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93화 (993/1,277)

##  993화

에르네스트가 준 오렌지 주스를 꼴깍거리며 눈동자만 옆으로 향해 그를 훔쳐보았다.

그는 자기도 목이 마른지 캔을 따 놓고는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정말 음료수를 가져다주러 온 것 말고는 아무 이유도 없는 사람 같다.

내가 집에서 연습할 때면 나제즈다도 가끔 차를 가지고 와 주긴 한다.

피아노만 붙잡고 있으면 보통 신경을 잘 돌리지 못하니까 적당히 챙겨 주는 느낌이다.

하지만 나제즈다와 에르네스트는 다르다. 음악가로서의 능력이 상당한 에르네스트가 음료수 배달 외에 궁금한 것이 아예 없을 리가 없다.

지금 내가 무슨 곡을 연습하는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정도는 궁금한 것이 당연하다.

“…….”

그런데 그는 태연하게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는 걸 보니 급한 일처럼 보이진 않는다.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러는 건 조금 예의가 아니지 않아요?

약간 어색하기도 하고, 그의 시선을 끌고 싶기도 해서 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갈증이 났었거든요.”

“다행이네. 물도 좀 마실래?”

“그, 그래요…….”

아직 반쯤 남은 오렌지 주스가 있는데 다시 물도 받아서 한 모금 머금었다. 뭔가 자꾸 이렇게 챙겨 주면 거절하기가 어렵다.

내게 신경을 써 주는 건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가서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이윽고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들더니 슬쩍 물었다.

“연습은 잘되어 가?”

“예, 덕분에요. 아직 협주곡 위주로 하고 있지만…… 슬슬 독주곡들도 시작할 생각이에요.”

드디어 본론인가 싶어서 난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에르네스트는 보면대 위에 올라와 있는 악보를 힐긋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랑은 반대네. 그 애는 에튀드부터 시작했던데.”

“취향 차이 아닐까요? 에르네스트는 어떠신가요?”

“뭐? 나?”

“예, 콩쿠르에 나가실 때요. 예선이 독주곡이고 본선이 협주곡이면 무엇부터 연습하시나요?”

뭐든 간에 잘만 하면 상관없기 때문에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약간 성격 테스트 같은 걸 하는 기분으로 물어보았다.

아마 완벽주의적 성향이 짙은 에르네스트라면 협주곡을 납득할 정도로 완성 지은 다음에 독주곡들을 시작하지 않을까.

그렇게 예상하고 있자 에르네스트가 대답했다.

“나도…… 협주곡이야.”

“후후, 우리 같네요.”

예상이 적중해서 기분이 좋았다. 일단 뭔가 공통점을 찾아내기도 했고. 앞으로 이 이야기를 쭉 이어 나가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그 공통점에 기뻐하기는커녕 별일도 아니라는 투로 짧게 말할 뿐이었다.

“그러게.”

그 밋밋한 반응을 마주하자 다음 말을 잇기가 정말 어려웠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콩쿠르 준비를 노련하게 분석적으로 하는 것도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청소년 콩쿠르에 나갔을 땐 그가 내 레퍼토리와 연습, 거기에 멘털 케어까지 여러 부분에서 코치 역할을 해 줬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별로 그렇게까지 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그가 도와준다면 난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설마…….’

혼자서 생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두운 생각도 든다.

에르네스트가 지금 나와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걸 나누고 싶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그는 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물론이고 쇼팽 콩쿠르까지 나가려고 했었던 연주자였으니까.

지금 그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물론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열정적이고 강인하다.

최근 모습을 보면 그렇게 우울해하는 것 같진 않았고, 이렇게 직접 음료수를 마셔 가면서 연습하라고 찾아올 정도로 콩쿠르 준비 중인 날 위해 준다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완전히 들여다볼 수 없는 이상 내 언행은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깊이 박힌 두려움이 이따금 고개를 든다.

“콩쿠르에 나갈 땐 말이지…….”

그래도 겁먹고 있다는 걸 그가 눈치채도록 드러내고 싶진 않았는데, 순간 흔들린 표정을 들켜 버리고 말았다.

에르네스트는 일부러 자기 입으로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준비한 협주곡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예선 준비를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 너도 비슷하다면 아마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

“완성된 협주곡을 가지고 무대에 선 널 지켜볼 수 있겠지.”

그 말은 꽤 묵직하게 내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믿고 기대하고 있어.”

에르네스트가 콩쿠르 이야기 같은 건 전혀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나만큼이나 콩쿠르 무대를 기다리고, 내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가을 연주회 때도 병실에 누워 있던 그는 날 반드시 무대 위로 올려보내려고 했다.

생각해 보면 항상 일관된 태도였다. 늘 의심하는 건 나뿐이었지.

내가 바보 같고 약한 탓이다. 이런 날 그가 참아 주고 있다는 것이 항상 미안하다.

언제까지고 이럴 순 없었다. 이제 몇 달 후면 벨기에로 가야만 한다.

그때까지 연주자로서 할 수 있는 완벽한 준비를 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에르네스트를 볼 낯이 없다.

“…….”

난 양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옆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어깨를 풀었다.

그가 날 믿는다고 해 주었으니 나 역시 그를 믿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에르네스트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이렇게 된 김에 제 협주곡 연습 좀 봐주시겠어요?”

“나 이것만 주고 갈 생각이었는데.”

“……정말요?”

지금도 가만히 앉아 있긴 하지만 언제라도 이만 가 보겠다고 하고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태도이긴 하다. 정말로 그는 그냥 갈 생각이었다.

물론 이대로 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잠깐만 시간 내어 주세요.”

“잠깐이면 얼마나?”

부탁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말하면 상처받는다.

얼마라고 딱 잘라 이야기하면 그는 그만큼 들어주겠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고 눈을 흘기며 말했다.

“방금 전에 샬롯을 내쫓으셨잖아요. 그러니까 에르네스트가 대신 들어 주셔야죠.”

“내가 언제 내쫓았어? 그 애가 나간 거지.”

“어쨌든요.”

억지를 쓰자 그는 막 일어날 것 같던 태도를 풀고는 의자에 조금 더 편하게 앉았다.

내가 한 번 억지를 쓰기 시작하면 정말 고집스럽다는 걸 잘 안다는 눈빛이다. 그는 어지간해선 그런 내게 잘 어울려 주곤 했다.

“알았어. 들어 줄게. 그런데 적당한 피드백을 주진 못할지도 몰라.”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같았다.

같이 연습을 봐줄 때면 거리낌 없이 자기 의견을 내고 보완점을 지적해 주던 그가 지금 이러는 이유가 있겠지.

그 이유도 자꾸 파고들자면 점점 머리가 어둡게 물드는 기분이 들어서 난 일부러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지금 머리와 신경 전부를 음악으로 채워 넣고는 거기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걸 듣고도 아무 말 않는다면 그땐 포기할게요.’

지금 내가 연주하는 건 그동안 연습해 온 협주곡이었다.

오케스트라 없이 혼자서 하는지라 소리가 많이 비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이 협주곡의 레퍼런스를 잘 아는 사람이니까 알아서 오케스트라를 머릿속으로 재생시키며 내 피아노만 정확하게 그 위에 올려 듣고 있을 것이다.

연주는 길지 않았다. 3악장 중에서도 첫 발전부까지의 짧은 구간.

어차피 음악성을 완벽하게 챙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적당히 필요한 부분만 들려주었다.

손을 멈추고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이번에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잘했다고 말하고 만다면 앞으로 다시는 그에게 연습을 봐 달라고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

그런데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팔짱을 끼고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빠르게 하지 않던 부분을 빠르게 처리하네……. 너 원래 그렇게 했었던가?”

“정답이에요!”

“?”

내가 기뻐하며 박수까지 짝짝 치자 그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곧 머리를 옆으로 툭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연습 봐 달란 게 아니라 퀴즈였어?”

“둘 다지요.”

“그러지 마……. 헷갈린다고.”

일부러 난 협주곡의 템포를 끌어 올리고 주법을 조금 더 파격적으로 바꾸어 휘둘렀다.

그가 제대로 듣고 있다면 무조건 반응할 수밖에 없도록.

아니나 다를까 내 낚싯바늘을 물어 버린 그는 잠시 퍼덕거리다가 곧 체념한 듯 조용해졌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그냥 넘어가려나 본데 어림없었다.

난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에르네스트의 차례예요.”

“무슨 차례?”

“요즘 작곡 중이신 곡 같은 건 없나요? 제가 봐 드릴게요.”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주자로서의 의견 정도겠지만, 그런 것이라도 지금 그에게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예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사실 작곡한 곡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그 무엇이라도 좋으니 내게 가지고 오면 그에게 되돌려 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줄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내 말을 잘 이해한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희미한 미소를 짓기만 했다.

“있긴 한데. 보여 주긴 좀 그렇네.”

“왜요? 전 연습 보여 드렸는데. 에르네스트도 보여 주셔야 공평하죠.”

“아니, 이건 안 공평해.”

공평에 대한 신념 같은 것이 있는 그였으니 이렇게 꾀면 또 한 번 낚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통하지 않았다.

그가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기보다는 정말 별개의 건이라 생각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억지로 파고들기가 애매했다.

괜히 그를 더 괴롭히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난 그가 한 번만이라도 크게 웃는 걸 보고 싶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는 기묘한 의지가 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흥…… 어차피 얼마 전에 주신 곡은 제가 가지고 있어요. 그 곡에 대해서 전 할 말이 많은데요?”

“네 해석대로 가면 된다고 했었잖아.”

“정말인가요?”

“그렇다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않냐는 말이 목구멍 밑까지 올라오려 한다.

작곡가는 악보로 말한다는 그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려 하는 것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자기 곡이 어떻게 현실에 구현되는지 궁금하지 않은 건 절대 아니라 생각한다.

“그럼 들어 봐 주세요.”

그가 무어라 하기 전에 난 건반을 짚었다.

피아노 소리가 뻗어 나가 이 방을 봉쇄하고 그 무엇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음악이 끝나기 전까지 난 그 누구라도 절대로 내보낼 생각이 없다.

붙잡힌 에르네스트는 조용해졌다.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난 신경 써서 음악을 펼쳐 나갔다.

이전에 조금 더 연습해 둔 보람이 있어서 급하게 녹음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의 음악을 발현할 수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이 정도면 내가 이 곡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정도는 잘 전해지리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연주를 마치고 도전적으로 그를 휙 돌아보았다.

“…….”

“왜.”

“아, 정말!”

한 번은 그를 내 수에 걸리게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굉장히 날카롭고 영민한 사람이었다. 절대로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

마치 아무것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인 것처럼 완벽한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를 보니 볼멘소리가 절로 나온다. 난 그에게 잔뜩 불평했다.

“왜 포커페이스이신 건가요?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당연히 일부러지. 난 지금 네가 뭘 하든 눈 하나 깜빡 안 할 자신 있어.”

“정말 그러실 것 같네요!”

나도 한 고집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고집도 정말 만만찮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그를 정말 당황하게 할 수 있는 장난들도 여럿 떠오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다.

에르네스트도 내 고집을 완전히 꺾으려 들지 않고 예의를 지켜 주었으니 나 역시 적당히 선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애먼 오렌지 주스만 홀짝이고 있자 그런 날 물끄러미 보던 에르네스트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혼자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한마디 하고 싶긴 하다. 하지만 그가 웃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은 곧 연기처럼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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