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86화 (986/1,277)

##  986화

타티아나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 네 사람은 모두 다 같이 별관에 있는 그녀의 연습실로 향했다.

네 명 중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건 세 명. 그중에서도 당장 콩쿠르와 관련되어 있는 건 두 명뿐이다.

때문에 에르네스트와 리처드는 자연스레 연습을 보는 것을 중점적으로 했다.

물론 연습을 봐 주는 사람의 역할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아리오소arioso의 느낌이 너무 옅은 것 같아. 조금 더 박자를 단순하게 해 봐.”

“더 늘어트리는 게 아니라?”

“지금보다 더 늘어트리면 노래가 아니라 피아노를 질질 끌고 가는 느낌이 날걸. 아리오소의 느낌은 그런 게 아냐.”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에르네스트의 의견에 아나스타샤가 의문을 표하고, 거기에 리처드가 반박을 하기도 했다.

서로 말을 조심하는 일도 없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다.

모두들 같은 학년의 학생들이고 각자 사사하는 선생님이나 추구하는 음악성도 모두 다르니 당연히 같은 해석이 나올 수가 없다.

때문에 자기중심이 약한 연주자의 경우엔 이런 교류에 되레 완성도를 해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네 명은 모두 확고한 자기 색채를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들이었다.

다른 의견을 조금 듣는다고 해서 색이 변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되레 더 강렬하게 살아난다.

“그럼 이렇게 해 볼까?”

이야기를 종합해서 들어 보던 아나스타샤는 그럼 음악으로 다시 보여 주겠다는 듯 피아노 앞에 앉아선 지금까지 여러 의견이 오간 부분을 다시 연주했다.

얻어 낼 수 있는 것들만 정확하게 추려선 자신의 음악에 녹여 낸 모습이었다.

그 연주를 듣고 리처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걸 이렇게 쳐 버리네.”

“왜? 불만이니?”

“아니, 잘한다고.”

비웃음이 아니라 진짜로 감탄한 투로 리처드가 박수까지 쳤다.

방금 그 난장판에서 이 정도 결과물을 뽑아냈다는 게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해 주어야 한다. 아나스타샤에겐 충분히 그 정도의 실력이 있었으니까.

연주를 마친 아나스타샤가 내려오자 다음은 타티아나의 차례였다.

“한 곡 정도만 들어 주세요.”

떠들썩하던 세 사람은 모두 조용해졌다. 타티아나가 연주를 시작했다.

에르네스트는 당장 눈앞에 블라디미르 사모일로비치 호로비츠가 살아 돌아와 연주한다고 해도 당당하게 그 연주에 대해 평하고 의견을 말할 자신이 있었다.

실력이나 연륜에 차이가 있더라도 그 정도는 리스너로서 당연히 가능하다.

게다가 큰 콩쿠르에 나가야 하는 친구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일부러 조금 더 분석적인 태도로 곡을 들으려 했다.

그러나 연주가 절반을 넘어갈 때까지도 에르네스트의 머릿속은 흰 백지상태였다.

“…….”

예전에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연습을 도와주기도 하고, 대결도 자주 했었다. 서로 의견 교류도 정말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딱히 무어라 할 만한 부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실력 자체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테크닉이 좋았던 건 원래 그랬고, 연구와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지금은 뭘 하더라도 그녀의 음악은 그저 그대로 정답처럼만 느껴졌다.

‘내가 저 애의 스타일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가.’

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지에 대해 에르네스트는 여러 가설을 떠올려 보았으나 합리적인 이유가 떠오르진 않았다.

결국 뾰족한 답이나 의견도 없이 연주를 끝까지 들어 버린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도 못 했고, 타티아나는 그런 그를 굳이 보채지 않았다.

별말은 않고 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히 보였다.

피아노를 만지지 못하는 에르네스트를 조금이라도 괴롭게 할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말 이 자리를 에르네스트가 힘들게 여겼다면 애초에 따라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억지로 따라오지 않았고, 여기서 친구들의 연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재활을 더 열심히 해서 반드시 피아노 앞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욕과 동기 부여도 되고 있었고.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일부러 적극적으로 임했다. 물론 의견을 낼 만한 말이 없는데 억지로 지어 내서 하는 건 아니었다.

마침 리처드가 곡의 한 부분을 짚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레퍼런스와 비교하다가 느낀 건데, 전개부 첫 시작을 조금 천천히 해 보면 어때?”

“리처드, 네 말대로 하면 바로 다음 프레이즈와의 결합이 약해져. 내가 듣기엔 지금 이게 맞아.”

애써 한마디 의견을 냈던 리처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들었던 그 정합성을 있는 그대로 변호하고 싶었다.

그렇게 몇 번 더 아나스타샤와 리처드가 타티아나의 연주에 대한 다른 의견을 내고,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받아쳤다.

반대할 의견이 없을 뿐 듣기는 제대로 들었다는 걸 충분히 증명한 셈이다.

“…….”

연주 당사자인 타티아나는 자신이 한마디도 설명을 거들지 않고 에르네스트가 알아서 받아치는 걸 보며 약간 당황해하는 것 같긴 했지만, 결국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에르네스트가 틀린 이야기를 했다면 아마 바로 끼어들어서 그건 아니라고 했을 타티아나가 조용히 봐 주고 있다는 것에 그는 조금 만족할 수 있었다.

“연습은 이쯤 할까? 오늘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도, 타티아나도.”

“그럴까요?”

번갈아 가면서 연주하고 그 내용에 대해 갑론을박을 주고받는 치열한 연습을 두 시간쯤 진행하자 모두가 약간 지쳤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해도 떨어져 있었다.

타티아나는 이 연습에 대한 보답으로 저녁 식사 대접할 명분을 얻었다고 생각하는지 꽤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다시 본관으로 돌아와선 각자 씻거나 앉아서 쉬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유리와 루슬란이 돌아왔다.

잠시 후 타티아나가 식당으로 모두를 안내했다.

“너무 맛있겠다!”

“드미트리가 신경을 써 주셨네요.”

저녁 식사는 그야말로 만찬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화려했다.

리처드가 청바지 차림으로 테이블에 앉아도 될지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였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유리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 각자 자리에 앉았다.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리처드. 모두 많이 먹고 가거라.”

“예, 아저씨!”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곧 나이프와 포크가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연스러운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식사 자리에서도 주인공은 타티아나였다. 오늘 특별한 일이 있는 건 그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스마트폰을 꺼내면서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일하시느라 방송 못 보셨죠? 제가 보여 드릴까요? 인터넷에 벌써 영상 올라와 있어요.”

“그래. 보여 주겠니?”

“여기요.”

인터뷰를 짧게 자른 영상을 스마트폰 화면에 띄워서 아나스타샤가 유리에게 건넸다. 유리는 그것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저도 같이 봐요, 아버지.”

어느새 루슬란이 그 옆으로 다가갔고, 포멀한 만찬 자리 같던 분위기는 굉장히 자유로워져 있었다.

식기도 놓고 영상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타티아나는 안절부절못하더니 결국 쥐어짜듯 중얼거렸다.

“식사 중인데……!”

“뭐 어떠니? 그럼 안 보여 드릴 생각이었어?”

“그게 아니라…….”

오늘 인터뷰가 방송된다는 것 정도는 이미 가족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친구들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다 같이 그 이야기를 할 거란 것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을 테고.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그 이야기를 테이블 위에 올린 타이밍은 에피타이저도 없이 곧장 메인 디시를 올려놓은 것과 비슷했다.

타티아나는 목이 건조한지 물 잔만 만지작거리다가 이따금 마셨다.

영상을 보던 루슬란은 고개를 들더니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너 물 마시다가 체해서 편집해 달라 한 거야?”

“…….”

타티아나는 물 잔을 탁 놓았다. 그러더니 거의 반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해요.”

“죄송하단 소리를 듣고자 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죠? 아버지.”

“흠.”

태연한 루슬란의 반응에 따라 유리는 한술 더 떴다.

“이 영상을 다운로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타티아나는 부끄러움에 진짜로 체할 것 같은 표정으로 포크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르네스트는 웃음을 머금었다.

베르체노프의 가풍이 일반적인 가정보단 확실히 약간 엄격할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송에서 약간 실수를 했다고 그걸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닌 것이다.

이어진 저녁 식사 내내 대화 주제는 거의 타티아나에 대한 것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말수가 적었다. 하지만 오늘 친구들을 식사에 초대한 걸 후회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 정말 너무 좋았어. 드미트리에게 인사하고 올게.”

“그도 정말 고마워할 거예요.”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유리와 루슬란은 할 일이 있다며 위층으로 올라갔고, 타티아나는 차를 내왔다.

차도 맡길 사람은 있었지만 타티아나는 늘 이럴 땐 직접 차를 타 오는 편을 선호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그녀의 방식이었다.

“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디너도 티타임도 모두 언제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빨랐다.

시간을 확인한 아나스타샤가 먼저 운을 뗐다.

“많이 늦었네. 슬슬 집에 가야겠어.”

바로 타티아나의 동작이 뚝 멈췄다. 그 모습을 보면 이만 가겠단 이야기를 하기가 정말 어렵다. 아나스타샤가 힘든 일을 해 준 것이다.

역시 아쉽다는 듯 타티아나가 넌지시 말했다.

“아…… 조금 더 계셔도 괜찮은데요. 방학이기도 하고…….”

“지금 안 가면 남은 일주일 내내 눌러앉아 버릴 것 같아서.”

농담조로 말하며 아나스타샤가 슬쩍 말을 돌렸다.

“그치? 에르네스트.”

방학은 일주일이나 남아 있다. 오늘 하루 정도는 자고 가도 별문제는 없겠지.

이곳에서 자고 간 것이 처음인 것도 아니고, 지금은 친구들도 많으니까.

그러나 그럴 상황이었다면 누구보다 먼저 아나스타샤가 부탁했을 것이다. 지금 이만 돌아가자고 한 건 그녀 나름대로의 적절한 자중이었다.

아나스타샤의 판단을 존중하는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응했다.

“이만 갈게.”

그렇게까지 말하니 타티아나도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차량을…….”

“괜찮아. 택시 타고 갈게. 저녁인데 빅토르도 쉴 시간이 있어야지.”

이런저런 호의들을 제공해 주려는 건 정말 고맙지만 친구 집에 놀러 왔다가 가는 건데 계속 차로 데려다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올 때도 지하철과 택시로 문제없이 왔었고.

적당히 헤어지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모두 찻잔을 비우곤 일어섰다.

외투를 챙기며 갈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타티아나는 미련이 가득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눈을 보면 정말 가기 싫어지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 편이 낫다고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마음을 다잡았다.

“나오지 마, 타티아나. 설렁설렁 걸어 나가서 택시 탈 테니까.”

숄을 걸치고 저택 입구까지 나온 타티아나를 보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정문까진 한참이나 걸어야 한다. 굳이 그 거리를 타티아나가 왕복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약간 고민하는 것 같은 타티아나의 앞에 그녀의 애완견인 벨카가 나타났다.

근처를 어슬렁거리더니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타티아나는 무릎을 숙이곤 벨카의 등을 쓸며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잠시 후 벨카가 꼬리를 흔들며 아나스타샤에게 다가왔다.

“왕.”

“벨카에게 배웅을 부탁했어요.”

“정말? 든든하네.”

마치 맡겨 달라는 듯 벨카는 주위를 빙글 돌더니 곧 앞장서서 정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비스듬하게 서서 바라보던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모두들.”

“응. 오늘 재미있었어.”

“저도 즐거웠어요…….”

일주일 만에 보는 것이라 아쉬운 건 에르네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선 더 자주 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 있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음 주에 봐. 타티아나.”

“다음 주…… 그렇겠네요.”

학교에선 보게 될 것이란 걸 생각하는지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봐요.”

인사를 마치고도 타티아나는 바로 저택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돌아봐도 손만 살짝 흔들 뿐이다.

숄을 여미고 조용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에르네스트의 눈에 다시 한번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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