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90화 (990/1,277)

##  990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벨기에에서 올 만한 연락이라면 단 하나뿐이었다.

지금까지 계속 언제쯤 합격 통보가 올까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갑작스레 전화로 오니까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긴장이 된다.

“…….”

그런 날 보던 선생님은 나지막이 웃으며 손을 까딱이셨다. 걱정하지 말고 그냥 받아 봐도 괜찮을 것이란 의미였다.

잠깐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후, 빅토르에게 전화를 바꿔 달라고 전했다.

그나저나 벨기에는 무슨 말을 쓰지? 내 기억으론 프랑스어 아니면 네덜란드어였던 것 같은데…… 둘 중에 뭐였더라. 둘 다였나?

어떤 언어든 간에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난 전화 너머에서 들려올 미지의 언어를 기다리며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그런데 내 걱정 반 기대 반이었던 예상과 달리 전화로 들려온 건 유창한 러시아어였다.

-안녕하십니까.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사무국의 루트거 칼스도르프라 합니다.

외국인이 말한다는 느낌이 드는 억양이긴 했지만 알아듣는 데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전화를 해 올 줄은 몰라서 조금 놀랐다.

살짝 머뭇거리는 사이 칼스도르프가 이어서 물었다.

-저희 콩쿠르에 지원해 주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되십니까?

“예, 맞아요.”

-사전 선발 심사 결과를 알려 드리기 위해 이렇게 전화드렸습니다.

마음의 준비는 이미 벨기에에서 국제 전화가 걸려 왔을 때 미리 다 해 놓지 않았겠냐는 듯 그는 곧장 용건을 전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지원자께선 모든 심사 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저희 콩쿠르 사전 선발에 합격하셨습니다.

탈락을 굳이 전화로 알려 주진 않을 거라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합격 통보를 들으니 갑자기 마음이 확 놓였다.

내심 많이 긴장하고 있었음을 새삼 느낀다.

이런 대형 국제 콩쿠르엔 그 어떤 연주자라도 합격을 보장할 수 없다.

참가자들의 수준이 높은 만큼 그중에서 합격자들을 추리는 기준 또한 굉장히 높은데, 심지어 실제 무대가 아닌 DVD로 합격선을 뚫어 낼 만한 실력을 보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까닭이다.

일단 첫 번째 관문을 이렇게 통과했으니 기쁘다. 선생님 쪽을 바라보니 선생님 역시 내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감사합니다. 정말 기쁘네요.”

-이후 이메일로 다시 한번 사전 선발에 대한 안내를 드릴 예정이고…… 그 메일엔 심사 과정과 심사 위원들에 대한 정보가 포함될 것입니다. 그리고 합격 여부는 저희 콩쿠르 홈페이지에도 다시 한번 게시되어…….

정신없을 정도로 빠른 어투로 칼스도르프는 합격자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기본적인 사항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나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미리 알아본 바로도 그렇고, 아까 선생님도 말씀하시길 합격자는 보통 이메일과 홈페이지로 통보한다고 한다.

그건 지금 칼스도르프도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 걸려 온 이 전화는 뭐지?’

정말 혹시라도 합격자들이 연락을 받지 못할까 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연락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만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혼자서 약간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설명을 마친 칼스도르프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혹 문의하실 점 있으십니까?

“음…….”

콩쿠르 측에서 지원해 준다던 항공권이나 숙박 등을 다시 제대로 물어보고 확인해도 좋겠지만, 지금은 당장 머릿속에 든 의문을 묻고 싶었다.

“항상 이렇게 전화로 통보해 주시나요?”

-…….

갑자기 수화기 저편이 조용해졌다. 그렇게 빠르게 이야기하던 칼스도르프가 약간 의표를 찔려 당황하고 있음이 전해져 온다.

침묵이 길어지면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그는 곧 내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렇진 않습니다. 일반적으론 이메일과 홈페이지로만 알려 드리죠.

“그럼 어째서 이렇게 전화를 주신 건가요?”

-그건…….

그가 당황하는 걸 보니 괜히 캐물었나 싶지만, 그 역시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 내어 내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게 하려 했으니 자업자득이라 본다.

가만히 기다리자 결국 칼스도르프는 조용히 숨을 고르더니 이야기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께서 꼭 참가해 주셨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약간 설득 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지원 후에도, 그리고 합격 후에도 마음이 바뀐다면 저희가 붙잡을 방법은 없습니다. 사전 선발은 고정 인원 없이 합격시킬 분들은 다 합격시켰으니 그중 한 명이 빠진다 하여 통과 못 한 지원자가 반발할 이유도 없고요.

이 정도 규모의 콩쿠르는 DVD 예선도 치열하고 어려운 데다가 항공권도 지원해 주니 합격자들은 거의 다 참가하지만, 간혹 개인 사정 등으로 합격했음에도 참가하지 않는 연주자도 있다.

칼스도르프는 그런 일이 발생하면 서로에게 얼마나 큰 손해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공정하고 엄격한 심사의 결과로 합격하게 되신 것임을 생각해 주시고 이 축제에 꼭 참가해서 실력을 선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는 참가해 주시는 모든 참가자분들을 위한 모든 준비를 부족함 없이 갖추어 두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꽤 솔직한 대답이다. 덕분에 그가 명백하게 날 붙잡으려고 하는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주 있는 경우는 아니니까…….’

올해는 쇼팽 콩쿠르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피아노 부문이 동시에 열리는 해였다.

각각 5년, 4년마다 열리는 콩쿠르라서 이런 경우는 수십 년에 한 번 온다.

콩쿠르들 사이에 묘한 라이벌 의식이 있다 해도 그리 심하지는 않을 테지만, 이렇게 동시기에 열린다면 아무래도 조금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콩쿠르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은 얼마나 명망 높은 심사 위원을 위촉하고 실력 있는 연주자를 참가시키느냐로 집중된다.

이런 전화를 받았다는 건 일단 콩쿠르 협회 측에서도 중요하게 보고 있단 의미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난 그것을 칼스도르프에게 확인받으려 했다.

“혹시 쇼팽 콩쿠르 때문에 그런 건가요?”

-…….

말을 뱉고 보니 이번엔 확실히 내가 실례한 것 같다. 이런 질문을 해 봐야 칼스도르프의 입장만 곤란할 뿐이다.

급히 수습해 보려고 하는데 그는 헛기침을 살짝 하더니 적당히 대답했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만약 전화상으로 확답이 필요하신 거라면…… 걱정 마세요. 전 쇼팽 콩쿠르에 지원서를 내지도 않았으니까요.”

약간 미안한 마음에 난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확실하게 한 번에 이야기했다.

그제야 무언가 안심한 듯 칼스도르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감사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되레 절 합격시켜 주신 것에 제가 감사해야죠.”

-아닙니다. 분명 고민 끝에 저희 콩쿠르를 선택해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난 그저 지금 감당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콩쿠르를 택했을 뿐이고, 콩쿠르 측에선 공정하게 날 뽑았을 뿐이지만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우린 서로 감사를 몇 번 주고받고는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전화를 이어 나갔다.

칼스도르프는 내게 확실하게 다시 이야기했다.

-참가하시는 것으로 다시 확답해 주셨으니…… 저도 최선을 다하여 불편함 없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의지가 되네요.”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첨언하자면, 제가 이렇게 전화를 드렸다고 해서 심사에 영향이 가진 않습니다. 이건 모든 참가자들이 절대적으로 같습니다.

난 그런 착각을 하지도 않았지만 칼스도르프는 아주 엄격하게 딱 자르듯 말했다.

그리고 지금 살짝 특별 대우를 받는 분위기라고 해서 거기에 취하면 안 된다.

애초에 이런 건 특별 대우도 아니다. 그냥 전화로 붙잡고 필요하다면 설득하려는 것일 뿐이니까.

-저희 콩쿠르는 다른 곳에 있는 예선 면제 없이 모든 참가자가 평등한 상태로 시작합니다. 무작위와 제한 등 필요한 시스템들이 준비되어 있으니 이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연하죠. 익히 잘 알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수준과 어려움은 유명하다 못해 악명이 높다. 다른 콩쿠르들과 비교하더라도 유별나게 심하다.

80년 넘게 진행되며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여러 시스템들이 참가자들을 극한까지 몰아붙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악명은 내가 이 콩쿠르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자 칼스도르프 역시 이제 전할 건 다 전했는지 사무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더 궁금하신 거라도?

“지금은 없어요.”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문의 사항이 생기신다면 저희 사무국으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루트거 칼스도르프라는 이름을 말씀하시거나 아니면 그냥 러시아어로 말씀해 주시면 바로 저에게 연결해 줄 겁니다.

역시 그가 러시아 담당자인 모양이다. 그래도 언어가 통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그 이상 말이 없자 그는 짧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다시 한번 이번 사전 선발에 합격하신 것 축하드리며, 무대를 빛내 주실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깔끔한 멘트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난 스마트폰을 집어넣고는 지금의 이 기분 그대로 선생님에게 전했다. 도저히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가 없다.

“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어요!”

“축하한다, 타티아나.”

미하일 선생님은 박수까지 쳐 주시면서 날 축하해 주셨다.

이렇게 흐뭇해하시는 걸 보니 제자로서 할 도리를 제대로 하고 있단 기분도 들고, 뭔가 쑥스럽다.

내가 어물거리고 있자 선생님은 낮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전화까지 해서 널 붙잡으려는 걸 보니 저쪽에서도 꽤 절실한 모양이구나.”

“아하하…….”

옆에서 통화를 듣고 계셨으니 대충 상황도 아실 테고…… 내가 눈치 없이 쇼팽 콩쿠르가 겹쳐서 그런 거냐고 묻는 것도 보셨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딱히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대신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자는 듯 선생님은 책상 위에 있던 서류 뭉치를 집어 들며 말씀하셨다.

“콩쿠르 참가는 확정되었으니…… 그럼 난 내가 할 일을 해 주어야겠지. 일단 브뤼셀로 가기 전까지 약 3개월간 수업은 최소화하고…… 그 후 1개월도 내가 알아서 처리해 주마.”

아직 음악학교 학생인 내게 그런 학사 행정 문제는 정말 중요했다. 기본적으로 한 달은 쉬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수업까지 축소해야 한단 말을 들으니 조금 기분이 묘했다.

지금까지 외부 활동을 하면서도 학업을 소홀히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납득은 가지만 혹시 어떻게 안 될까 싶은 마음으로 생각에 잠겨 있자 선생님은 내 생각을 툭 잘라 버리듯 말씀하셨다.

“네 표정을 보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이번엔 내 말에 따르렴.”

“예…….”

“국제 콩쿠르에 나가면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데 열일곱 살의 최연소 연주자로 나가면서 다른 것도 신경 쓴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란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국제 콩쿠르는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응원과 지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무대이다.

다른 열일곱 살들도 학교에서 적당히 편의를 봐주는 건 마찬가지겠지. 애초에 음악원에 다니고 있다면 최상의 여건을 보장받고 있을 테고.

상황을 이해한 나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정해진 시간을 써서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가늠하며 생각에 잠겨 있자 미하일 선생님이 다가와선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씀하셨다.

“열심히 해 보자꾸나, 타티아나.”

“예, 선생님.”

“그런 의미에서…… 짧게나마 점심시간에 레슨을 봐 줄까 하는데. 너만 괜찮다면 지금 바로 레슨실로 가자꾸나.”

그건 지금 내가 선생님에게 가장 기대하고 있던 말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부탁드려요!”

잠깐의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하니 선생님도 웃으며 앞장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