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91화 (991/1,277)

##  991화

미하일 선생님도 점심 이후 일정이 있으셔서 레슨을 길게 해 주시진 못했다.

대신 다음부턴 훨씬 더 시간을 많이 투자해 주신다고 하셨으니 나도 준비를 잘할 필요가 있었다.

레슨을 받고 나오자마자 난 곧장 연습실로 향했다. 두 손은 마치 유령처럼 들어 올린 채였다.

지금 손끝에 달라붙어 있는 무언가가 톡톡 하고 떨어지다가 다 말라 버리기 전에 건반을 찾아야 했다.

바로 가까운 연습실로 향한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그대로 다시 손을 내려 건반을 짚었다. 방금 전 느꼈던 것들을 되새기며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이렇게 다시 한번 정리한 음악은 내 영혼과 몸에 새겨져 어지간해선 잊히지 않는다. 비로소 내 소리가 되어준다.

“…….”

그렇게 한참이나 연습을 하다가 다시 오케스트라를 들어 보면서 연구하고 싶어져서 스마트폰으로 음원들을 찾아보고 있을 때였다.

[연습 중이니?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로부터의 메시지였다. 점심을 먹고 홀연히 사라진 내가 연습 중일 것이란 건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내가 있는 곳의 위치를 그녀에게 가르쳐 주자 몇 분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갈게.”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날 보자마자 벽에 기대어 서더니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개학하자마자 연습 중이었니?”

“방금 레슨을 받아서요. 혼자서 조금 기억해 두고 싶은 게 있어서…….”

“장하다, 장해.”

반은 놀리는 투였지만 나머지 반은 진짜로 칭찬하는 느낌이다.

물론 개학 첫날엔 조금 풀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방금 전 벨기에에서 중요한 소식을 전해 받은지라 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싶은 의지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열심히 해야죠. 콩쿠르에도 나가게 되었으니.”

“콩쿠르? 응, 뭐 그렇긴 한데. 오늘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고 해야 하나? 뭔가…….”

“그럴 분위기란 게 뭔가요? 설마 아나스타샤는 아직 결과를 보지 않으신 건가요?”

“……응? 무슨 말이니? 결과 안 나왔잖아.”

의아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난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 그게, 홈페이지에 아마.”

“내가 여기 오면서도 봤는데 안 떴던데. 여기…… 봐 봐. 메일도 안 왔고.”

그러면서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을 꺼내 빠르게 다시 확인했다. 난 저 멀리 벨기에에 있을 칼스도르프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외쳤다.

‘당장 홈페이지에 합격자 명단을 올리지 않고 무엇 하고 있는 건가요!’

아마 명단을 올리기 전에 몇몇 사람에게 전화를 건 것 같은데…… 그럼 내일쯤 올리려나? 어쨌든 지금은 결과를 알고 있으면 안 되는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전화를 받았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나스타샤 역시 내 라이벌이자 참가자라는 걸 생각한다면 이런 이야기는 가급적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눈치 빠른 아나스타샤는 내가 당황해하고 있다는 걸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잠깐만…… 뭐야? 결과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설마 전화라도 받았니?”

“!!”

단순히 이상함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상황을 한 번에 꿰뚫어 보는 그 추리력에 깜짝 놀랐다.

유능한 수사관에게 취조를 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거의 기겁하며 올려다보자 아나스타샤는 정말이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살짝 긴장하고 있는데, 정말 감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세상에. 진짜로 결과 발표 전에 그런 전화 받는 사람이 있구나.”

“알고 계셨나요?”

“굉장히 드물게 그런 일이 있다고 들었어. 참가자 유치를 위해 운영 위원회에서 직접 움직이기도 한다고.”

난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일반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일은 또 아닌 모양이다.

아나스타샤는 충분히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특히 올해는 쇼팽 콩쿠르와 겹치니 더더욱 눈에 불을 켜고 널 빼앗기지 않으려 했나 보네.”

“그런 건…….”

“좀 밋밋하게 느껴져서 그러니?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특혜 같은 걸 줄 순 없으니까 전화로 설득하는 게 전부겠지.”

일반 쇼 프로그램 등이라면 적극적인 섭외에 따른 혜택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건 공정한 콩쿠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얻고 싶다면 알아서 높은 곳까지 올라가 따내는 수밖에 없다.

반대로 콩쿠르 측에서도 참가자에게 제시할 수 있는 건 큰 무대와 강한 경쟁자들, 그리고 엄격한 심사 위원들뿐이다.

물론 그 정도면 설득의 재료로는 충분하다. 전화를 건 칼스도르프도, 전화를 받은 나도 그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전화로 뭐랬니? 궁금하네.”

아나스타샤는 국제 콩쿠르로부터 전화를 받은 사람은 처음 본다면서 눈을 빛냈고, 난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했다.

사실 별건 없었다. 그냥 사무국의 러시아 담당 직원에게 합격을 통보받고 참가에 대한 확답을 주었을 뿐이니까.

그런데 내 이야기를 하다 보니 굳이 이렇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아나스타샤는요?”

“전화?”

“예.”

“그런 거 안 왔어.”

아나스타샤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난 그녀의 실력을, 그리고 DVD에 무엇을 녹화했는지를 안다. 꼭 참가해 달란 전화를 받아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난 다시 한번 내 생각에 확신을 가지며 팔짱을 꼈다.

“순서대로 하는 걸까요?”

“전혀. 나한테 전화까지 하진 않을걸.”

“왜요? 저라면 아나스타샤도 반드시 콩쿠르 참가자로 끌어들이고 싶을 거예요. 충분히 그만한 실력이…….”

“실력자들이 이미 수백 명 넘게 지원하고 있어.”

친구이자 라이벌로서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아나스타샤는 내 말을 자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게 전화를 한 게 이상하지 않느냔 눈빛으로 올려다보니 그녀가 가늘게 웃으며 말했다.

“그중에서 1등을 고르는 건 이제 대회 자체의 존재 의미가 되겠지만…… 사실 그 전에도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을 거거든.”

“어떤 의미에서요?”

“이런 국제 콩쿠르들은 후원하는 스폰서들이 많아서 세간에 큰 영향을 받진 않겠지만, 그래도 흥행할 수 있는 요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콩쿠르를 여는 데엔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들어간다. 특히 전 세계에서 사람들을 모으는 국제 콩쿠르라면 더더욱.

당연히 티켓을 판매하여 비용을 충당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하기에 운영 위원회는 여러 후원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후원자들이 원하는 건 바로 흥행 그 자체다.

아나스타샤는 들어 올린 손을 그대로 내 쪽으로 펼치며 약간 과장스레 이야기했다.

“열일곱 살에, 음반 단 두 장으로 올해 클래식계 최고 스타로 등극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지금 가장 강력한 흥행 카드잖아? 절대 빼앗기고 싶지 않을걸?”

“그,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 내가 틀린 말 했니?”

장난치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부끄럽다. 지금 아나스타샤의 호들갑스러운 말에 맞장구를 칠 정도로 얼굴이 두껍진 않다.

제발 그만하란 뜻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자 아나스타샤는 힘을 슬쩍 풀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은 널 기다리고 있어. 아마 네가 우승하는 걸 바라는 사람들도 정말 많을 거야.”

“…….”

예전엔 명성 등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약간 생각이 다르다. 그렇게 응원해 주는 사람들에게 부응하기 위한 마음도 분명 있다.

늘 날 응원하던 사람들을 떠올리다가 바로 눈앞에 있는 아나스타샤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떠올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날 응원하고 있다는 게 확연하게 전해져 왔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내가 잠자코 듣고 있자 갑자기 아나스타샤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손을 휙 뺐다. 그러더니 어깨를 쭉 펴며 선언했다.

“물론 쉽게 시켜 주진 않을 거지만.”

“예?”

“내가 너와 같은 무대에 서고 싶어서 출전할 콩쿠르까지 바꿨다는 걸 기억해.”

장난스러운 어조였지만 은연중에 와닿는 서늘함이 느껴진다.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마음에 따라 나와 같은 콩쿠르에 출전하길 바랐을 때, 난 진심으로 기뻤다.

하지만 그녀가 그 무대 위에서 여러 정리되지 않은 우리 사이의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어 매듭지으려 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결코 친구 따라서 그냥 해 본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날 따라오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롯한 연주자로서 무기를 쥐고 전장에 뛰어들어 자신을 증명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난 그녀를 제대로 마주해야만 한다.

“…….”

하지만 지금은 눈을 똑바로 보고 있음에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항상 그렇다. 난 아나스타샤와 같이 있을 때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솔직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바보 같은 날 보면서도 그녀는 재촉하거나 하지 않는다. 대신 피아노를 통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큰 무대에서 한번 보자는 듯 아나스타샤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그냥 어정쩡하게 탈락하진 않을걸.”

나 역시 아나스타샤가 스스로 불만족스러운 연주를 하고 탈락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 결과가 어찌 되든 아나스타샤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음악을 선보이겠지. 내가 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본다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다. 콩쿠르가 끝나고 나선 뭘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세계 최고의 무대에 서는 것뿐이니까.

그런데 약간 뒤늦게 아나스타샤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물론 DVD 예선 합격부터 해야겠지만……. 아, 어쩌지. 떨어지면 나 창피해서 죽고 싶어질 것 같아.”

“아하하, 분명히 통과할 거예요.”

“네가 그런 장담 잘 안 하는 애라는 거 아는데…….”

다른 건 모르지만 아나스타샤에 대해선 예외다.

이러쿵저러쿵 덧붙이지 않고 환한 웃음으로 답하자 아나스타샤 역시 눈빛으로만 고맙다는 인사를 보내왔다. 그 이상 말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세상 어딘가에 또 우리 같은 관계가 있을까. 아마 없겠지. 그러니 조언을 얻을 길도 없고, 책임을 져 줄 사람도 없다.

우린 직접 해답을 내기 위해 같은 시간을 따라갈 뿐이다.

***

개학 이튿날. 드디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홈페이지에 DVD 예선 합격자들의 명단이 떴고, 이메일로도 통보가 날아왔다.

전날 전화를 받고 이미 기뻐할 만큼 기뻐한 데다가 아버지와 오빠에게도 잔뜩 축하를 받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확인하니 또 한 번 기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진도 친구들과 사진관에 가서 찍은 만큼 잘 나온 것 같고…… 무엇보다 내 바로 옆에 아나스타샤도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살았다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래도 역시 합격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는지 안도보다는 기쁨이 더 큰 듯 보였다.

합격자 명단은 반 아이들에게도 큰 이슈였다.

“두 명이나 통과할 줄이야.”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전 세계에서 뽑힌 예선 참가자는 73명. 우리 학교에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하는 건 나와 아나스타샤 단 둘뿐이었다.

11학년에서도 참가한 선배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탈락한 모양이다.

탈락한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그건 앞으로 73명에게도 똑같이 주어질 시련이다. 그런 것에 깊게 얽매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경쟁자들의 전력 분석을 해 볼까?”

“맞아. 우리가 해 줘야지.”

“어디 보자…… 렌스키 로마노비치? 이 사람 잘하지 않아?”

친구들은 모두 합격자 명단을 보면서 자신이 아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중엔 정말 유명한 연주자도 있었고, 이제 막 명성을 얻기 시작한 연주자도 있었다.

명단 사이에서 난 친구들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연주자에게 집중했다.

“…….”

나와 같은 무대에 서고 싶다고 했던 건 아나스타샤뿐만이 아니었다.

임세연. 그녀는 내 그림자로부터 무언가를 맡고 날 목표로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말 그래도 되는가에 대해서 난 자신이 없고 걱정이 많았지만…… 결국 그녀가 원하는 것이 정말 그렇다면 최선을 다하여 목표가 되어 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만약 그녀에게 그 목표를 꺾을 첫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무대일 것이다.

‘생각보다 빠르게 왔나.’

세연도 이 콩쿠르에 참가한단 이야기를 들었지만, 솔직히 확률은 반반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정말 DVD 예선에 합격해서 당당하게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을 보니 내심 뿌듯함도 든다.

하지만 이 뿌듯함은 선생이나 선배가 느낄 법한 감정이다.

난 그녀에게 그런 관계성을 이을 어떠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단지 강력한 목표로서 존재하면 된다.

그 다짐은 지금도 공고하다.

“…….”

그러나 명단에 실린 세연의 사진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진다.

일전에 에르네스트가 다치고 내가 틀어박혔을 때, 세연이 친구로서 한달음에 날아와 준 것이 문득 떠올랐다.

괜한 혼자만의 기준으로 세연을 대하지 말고 그냥 친밀하고 상냥하게 대해 주기만 해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도 날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격지심과 책임감은 날 뒤돌아보지 못하게 했다.

바보 같은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곤 하나뿐이다. 누구든 날 뛰어넘으려고 하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 주는 것이다.

그걸 위한 곡들이 이미 내 손에 가득하다. 이걸 다 보여 줄 때면 나도 그녀에게 조금은 솔직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가지런히 정리한 나는 비로소 세연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아하핫.”

“왜 그래? 타티아나.”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후후.”

5초 만에 돌아온 답장에는 선글라스를 쓰고 의기양양해하고 있는 이모티콘만 있었다.

마치 지금 세연의 표정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세연이 즐겨 준다면 나도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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