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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94화 (994/1,277)

##  994화

일주일간의 일정은 그간 겪어 온 시험 기간들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3개월 동안 공부해서 시험을 쳐야 할 과목들을 단 일주일 만에 머릿속에 집어넣으려니 아무리 기초적인 부분들만 보더라도 시간이 빡빡했다.

게다가 피아노 연습도 뺄 수 없어 같이 하려니 정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다행인 것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교과 공부를 할 땐 아나스타샤가 옆에서 같이 있어 주었고, 피아노는 미하일 선생님이 수시로 레슨을 해 주셨다.

그리고 혼자서 연습실에서 건반을 두들기고 있을 땐 종종 다른 친구들이 연습실 문을 노크하기도 했다.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 연습을 견학해도 되겠냐는 부탁, 곡 해석에 대한 교류 등 다양한 대화들이 연습실 안에서 오갔다.

그리고 가끔 오는 에르네스트는 꼭 지나가다가 들렀다면서 음료수나 과자 같은 걸 놓고 가기도 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솔직히 처음엔 뭔가 싶어서 그를 거의 반강제로 붙잡기도 했지만, 그다음에도 에르네스트는 음악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고 그냥 잠깐 앉아서 잡담을 조금 하다가 갈 뿐이었다.

뭔가 사적으로 내게 잘해 주는 것 같은데 음악적으론 거리를 두는 것 같은 느낌이 굉장히 묘했다. 예전엔 정반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물어볼 수 있을 리 없었다. 물어본다 한들 에르네스트는 적당히 피해 버릴 것이 분명했고.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난 그저 그가 연습실에 와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게 딱 일주일이 지났고, 학교에서 제공할 수 있는 편의를 우리가 제대로 받아 챙길 수 있는지 결정을 내릴 때가 왔다.

“……후.”

과목당 주관식 5문제, 시간은 20분. 총 8과목에 대한 시험이 치러졌다.

확실히 간이 시험이긴 하다. 그만큼 문제 난이도는 적당히 쉬웠다.

그러나 주관식으로 짧게 쓰고 끝내도 되는 문제가 있는 반면, 길게 서술해야 하는 문제도 있어서 꽤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리고 과목당 20분으로 짧아도 8과목을 치르면 그 시험 시간만 2시간 40분이다.

선생님들의 감시하에 중간에 휴식 시간도 가지면서 우린 총 3시간 정도 걸려 시험을 마쳤다.

시험장에서 복도로 나와 멍하니 숨을 돌리고 있자 아나스타샤는 잠을 얼마나 못 잤는지 창백한 표정으로 내 옆에 스르륵 기대었다.

나보다 큰 그녀가 이렇게 기대면 난 온 힘을 다해서 버텨야만 했다.

낑낑거리고 있었더니 나도 맥이 풀리려 한다. 힘들다고 말하려는 찰나, 아나스타샤가 뒤로 물러났다.

“채점 얼마나 걸릴까?”

“그…… 글쎄요.”

“만약 이렇게까지 했는데 모든 수업 다 들어야 한다고 하면 다 엎어 버릴 거야.”

“진정하세요…….”

광기가 어른거리는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아서 살짝 무섭다. 난 그녀도 제발 3점을 모두 넘기를 기도하며 채점이 끝나길 기다렸다.

채점은 10분 만에 끝났다. 선생님들 여럿이 한 번에 해 주신 덕분이었다.

“들어오렴.”

다시 시험장 안으로 들어서니 라브렌티 선생님과 류드밀라 선생님이 시험지를 들고 다시 보면서 말씀하셨다.

“일단 점수를 불러 줄게요. 아나스타샤부터.”

하나하나 점수가 나올 때마다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아나스타샤로부터도 긴장감이 전해져 온다.

그런데 다행히 모든 과목을 다 부를 때까지 한 번도 2점이 나오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전부 합격 커트라인을 넘어선 것이다.

“잘했어요. 정말 칭찬해 주고 싶어요, 아나스타샤.”

“감사합니다…….”

아나스타샤는 마치 모든 걸 다 쏟아 낸 연주자처럼 의자에 축 늘어졌다.

며칠이나 잠을 줄여 가며 공부한 데다가 3시간 동안 시험을 치고 났더니 방방 뛰며 좋아할 기력도 없는 모양이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내 시험지는 라브렌티 선생님이 들고 계셨다.

일단 낙제는 없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몇몇 과목은 꽤 자신 있기도 했고.

때문에 조금은 느긋한 기대감을 가지고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데, 선생님은 내 시험지 뭉치를 툭 내려놓았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라브렌티 선생님은 정말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말씀하셨다.

“모든 과목이 만점입니다, 타티아나.”

문제는 쉬웠지만 기간이 짧고 급하게 준비한지라 답안에 부족한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만점을 받더라도 내가 자신 있는 대위법이나 화성학 과목에서 받을 거라 예상했지, 설마 전 과목 만점을 받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정말이냐고 되물을 것도 없었다. 이미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선생님들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입을 열기도 전에 아나스타샤가 덥석 내 어깨를 쥐더니 마구 흔들었다.

“세상에, 일주일만 공부해도 만점이네!”

“문제가 쉬웠…….”

“그럼 너랑 같이 공부한 나는 뭐가 되니!?”

어쩐지 흔드는 게 격해지는 느낌이다. 멀미가 날 것 같다.

다행인 건 이것이 서로 승부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3점만 넘으면 되는 평가였단 점이다.

때문에 우린 이제 앞으로 피아노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다.

기뻐하는 우릴 보며 선생님들도 웃으며 말씀해주셨다.

“두 사람 다 열심히 잘해 주었어요. 이러면 우리 선생님들도 잘해 주고 싶을 수밖에 없죠.”

“수업은 처음에 이야기했던 대로 처리될 테고…… 음, 두 사람의 지도 선생님들에게도 제가 말해 놓겠습니다.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해 달라고.”

라브렌티 선생님은 꽤 적극적으로 말씀하시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날 서포트해 주시는 건 미하일 선생님이고, 어쩌면 구세프 선생님도 도와주시겠지만 이렇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는 선생님이 또 계신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준비만 남았네요?”

“예.”

류드밀라 선생님은 잠시 과거를 돌이켜 보는지 생각에 잠기셨다.

아마 선생님도 젊은 시절 콩쿠르에 참가하신 적이 많으실 테지. 그때의 기억으로 우리에게 적당한 조언이라도 해 주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옅게 웃으셨다.

“걱정은 하지 않고 응원만 해도 되겠죠?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좋은 결과가 꼭 따라올 테니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준비하길 바라요.”

지금은 다른 그 무엇보다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큰 도움이 되는지 잘 아시기에 하시는 말씀이었다.

우린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시험이 끝나고 나서도 마음을 편하게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어떤 의미론 이제야 본격적으로 연주자의 일이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오후엔 나도 아나스타샤도 각각 레슨을 받고 쭉 연습에만 매달렸다. 너무 피곤해서 당장 그냥 집으로 가서 자고 싶은 건 그녀나 나나 같은 심정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조금이라도 빨리 피아노 앞에 앉아 음악으로 머리를 채울 필요가 있었다.

오후 연습까지 하고 나오자 우린 둘 다 녹초가 되었다.

“내일부턴 피아노만 치게 될 텐데…… 체력을 어떻게 보충하지?”

“우선 잘 자는게 중요하겠죠.”

“……나 졸려, 타티아나.”

“저도요.”

교정의 벤치에 앉아 우유를 입에 물고 잠깐 쉬는 동안에도 눈이 막 감기려 한다.

찬 바람이 이따금 불어 주지 않았다면 우린 정말로 어깨를 맞대고 잠들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동안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자연스레 콩쿠르 일정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항공권은 나중에 보내 주는 건가?”

“아마도요. 숙박 안내와 함께 이메일로 보내 주지 않을까요?”

“숙박은 아마 호스트 패밀리가 있긴 할 건데…… 넌 어떻게 할 거야?”

“글쎄요. 생각해 보고요.”

외국에서 열리는 콩쿠르이다 보니 음악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생각할 것들이 많았다.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렇게 하나씩 필요한 것들을 짚어 나가다가 난 일전에 염두에 두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 그렇지.”

“뭐니?”

“아나스타샤. 드레스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참가자들은 파이널 라운드까지 간다면 한 달 동안 세 번의 무대에 올라야 한다.

남자들은 별로 어려울 것 없다. 검은색의 말끔한 연미복을 한두 벌 준비하면 될 테니까. 하지만 여자들은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진다.

“글쎄. 세 벌 챙겨 가야지?”

“그렇죠? 각 라운드별로 맞게…….”

“그냥 한 벌로 하기엔 너무 큰 무대지. 아무래도.”

연주자용 드레스에 대한 규정이 특별히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한 벌로 나가도 상관은 없다.

현지에서 빌리더라도 보통 그리 비싸지 않으니 그렇게 해도 괜찮고.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콩쿠르가 계속되면서 음악 외적인 경쟁도 치열해졌고, 심지어 현대는 콩쿠르의 모든 장면이 다 텔레비전으로 전 세계에 송출되는 시대이다.

클래식 연주자로 살면서 자신이 어떻게 비춰질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때문에 이 정도 규모가 되는 국제 콩쿠르라면 각 라운드마다 자신이 준비한 음악에 맞춘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곡 정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긴 해.”

“그렇죠.”

이 드레스를 고르는 일도 상당한 스트레스이긴 하다. 단순히 보자면 괜한 신경을 더 써야 하는 요소이니까.

하지만 세 번이나 스타일을 바꿔 가며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건 유리한 기회라고 봐야 했다.

다른 사람 혹은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차별점을 둘 수 있는 쉽고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을 난 간과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 역시 의상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아 보여서 난 그녀에게 넌지시 제안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괜찮다면 저랑 같이 아델리나에게 가 보지 않으실래요?”

“아델리나?”

“예. 아델리나 페트로브나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기본적으로 디자이너인 아델리나의 팬인 데다가, 저번에 그녀의 공방에 갔었던 후로는 더더욱 존경하는 듯했다.

내가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아나스타샤는 금방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설마 그분이 네 드레스 맡아 주신대?”

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저번에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콩쿠르에 나갈 때도 제 의상을 맡을 만한 다른 특별한 사람이 없다면 꼭 자신에게 맡겨 주면 좋겠다고 하셨거든요.”

“저번에 인터뷰할 때 진짜 예뻤어! 아델리나에게 맡긴다면 걱정 안 해도 될걸?”

“그땐 제가 호의를 입었으니까…… 이번엔 정식으로 발주를 할까 생각 중인데. 혹시나 해서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도 했었거든요. 그랬더니 흔쾌히 승낙해 주셔서…….”

“뭐? 진짜!?”

힘없이 벤치에 늘어져 있었던 것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나스타샤는 내 팔을 끌어안더니 잔뜩 들뜬 눈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난 기뻐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가시는 거죠?”

“당연하지! 지금 바로?”

“우선 전화부터 해 볼게요.”

아나스타샤는 그럼 얼른 해 보자며 아우성이었다.

오전에 시험에 전부 통과했을 때도 이 정도로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역시 이야기하길 잘한 것 같다.

아델리나에게 전화를 하자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참가자 명단을 보고는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며 웃었다.

-설마 다른 사람 찾은 건가 싶어서 마음 졸이고 있었지 뭐야.

“죄송해요, 아델리나.”

-후후, 괜찮아. 이렇게 전화를 준 게 어디니? 그럼 바로 공방으로 올래? 내가 차 보내 줄까?

“어딘지 아니까 저희가 갈게요.”

아델리나는 언제든 좋으니 방문해 달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난 아나스타샤의 손을 이끌고 일어섰다. 이렇게 서서히 한 발자국씩 우리는 국제 콩쿠르 무대에 오를 연주자로서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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