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5화
아델리나가 있는 곳은 모스크바 한복판에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건물이 통째로 그녀의 소유이며 1, 2층은 부티크와 피팅 룸으로 사용하고 3, 4층을 디자인이나 작업 등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평소의 화려한 모습이나 세계적인 명성, 부티크를 겸하는 공방 등을 보기만 해도 아델리나는 성공한 디자이너로 보인다.
그러나 그간 아델리나와 만나면서 느꼈던 가장 프로다웠던 점은 그녀가 지금도 자신의 예술욕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란 점이었다.
처음부터 직접 의상을 만들거나 모델을 찾으러 발로 뛰어다니지 않아도 그녀를 찾는 사람은 많을 텐데, 아델리나는 그런 것보다 자신의 원하는 일을 우선시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최근에 든 것은 굉장한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훈장 수여할 때 네가 워낙 멋있었잖니.”
“그런 말 마셔요…….”
첫인상이 아무래도 일반적이진 않았겠지. 내 나이에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나누길 잠시, 우리는 금방 아델리나의 매장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이 닫혔는데요?”
“그러게?”
그런데 매장 유리문 앞엔 닫혔다는 팻말만 걸려 있었다. 아까 전화를 했을 때 아델리나도 어디 다른 곳에 있었나 싶어서 잠시 기다릴 때였다.
어두운 유리문 뒤에서 실루엣이 일렁이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어서 오렴!”
깜짝 놀란 나와 아나스타샤가 뒷걸음질 치자 아델리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우릴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신 건가?
“들어와.”
“실례합니다.”
“아하하, 실례는 무슨. 내가 초대했는데.”
아델리나를 따라 들어갔더니 그녀가 다시 바로 문을 잠가 버렸다. 매장을 닫았다는 팻말도 바로잡는다.
우리가 멈춰 서서 보고 있자 아델리나는 손가락을 툭툭 튕기며 말했다.
“지금부터 바빠질 텐데 손님이 와서 부르고 하면 안 되잖아? 그래서 우리 직원들도 집에 다 보내고 문도 닫은 거야.”
“그, 그렇게까지……. 기다려도 괜찮은데요, 저희는.”
“내가 안 괜찮아. 난 일 그렇게 안 해.”
한참이나 어린 우릴 위해서인지 친근하고 상냥한 말투로 말하다가도 이럴 때 단호하게 말하는 아델리나에게선 프로의 면모가 물씬 느껴졌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우린 3층으로 올라갔다.
‘뭔가 더 늘어난 것 같은데……?’
유리와 선반 등으로 가려진 작업실 쪽을 힐긋 보니 저번에 와서 옷을 맞춰 갔을 때와 비교하니 약간 달라진 느낌이다.
아나스타샤도 바로 그쪽에 관심을 보였지만, 우선 우리는 그 옆에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테이블에 빙 둘러앉자 아델리나가 음료수를 하나씩 가지고 왔다. 감사를 표하고 목을 축이자 그녀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물었다.
“요즘 어떠니? 예선 통과하고 나서 뭐 달라진 거 없어?”
“글쎄요…….”
발표가 난 이후 일주일과 그전을 비교해 보면서 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축하를 받고, 내 편의를 많이 봐준다는 기분도 느낀다. 하지만 그런 걸 말하자니 조금 부끄럽다.
그런 것 말고 내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까 하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선수를 쳤다.
“오늘 저희 시험만 여덟 과목 쳤어요.”
“시험?”
역시 제일 흥미가 갈 만한 이야기였다.
아델리나는 갑자기 상상도 못 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고, 아나스타샤가 마치 참전 용사라도 된 것처럼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로 지난 일주일에 대해 말했다.
학교에서 우리에게 건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델리나는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굉장히 바빴겠네?”
“거의 죽을 뻔했어요.”
“어쩐지, 너희 둘 다 예쁜 얼굴이 수척해졌어. 피아노 연습하느라 그런가 했지 뭐야?”
“피아노 연습도 했고요.”
우리는 학교의 조건만 수행하지 않았다. 일주일이란 시간은 무척이나 길다.
콩쿠르 준비를 앞두고 일주일이나 그대로 손해를 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일주일간 지냈는지 이야기를 마치자 아델리나는 허벅지를 팡팡 쳤다.
“정말 너희 학교 장난 아니구나? 나라면 그냥 학교 안 갔을걸?”
“그럼 졸업 안 시켜 줄걸요.”
“대단하다. 아하하, 옛날 생각이 나네. 난 학교 다닐 때 이탈리아가 너무 가고 싶어져서 그냥 한 달 동안 떠나 버린 적도 있었거든.”
“……그냥 떠나신 거예요?”
“응. 그것도 벌써 20년도 더 된 이야기이긴 한데. 그땐 한창 사회도 엉망이고 뭐…… 아, 이런 이야기는 해 봤자 재미없겠네.”
힘든 이야기는 이쯤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자는 듯 아델리나가 음료수를 옆으로 쓱 치워 놓고는 테이블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나저나 너희가 나가는 콩쿠르 티켓 구하기 정말 어렵더라. 저번 주에 인터넷으로 티켓팅하는데 우리 직원이 안 도와줬으면 못 할 뻔했어.”
“앗, 티켓 사신 건가요?”
“응. 그래야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아델리나가 대답했다.
“내 작품들이 무대에 오를 텐데 그걸 직접 보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녀가 그렇게까지 생각해 줄 줄은 몰랐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 놓더라도 그럴 것 같았다. 내가 만든 무언가가 무대에 오른다면…… 그걸 놓칠 순 없겠지.
아마 예술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고 난 에르네스트가 예외적인 언행을 보이는 중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곡에 대한 피드백을 별로 원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다. 여기 다른 종류의 예술을 하는 아델리나와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인데.
‘그건 나중에.’
괜히 또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 버리며 난 눈앞의 아델리나에게 집중했다.
그녀는 아예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 주면서 실제로 티켓을 제대로 예약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까지 했다.
이렇게 진심으로 관심을 쏟아 주는 건 무척이나 기껍다. 나 역시 그녀에게 협조해야 할 일이라면 얼마든지 그리하고 싶었다.
마침 제대로 논의해야 할 일도 있으니 잘되었다.
“그래서…… 정식으로 발주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응, 얼마든지. 그럼 몇 벌? 예선과 결선 두 벌?”
“중간에 준결선이 있어서…… 세 벌이요.”
“역시 국제 콩쿠르네.”
기본적으로 여러 벌을 예상했는지 아델리나는 세 벌이란 말을 듣고도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 정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되레 더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 일단…… 그래, 샘플부터 좀 보여 줄까? 저번에 네가 방송국 나갈 때 골랐던 걸 토대로 몇 가지 추려 놨거든.”
“예, 보여 주셨으면 해요.”
손짓하며 아델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옆의 작업실로 향했다.
그리고 난 왜 이곳의 분위기가 바뀌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게 설마 다……?”
“응. 추렸다기엔 좀 많나?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것도 있거든. 저 애도 콩쿠르에 나간다고 하니까 흥미가 생겨서.”
작업실엔 드레스가 걸린 행거가 열 개도 더 있었다.
일반적으로 매장에서 쓰는 여러 벌을 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딱 한 벌만을 제대로 보여 주는 행거였다.
아델리나가 직접 챙겼다는 말에 아나스타샤는 눈을 반짝이며 드레스 쪽으로 향했다. 한눈에 봐도 무엇이 자신의 것인지 알아보는 눈치였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의상들을 살폈다.
‘정말 프로의 솜씨라는 걸 알겠어…….’
클래식 연주자들에게 부여된 암묵적 의무 중엔 포멀한 의상과 태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너무 과하게 화려하거나 파격적이면 심사에 불리할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손과 발을 모두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우리 연주자들에게 있어 드레스는 곧 운동복과 다를 바 없기도 했다.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포멀하면서도 움직이기에 편하고, 그런데도 눈에 잘 띄어야 한다는 조건은 모두 만족시키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난 그녀의 작품들을 보자마자 그 모든 조건을 거의 완벽히 만족했음을 직감했다.
“…….”
아델리나는 실용성보다는 예술적 감각에 주안점을 둔 독특한 하이패션으로 유럽에서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실용적이고 클래식한 아름다움이 흐르는 의상에도 그 솜씨를 여과 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여러 번 무대에 서면서 의상에도 상당한 신경을 써 왔고, 덕분에 보는 눈도 상당히 높아졌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런 내 심미안이나 분석을 위한 태도 같은 건 아예 무의미할 정도로 아델리나가 준비해 놓은 의상들은 수준이 높았다.
무슨 말로 찬사를 보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나 기절할 것 같아…….”
아나스타샤는 진짜로 어지러운지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이 중에서 세 벌만 고르라고……?”
“정말 어렵네요…….”
그나마 한 벌이 아니라 세 벌을 고를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고른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어떤 순서대로 입어야 할지 또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선곡만큼이나 어려운 과제를 눈앞에 마주한 기분으로 서성이고 있자 아델리나가 기분 좋게 웃었다.
“너무 고민하지 말고 편하게 골라 봐.”
“정말로 전부 멋진데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가볍게 찬사를 받아들이며 아델리나는 우리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옆에서 의상들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아델리나가 내 어떤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여 이 의상을 만들었는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더더욱 말을 꺼내기가 무서워진다.
아무리 가볍게 해 주려고 해도 우리가 곤란해하자 아델리나는 살짝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때 옆에 같이 있던 다른 아이는? 그 아이는 콩쿠르 안 나가니?”
“아, 발렌티나는 쇼팽 콩쿠르에 참가해요.”
쇼팽 콩쿠르의 DVD 심사 결과는 3월 중순경에 나온다고 전하자 아델리나는 그렇다면 발렌티나도 다음에 데리고 와 달라고 말했다. 그 눈빛엔 이미 의욕이 가득했다.
우연히 마주한 인연임에도 아델리나는 우리에게 무척 신경을 써 주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우릴 귀엽게 봤기에 나오는 친절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델리나는 우리 같은 어린애들을 상대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지금까진 약간 모호했지만, 이젠 알 것 같다. 아델리나가 우리를 보는 눈빛과 목소리엔 어떠한 미지의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이 반드시 큰 무대에 설 것이란 확신.
발렌티나도 당연히 DVD 심사 정도는 통과할 테고, 우리는 결선에 올라 드레스 세 벌을 입을 수 있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았다.
이 정열적인 디자이너의 강력한 믿음은 우리에게도 큰 감명으로 남았다.
***
아델리나의 제안을 발렌티나에게 전했더니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진짜로? 진짜 그분이 그렇게 말해 주셨어?”
“예. 이미 드레스를 결정한 것만 아니라면…….”
“그렇지 않아도 새로 할 생각이었어!”
쇼팽 콩쿠르처럼 큰 무대를 준비하면서 음악도 음악이지만 의상으로도 고민하고 있었던 건 발렌티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명성이 높은 아델리나에게 의상을 맡기면 비용이 만만찮을 거라며 겁을 먹기도 했지만, 그 부분은 아델리나가 최대한 평범한 기성복 가격으로 맞춰 주기로 했으니 그렇게까지 부담스러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어디서 드레스를 보더라도 그 정도 가격은 한다.
드레스에 대한 고민이 곧 기대로 바뀌자 발렌티나는 잔뜩 들뜬 얼굴로 스마트폰을 들고는 이전 쇼팽 콩쿠르에 있었던 드레스들을 쭉 보면서 어떤 게 마음에 들었었는지 꼽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즐겁게 스마트폰을 가운데에 놓고 이야기하던 발렌티나가 갑자기 불안해졌는지 툭 내뱉었다.
“물론 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분명 잘될 거예요.”
“그런데 잘되어도 문제야. 난 너희가 하는 걸 봤잖아? 나도 시험 쳐야 하는 거야……?”
그것도 걱정이긴 했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같이 공부하기라도 했지, 발렌티나는 정말 혼자서 해야 할 상황이다.
아나스타샤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니까 미리 같이 좀 하지 그랬어.”
“난 너희들이랑 일정이 다르잖아. 그리고 만약 생고생 잔뜩 해 놓고 떨어지면 얼마나 창피해!”
5월 한 달 내내 열리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와 달리 쇼팽 콩쿠르는 예선이 4월에 2주간 치러지고, 이후 반년의 텀을 두고 결선이 10월에 3주 동안 진행된다.
때문에 발렌티나가 콩쿠르를 준비하는 일정은 나나 아나스타샤와는 완전히 달랐다.
긴 텀이 있기 때문에 참가가 결정되기만 하면 발렌티나는 학교 수업을 한 달 정도만 타협하면 된다. 그 정도는 우리가 했던 것보다 쉬우리라.
그렇게 우린 모여서 콩쿠르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반에서 쇼팽 콩쿠르에 지원한 다른 아이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
막 질문에 답해 주고 있을 때였다. 난 멀리서 느껴지는 묘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에르네스트는 날 바라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니 싱긋 웃고는 다시 자기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아서 콩쿠르 준비도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한 미소였다.
그가 안심해 주는 건 다행이다. 하지만 난 약간의 의문을 안고 있었기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 더 자세히 들어 보고 싶기도 했다.
‘아델리나는 티켓까지 구매했대요. 자기 작품은 직접 봐야 한다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속으로 그런 말을 떠올리던 난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자꾸 바라선 안 될 것들을 바라고 싶은 건 내 욕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