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2화
10학년 2학기의 수업 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마자 나와 아나스타샤는 교무실로 불려 갔다.
연주자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국제 콩쿠르 참가.
그 준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지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모든 편의를 봐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콩쿠르가 열리는 한 달 동안 학교에 오지 못하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공식적으로 행정 처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두 달이 넘는 준비 기간 동안 수업의 비중을 줄이는 건 그냥 하고 싶다고 해서 그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근거다.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근거.
“그러니…… 딱 일주일 후에 시험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라브렌티 선생님의 말은 꼿꼿했다.
‘참 세상에 쉬운 게 없구나.’
옆을 슬쩍 보니 아나스타샤도 나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우리 손에 들린 건 문학, 수학, 화성학, 대위법, 음악사 등 여러 교과들의 3개월 후 예상 진도와 예습 자료 등이었다.
이것들을 가지고 공부해서 3점. 그러니까, 낙제를 면하는 수준의 점수만 받는다면 교과 커리큘럼을 어느 정도 따라잡은 것으로 인정해서 통과한 수업을 빠지게 해 주겠단 것이었다.
우리들만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규칙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중앙음악학교는 이런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누가 융통성 없기로 소문난 학교 아니랄까 봐…….”
“뭐라고 했습니까, 아나스타샤?”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아나스타샤는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아마 지금 상황이 꽤 합리적이라 여기는 건 나뿐인 것 같다.
물론 몸은 힘들겠지. 앞으로 일주일간은 피아노 연습에 시험공부까지 병행해야 할 테니까.
하지만 이것이 선생님들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융통성이라면 우리 역시 거기에 최선을 다해 응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정도면 사정을 많이 봐주신 것이기도 하고.
“시험 내용이 많거나 어렵진 않을 겁니다. 혼자서 수업 없이 공부했다는 걸 감안해서 테스트를 할 예정이니…… 성실하게 따라 주기만 한다면 3점은 무난하게 받을 수 있겠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납득해 줘서 고맙군요, 타티아나.”
라브렌티 선생님이 희미하게 웃었다. 가능하다면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도 좀 잘 부탁한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내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자 선생님은 그 외에도 우리 학사 일정에 필요한 정보들을 몇 가지 전달해 주고는 이만 가 봐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교무실을 나오자마자 아나스타샤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콩쿠르를 나가란 거야 말란 거야? 도대체가.”
피아노에 집중하고 싶을 때인데 난데없이 일주일 동안 공부를 하게 생겼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나도 그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래도 나까지 같이 불평을 하기보다는 그녀를 살살 달래기로 했다.
“아마 형식적인 근거가 필요하니 그런 거겠죠. 저희도 거기에 대해 성실함만 보여 주면 되리라 생각해요.”
“뭐, 그렇겠지만…….”
“그리고 일주일만 고생하면 남은 두 달은 정말 콩쿠르 준비만 할 수 있잖아요? 이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은 그 일주일도 피아노 칠 텐데? 억울하지 않니?”
아나스타샤는 불공평하다는 듯 눈을 매섭게 떴다. 하지만 난 웃으며 정론을 이야기했다.
“억울한 걸 따지려면 저희보다 10년 이상 피아노를 더 친 사람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걸 따져야겠죠?”
“…….”
내 말에 아나스타샤가 바로 조용해졌다.
콩쿠르에 참가하면서 자신의 조건이나 출발선, 준비 여건을 두고 불평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73명 모두 가진 조건이 다르지만 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모두 한 무대에 세워 경쟁시키는 것이 바로 음악 콩쿠르의 의의이기 때문이다.
열일곱 살짜리 여학생이 스물일곱 살의 청년과 정면으로 승부를 벌일 수 있는 곳은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유리한 건 별로 없었다.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지금 주어진 조건들을 불리하다고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잘 겪어 낼지를 고려해야 했다.
아무것도 억울할 것 없다. 그렇지 않냐는 듯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니 이윽고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똑 부러지는 소리를 하면 내가 할 말이 없잖니.”
“같이 열심히 하자고 하시면 되죠.”
“같이 열심히 할까?”
“그래요!”
난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일주일 동안 같이 공부한다면 분명 잘되겠지.
아나스타샤는 앞으로 공부할 생각을 하니 머리 아프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나저나 넌 대충 공부해도 3점 정도는 받을 수 있는 것 아니야? 저번 학기에서도 전부 5점이었지?”
“시험 범위가 전혀 다르잖아요.”
“그래도 말이야.”
혼자서만 공부하게 될 것 같다며 아나스타샤는 연신 앓는 소리를 냈고, 난 그런 그녀를 응원하면서 열심히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
이틀 사이 눈이 더 왔다.
설마 이전처럼 폭설이 내려서 또 학교에 가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 정도로 내리진 않았다.
그사이 난 콩쿠르와 관련하여 여러 사람을 만나거나 전화를 받기도 하고, 그에 따른 준비 역시 차근차근 해 나가고 있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불만을 토로하긴 했지만 잘하고 있는 중이었다.
같이 교과서와 예습 자료를 보고 공부한 다음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외우고 있는 것들을 맞춰 보았다.
이론에 강한 내가 조금 유리했지만 아나스타샤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고, 벼락치기에 강한 면모가 한껏 그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
그렇게 콩쿠르 때까지 수업을 빠지기 위해 시험공부에 시간을 쏟고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선순위를 착각하진 않았다.
여전히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건 피아노 연습이었다. 수면 시간은 두 시간 정도 줄었다. 그래도 난 적당히 모든 걸 잘 해내고 있었다.
“음…….”
한적한 오후. 여느 때와 같이 미하일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은 다음 혼자 연습실에 틀어박혔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 난 연습에만 집중했다.
이미 암보는 한참 전에 끝냈고, 오케스트라의 레퍼런스 역시 피아노를 연주하면 자연스레 귓가에 어른거릴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디테일한 표현력이나 해석의 완성도에선 보완해야 할 부분들이 느껴진다.
“…….”
천천히 건반을 움직이며 음색을 확인할 때마다 저울 바늘이 왔다 갔다 하듯 완성도가 흔들린다.
그 흔들림을 제어하기 위해 조금 더 고르게 소리를 펼쳤다.
거친 부분은 매끄럽게 다듬고, 빈틈이 보인다면 음악으로 채운다. 바로 1분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나는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었다.
무한정한 시간이 있다면 무한하게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나에겐 유한한, 그것도 매우 한정된 시간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이 곡에 투자할 수 있는 남은 시간을 고려하면서 난 최대한의 집중력을 끌어내어 조금씩 곡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30분 정도 더 연습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연습실 문을 노크했다.
깜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니 한 여학생이 살그머니 문을 열고는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 미안해요. 혹시 바쁘지 않다면…….”
“?”
“아!”
우리는 서로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후다닥 달려오더니 갑자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너무 가까워져서 놀란 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샬롯?”
“잠시만요. 피아노력 좀 나눠 주세요.”
“……그게 뭔가요?”
전력, 화력, 피아노력인가? 뭔가 황당했지만 일단 가만히 있었다. 왜냐하면 내 손을 잡고 있는 샬롯의 손이 작게 바르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유학을 온 그녀와 친해진 후로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다.
잠시 시간이 흘러 그녀가 조금 나아진 것 같자 난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 이유도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대체 누굴까 정말 궁금했었는데…… 그게 타티아나 언니였다니. 안심이네요. 아, 이거 콩쿠르에 올릴 곡인가요!? 맞죠?”
이야기를 듣자 하니 그녀도 작은 콩쿠르에 출전하면서 곡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옆 연습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자신의 소리가 전부 묻혀 버리는 기분을 느끼곤 연습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연습실은 방음이 잘되어 있기 때문에 나도 연습을 시작하면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거의 듣지 못하는데.
샬롯은 귀가 상당히 좋은 편인 것 같았다. 지금은 그 좋은 귀가 방해가 된 것 같지만.
“그래서 내내 듣고만 있었나요?”
“한 시간은 듣고 한 시간은 옆 연습실에 가 봐도 될지 고민했어요.”
정말 그랬다면 귀엽기도 하지만 딱한 일이다. 난 다신 그녀에게 그러지 말란 의미로 확실하게 말했다.
“유학을 와서 어렵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 연습실 문을 두드리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냥 견학을 해도 좋고, 아니면 자기 연습을 봐 달라고 요청해도 좋아요.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거의 다 흔쾌히 들어줄 거예요.”
실제로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연습을 하다 보면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견학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리고 반대로 연습을 봐 달라는 경우도 흔하다. 왜냐하면 연습이란 혼자 하는 것이지만, 결국 연주는 사람들 앞에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음악을 선보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학교에선 위클리 연주회를 기본적으로 지원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의 시선에 예민하고, 무대 위에서 긴장을 많이 하는 연주자들은 자기 연습 연주에 일부러 청중을 불러서 자신을 단련하곤 한다.
이렇게 서로를 자연스레 도와주는 건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권 음악학교의 문화였다. 그건 샬롯 역시 공유할 자격이 있다.
내가 그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 주자 이때다 싶었는지 샬롯이 조심스레 요청해 왔다.
“저기…… 그러면 잠깐만 앉아서 견학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내 허락이 떨어지자 샬롯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조금 더 가까이 앉아도 되는데 지금 그녀는 그 정도가 좋은 모양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청중이 생겼으니 조금 더 자신 있는, 혹은 샬롯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곡을 가늠하며 그걸 디테일하게 완성시켜 나가는 과정을 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걸 듣고 왔다고 하기도 했고.
일단 잘 모르겠을 땐 둘 다 하는 것이 좋다. 일단은 하던 걸 하다가 나중에 샬롯에게 리퀘스트를 받아 보기로 하고 난 건반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누가 또 노크를 해서 난 실수로 건반을 쿵 하고 짚고 말았다.
“타티아나, 들어갈게.”
그렇게 말하고 바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에르네스트였다. 그를 보자마자 샬롯은 벌떡 일어났다.
허둥지둥하는 그녀를 보며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까딱였다.
“누가 있네?”
“아, 그…… 이제 나가려고요!”
“그래?”
방금 와서 견학하겠다고 했으면서 이렇게 바로 가겠다는 건 무슨 심리인지 모르겠다. 조심스러운 것도 좋지만 너무 그러진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내가 무어라 붙잡기도 전에 샬롯은 후다닥 나가 버렸다.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기 직전에 날 슬쩍 바라보긴 했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 다시 보잔 뜻이겠지?
샬롯이 나가면서 문을 닫아 버리자 이제 연습실 안엔 나와 에르네스트 둘만이 남았다.
그는 문 쪽을 눈짓하며 물었다.
“누구야? 처음 보는데.”
“아, 샬롯이라고…… 8학년 유학생이에요.”
“피아노과?”
“예.”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더니 멀리 구석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리곤 올 때 가지고 온 봉투에서 음료수를 두 개 꺼냈다.
“뭐 마실래?”
“어…… 오렌지 주스요?”
“그래. 자.”
그리고 그는 내가 고른 캔을 따서 건네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받아 마신 나는 목을 스치는 청량감과 함께 뒤늦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연습실이야 내가 이곳을 거의 전세 내고 쓰고 있다는 걸 알 테니 헤매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왜 갑자기 찾아왔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질문에도 에르네스트는 아리송한 미소만 지으며 답했다.
“그냥 와 본 건데.”
“…….”
당연히 연습실에 왔으니까 내 연습을 도와주거나, 아니면 그의 작곡에 도움을 달라거나…… 그런 이유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저번에 그랬듯 이번에도 별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