 상당히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분명 예선도 통과하고, 결선에서도 좋은 결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 이렇게 멋진 실력도 보여 주셨으니 말이죠.
-감사합니다.
-올해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의 해가 되길 바라면서,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인터뷰가 마무리되는 것을 보면서 난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사레가 들린 것이 그냥 보여진 건 굉장히 창피했지만 그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고, 그걸 제외한다면 전체적으로 굉장히 좋은 자리였다.
이반이 인터뷰어로서 아주 능숙하고 편안하게 날 대해 준 덕분에 이렇게 잘된 것 같았다.
“너무 일찍 끝났네.”
리처드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마음 같아선 이 베개를 그에게 던지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그가 여유롭게 잡아선 또 장난을 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리모컨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아나스타샤는 문득 스마트폰을 확인하더니 내게 말했다.
“벌써 날짜가 이렇게 되었구나.”
저 인터뷰 촬영을 한 것이 일주일 전이었다. 이제 앞으로 일주일 정도 후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DVD 심사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금방이네요.”
“어떨 것 같아? DVD 심사는 통과할까?”
“통과할 것이라고 가정해야죠.”
애초에 DVD 예선에 통과한다고 끝이 아니라 그다음은 벨기에에서 한 달 내내 피아노를 치며 내 한계를 시험해야 한다.
예선에 전전긍긍하며 본선 준비를 미흡하게 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다. 반드시 통과를 가정하고 임해야 하는 것이다.
선생님들이나 하실 법한 교과서적인 대답이었지만, 아나스타샤에겐 그 뻔한 말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어쩐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그녀에게 물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저녁 전까지 같이 연습하지 않으실래요?”
“그럴까? 나도 아까 네 인터뷰 보면서 실험하고 싶어진 것이 몇 가지 있었거든.”
우리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는 피아노 연주자였다.
약간 몸이 달아서 지금이라도 별관으로 가려고 슬슬 움직일 준비를 하자 리처드가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네 정말 바로 연습하려고? 대단하네……. 그럼 열심히 해. 난 기숙사로 돌아가련다.”
“가시다니요?”
난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모처럼이니 식사하고 가세요.”
“난 괜찮…….”
“제가 괜찮지 않아요. 안 보내 드릴 거예요. 저녁에 아버지와 오빠가 돌아오면 함께 식사하도록 하죠.”
“그렇게까지 신세 질 생각 없는데…….”
“부담스러워하실 것 없어요.”
절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는 내가 강하게 딱 잘라 말하자 리처드도 표정이 조금 굳었다.
호랑이 굴로 들어온 것이란 걸 이제야 깨달은 표정이다.
물론 정말로 그를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다. 간만에 모인 친구들과 식사를 하고 싶다는 건 진심이었으니까.
“에르네스트도 오늘 별일 없으시죠?”
그는 리처드와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밥 먹고 갈게.”
“좋아요.”
오늘은 내가 놓아주고 싶어질 때까지 아무도 돌아가지 못한다.
그렇게 정한 날이 하루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 난 멋대로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