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87화 (987/1,277)

##  987화

벨카는 세 사람보다 살짝 앞서 걸으면서도 조금 거리가 벌어지나 싶으면 멈춰 서선 주위를 맴돌거나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개를 키워 본 적이 없지만 저런 개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한눈에 봐도 교육을 굉장히 잘 받은 것처럼 보인다.

타티아나가 교육했으려나? 그녀의 말을 잘 듣는 걸 보니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리처드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진짜로 우릴 안내하는 것 같네.”

“안내하는 거 맞을걸? 벨카 진짜 똑똑해.”

이 중에서 그나마 벨카와 놀아 본 적이 있는 아나스타샤가 그 영리함에 대해 몇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었다.

가만 듣던 에르네스트는 저 벨카가 타티아나의 퍼스널 트레이너이기도 했다는 말에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운동을 시켰다고?”

“응. 내가 부탁했더니 제대로 들어줬더라고.”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듣자 하니 체력이 약한 타티아나를 위해 아나스타샤가 몇 가지 부탁을 했더니 벨카가 놀이를 핑계로 타티아나에게 운동을 시켰다는 것 같은데…… 그냥 놀고 싶었던 것 아닌가? 으레 개들은 그럴 테니까.

아나스타샤는 그런 게 아니라면서 벨카의 유능함을 역설했지만 에르네스트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실에 관계없이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리처드가 중얼거렸다.

“우리 집에도 개 있는데. 보고 싶네.”

“어머, 정말? 무슨 종인데?”

“웰시코기.”

“의외네 뭔가……?”

“뭘 생각하는 건데?”

아나스타샤와 리처드는 견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옆에서 떠드는 소리는 차치하고 에르네스트는 앞서 걷는 벨카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모르게 이쪽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마침 알래스칸 맬러뮤트 이야기가 나오자 벨카는 귀를 세우더니 이쪽을 휙 돌아보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그게 자기를 부르는 게 아니란 걸 알았는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확실히 범상치 않긴 했다. 저런 녀석이라면 타티아나의 옆에서 분명 많은 힘이 되어 주었을 것 같다.

“뭐 하니? 빨리 안 오고.”

신기한 기분을 느끼며 관찰하다 보니 약간 걸음이 늦어져서 아나스타샤가 재촉했다.

에르네스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스마트폰을 들며 물었다.

“그냥…… 택시는 불렀어?”

“아니?”

“내가 부를게.”

예전에 타티아나에게 음반을 주기 위해 대중교통으로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에르네스트는 지금 길가에서 택시를 잡는 건 거의 불가능함을 알았다.

콜택시를 부르고 나선 내친김에 말했다.

“택시비는 내가 낼게.”

그 말을 리처드가 대뜸 받았다.

“오, 그럼 학교까지 가면 안 되냐?”

“넌 양심도 없냐?”

여기서 모스크바 중심까지 택시를 타면 천 루블도 넘게 나온다. 에르네스트는 그렇게까지 낼 생각은 없었다.

그냥 지하철역까지만 간 다음 지하철을 타고 들어갈 생각이다.

리처드는 뭔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일단 지금은 그렇게 갈아타는 게 최선이라는 걸 이해한 것 같았다.

10분 남짓 걷자 저택 정문이 보인다.

벨카는 정문 앞까지 달려가더니 문이 열리자 자신의 임무는 여기까지라는 듯 그 자리에 앉아선 혀를 빼고 기다렸다.

“벨카, 안내해 줘서 고마웠어. 또 올게!”

“왕.”

아나스타샤의 인사에 벨카가 꼬리를 흔들며 응답했다.

그런 친밀한 인사는 보기엔 참 좋았지만, 그녀나 타티아나가 하는 것과 달리 에르네스트는 개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 조금 어색했다.

심지어 자기 개도 아니고 다른 집 개한테.

하지만 아무리 봐도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 이 영리한 개를 그냥 무시하고 가려니 마음에 약간 걸렸다.

“잘 있어.”

“…….”

괜히 지나가면서 한마디 건네자 벨카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에르네스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마치 네가 그렇게 인사해 줄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어서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 일단 적대적인 게 아니라면 되었다고 생각한다.

“택시 저기 있다.”

미리 불러 둔 택시가 길가에 서 있었다. 세 사람은 빠르게 택시에 올랐다.

“크릴라츠코예 역까지 가 주세요.”

“그러죠.”

기사는 그 길은 익숙한지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각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고, 리처드는 무언가 시답잖은 영상을 보는 것 같았는데 그런 것까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생소한 도로에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고 차들만 보였다.

이곳 루블레스카는 사실 평소에 올 일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어중간한 재력으로는 발붙일 엄두도 못 내는 곳인 까닭이다.

접근성이 이렇다 보니 방학이 되면 편하게 만나기가 꽤 어렵다.

물론 모스크바 시내에서 보자고 하면 타티아나는 나와 주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불러낸다 하더라도 지금은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분명히 그의 생각은 확고한데 아직 여러 가지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한번 자신의 계획을 되돌아보면서 마음을 강하게 먹으려 애썼다.

“저기.”

길어지는 침묵이 불편한지 아나스타샤가 슬쩍 목소리를 냈다.

“에르네스트, 내년에 자동차 면허 딴다고 했지? 그러면 여기 올 때 조금 편하긴 하겠다.”

루블레스카 중에서도 상당히 오래된 지역에 살고 있는 타티아나를 생각하고 있었던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작년에 아나스타샤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자동차 면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대로 오락실로 직행해선 연습을 해 보기도 했었다.

그때 아나스타샤는 실력도 좋았다. 면허를 따면 그녀도 잘만 운전하고 다닐 것 같았다. 심지어 오토바이를 타 보고 싶다고 하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마치 에르네스트가 운전을 해 주면 옆에 얻어 타겠다는 듯한 어투였다.

뭔가 이 이야기를 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에르네스트가 답했다.

“차도 없는데 무슨.”

“사면 되잖아.”

“돈 없어.”

“에이, 거짓말.”

사실 모아 놓은 돈도 있고, 앞으로 들어올 돈도 있어서 차를 사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당장 그걸 지금 확정 짓고 싶지 않았다.

은근히 주제를 피하자 아나스타샤는 재미없다는 듯 코웃음 치더니 몸을 쭉 늘여 좌석에 기대며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한참이나 걸릴 것 같던 이야기들이 이젠 코앞에 있는 느낌이야.”

“어떤 이야기?”

“국제 콩쿠르나 자동차 면허 같은 거?”

단지 작년이나 재작년의 이야기가 아니다. 두 사람이 알고 지낸 기간은 훨씬 더 길었다.

오래전 국제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몇 년도에 무슨 콩쿠르가 열리는지는 미리 다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어릴 적 에르네스트는 열일곱 살이 되자마자 할 수 있는 모든 국제 콩쿠르에 참가할 것이라며 의기양양하게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아나스타샤도 질세라 꼭 수상하고 말겠다고 했었고.

그런데 계획이란 건 그렇게 마음대로만 되진 않는 법이었다. 지금은 아나스타샤에게만 가능성이 남았다.

에르네스트는 그녀라도 타티아나와 함께 콩쿠르에서 후회하지 않을 만한 결과를 얻길 바랐다.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될 그녀들의 커리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약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 참 빠르다. 그치?”

무언가 돌이켜 보는 듯한 어투에 에르네스트는 순간 말문이 막힘을 느꼈다.

거기에 그냥 그렇다고 답하기에도 어색하고, 빠르지 않다고 하자니 거짓말이었다. 에르네스트도 지금 10학년이라는 게 스스로 잘 믿기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생각이 든 걸까. 잠깐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타티아나와 만나고 난 후였던 것 같다.

그전까지만 해도 에르네스트는 스스로 개척한 길에 만족하며 자부심을 지닌 피아니스트였다.

그리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선 나머지 시간이 너무 느리단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에게 한 번 혼쭐이 난 이후로는 그녀를 따라가고 나란히 서기에 바빴다.

해야 할 일은 정말 많았고,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너무 빨리 흘러가기만 했다.

실제 시간이 똑같이 흐른다는 건 잘 안다.

시간 예술을 다루기 때문에 그 시간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피아니스트로서 에르네스트는 시간의 정확함을 믿는다.

하지만 체감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단 것에 그는 조금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마 아나스타샤도 비슷하리라 생각하니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충 어물쩍 넘어가려고 할 때였다.

“법적 성인이 된다고 뭐 달라지는 줄 아나. 별것 없어. 우리 누나가 그러는데 서른 살까진 다 어린애나 마찬가지래.”

“……서른 살은 너무 높게 잡은 것 아니니?”

“누나의 바람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뭐든 간에 상관없고, 제발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하라는 듯 리처드가 이야기했다.

“별로 바뀌는 건 없을 테니까. 무슨 세월 흘러가는 게 어쩌고 하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기사 아저씨가 웃잖아.”

“아니, 아니, 전혀. 그러니까 이야기 더 하시죠.”

“너무 재미있어하시는데요?”

택시 기사는 아무리 봐도 학생으로 보이는 세 사람이 시간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너무 우스웠는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아진 건 비단 에르네스트뿐만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도 조금 창피한지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크릴라츠코예 역에 도착한 세 사람은 택시에서 내려 이번엔 지하철로 갈아탔다.

지하철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기엔 적당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고.

몇 정거장 거치자 아나스타샤가 사는 프리스넨스키에 도착했다. 그녀는 지하철에서 내리며 마지막으로 에르네스트와 리처드를 돌아보았다.

“바이바이.”

“잘 가.”

아나스타샤를 보내고 나니 남은 두 사람은 더더욱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이젠 기숙사까지도 금방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저 리처드가 내리면 잘 가란 말 정도는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려야 할 역을 두어 정거장 남겼을 때, 문득 리처드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다음엔 네가 알아서 좀 해 봐.”

“……뭘?”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서 에르네스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멀거니 되묻자 리처드는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처음으로 약간 진심 어린 불만을 이야기했다.

“타티아나 말이야. 방학 동안에도 얼마든지 부르면 같이 놀자고 할 애인데, 왜 그냥 방치해 두는 거야?”

“방치라니…….”

그 말은 정말 어이없었지만 에르네스트는 곧장 반박하지 못했다.

내외적으로 산재한 장애물들을 의식하느라 막상 타티아나에겐 약간 거리를 두는 듯 굴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방학이기도 하고, 바쁜 일들은 일단락되었으니 같이 놀자고 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있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지금 그녀와 같이 다니면서 온전히 재미있게 해 줄 자신이 별로 없었다.

시시때때로 불안해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약간 무력감을 느낀 나머지 에르네스트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그걸 왜 네가 신경 쓰는데?”

“너 지금 그 말 진심이냐? 나도 그 애 친구거든?”

“…….”

리처드의 기분이 어떻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곤 해도 지금은 에르네스트가 잘못한 것이 맞았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까딱이던 리처드는 길게 이야기할 마음은 없다는 듯 말했다.

“뭐, 너도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만…… 너희가 아까 말하듯 시간은 정말 빨리 흘러가. 그러니까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흘려보내지 마.”

뭔가 두루뭉술하게 아까 있었던 이야기에 얹어 당연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으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구석이 있는 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가끔 리처드가 이런 말을 할 때면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을 할 뿐이다.

“난 단 한 번도 그렇게 무책임한 적 없었어.”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무작정 꺼낸 이야기에 리처드는 비웃거나 한숨을 쉬지 않았다.

되레 그가 보인 약간의 신뢰에 에르네스트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잠시 후 지하철이 멈춰 섰고, 리처드는 짤막한 인사만 남기곤 휙 하고 내려 버렸다.

“…….”

홀로 남은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의 계획은 여전히 확고하다.

하지만 조금 더 세부적인 부분에서 다듬을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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