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96화 (996/1,277)

##  996화

3월이 되어도 날씨는 여전히 쌀쌀하다.

세연은 코트 자락을 잘 여미고 발을 내디뎠다. 이 시간에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건 세연뿐이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조금 더 일찍 나왔네.’

수업을 받지 않고 오전 내내 학교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다가 점심에 조퇴할 수 있게 된 건 세연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허락을 얻어 내기까지의 과정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학교에선 세연의 수업을 빼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 역사상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세연은 자주 학교를 쉬었기 때문에 출석 일수가 그렇게 여유롭지 않기도 했다.

세연이 부모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도 타협안은 오전 수업은 마치고 오후에 학교에서 피아노 연습까지 하는 것으로 나왔다.

그랜드 피아노도 아닌 업라이트 피아노로 하는 연습은 사실 암보 외엔 그리 큰 연습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며칠간 학교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는 세연의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준 건 그녀의 피아노를 지도하는 박 교수였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박 교수는 그대로 직접 학교에 찾아가서 교감을 대면하고 담판을 지었다.

둘 사이 무슨 말이 오갔는지 세연은 모르지만, 다음 날 교감은 세연을 불러내선 일단 학교에 등교해서 오전 시간을 피아노 연습으로 보내야 한다는 조건만 지켜 준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이 정도면 엄청나게 편의를 많이 봐준 것이란 걸 아는 세연은 감사히 그 조건에 응했고, 덕분에 많은 시간을 연습에 할애할 수 있었다.

「…….」

생각하면 할수록 세연은 운이 좋았다.

유명 음악대학의 교수님을 만나선 제자가 되었고, 열심히 배워서 불과 몇 년 만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라는 엄청난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교수님이 또 도와주셨고.

그렇게 여러 도움과 행운을 통해 다다른 곳엔 세연이 현재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세상에 이런 행운아는 몇 없겠지.

그런 생각만으로도 세연은 기쁜 마음으로 연습실로 향할 수 있었다.

「음.」

물론 마음처럼 연습도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학교 근처의 연습실에 도착한 세연은 방금 전 편의점에서 산 샌드위치와 초코우유, 그리고 홍삼액을 꺼냈다.

무엇보다 체력이 우선이라며 엄마가 챙겨 준 것이었다.

뭔가 말도 안 되는 조합이었지만 막상 먹어 보면 맛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것보단 연습실에 혼자 앉아서 먹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외로움이 더 컸다.

물론 하루 이틀 이렇게 해 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세연은 별 감정 없이 대충 점심 식사를 마쳤다.

그런 다음 혹시 메시지 등이 오지는 않았는지 스마트폰을 잠깐 확인한 후에 가방에 넣고 뒤쪽에 던져 놓았다.

딴청을 부릴 시간이 없었다. 양손을 가볍게 스트레칭하자마자 세연은 곧장 건반을 짚었다.

‘오늘 목표치는 해야 해…….’

학교 음악실에서 업라이트 피아노로 건반을 외워 놓은 것을 다시 그랜드 피아노로 섬세하게 인지하는 시간이었다.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짜증도 난다. 하지만 늘 안 되는 것을 되도록 만드는 일을 반복해 왔던 세연은 쉽게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더더욱 집중력을 끌어모아 어떻게든 되게 만들 뿐이다.

그렇게 만든 만족스러운 연주는 머리와 손가락에 잘 기억시켜 놓는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불가능과 단점을 찾아간다. 그 험난한 여정은 곡이 끝날 때까지 반복된다.

지금까지 배워 왔던 것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해야 하는 것. 모든 것이 손끝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연습에 임하다 보면 시간도 순식간에 지나가고, 체력도 순식간에 소진된다.

겨우 2시간 정도 앉아 있었을 뿐인데 세연은 기진맥진해진 상태로 연습실 문을 열고 나왔다.

「…….」

좁은 복도에 양옆으로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형적인 연습실이다.

세연은 이 공간을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외면하며 정수기 쪽으로 가서 물을 마시곤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있는 방 역시 좁다.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들어가고, 사람이 앉으면 등 뒤로는 공간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집중해야 하는 건 이 눈앞에 있는 피아노였다.

세연은 손을 들어 올렸다.

다시 스스로를 돌이켜 단점을 찾고 그것을 피아노에 쏟아 내어 되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수정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연주하고 연구하고 피드백하는 과정을 몇 번 거치다 보면 체력이 떨어지는 것보다 집중력이 먼저 떨어진다.

세연은 그래도 마지막까지 집중하면서 오늘 그녀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에 최대한 근접한 후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시간은 이미 5시간 가까이 흘러 있었다.

「아이고 팔이야.」

세연은 앓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가방을 뒤적였다. 그리고 막 스마트폰을 꺼내자마자 벨이 울려서 기겁했다.

「까, 깜짝이야…….」

중얼거리며 화면을 보니 종혁 오빠란 이름이 떠 있었다. 같은 선생님을 두고 있는 그녀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알게 된 지는 꽤 되었지만 이렇게 친해진 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종혁은 그간 대체 어떻게 모른 척하면서 지냈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세연에게 잘해 주었다.

가끔 먹을 걸 사 주거나 차로 집에 바래다주는 등 친오빠도 잘 안 할 일들을 하곤 했다.

그만큼 세연 역시 가끔은 동생처럼 굴기도 했다.

「왜요?」

-「좀 살갑게 받아 주면 안 되냐?」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그렇게 물었더니 종혁이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눈에 선해서 세연은 숨죽여 킥킥 웃었다.

그러고는 똑같이 다시 물었다.

「왜요?」

-「……됐다.」

듣기에 따라선 굉장히 예의 없게 느낄 수도 있었는데, 종혁은 이런 사소한 것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다.

다짜고짜 그는 세연의 위치부터 물었다.

-「어디야? 슬슬 레슨할 시간이지? 데려다줄게.」

「뭐예요? 갑자기 착한 것처럼…….」

-「난 원래 착했거든?」

좋은 사람인 건 확실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또 쉽게 동의해 주기가 싫은 묘한 심리가 있다.

세연이 말없이 또 무언가 장난을 칠 낌새를 보이자 종혁은 먼저 철벽을 치듯 말했다.

-「나도 할 짓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교수님 잘 계시는지 한 번 뵈러 갔는데, 일 없으면 너 데리고 오라고 하셔서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할 일 없는 것 맞…….」

-「아, 싫으면 버스 타고 오든가.」

그래도 상관없긴 하지만 굳이 전화까지 해서 데리러 오겠단 사람이 있는데 버스를 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지금 1분이 아쉬운 세연에게 있어서 길에서 버리는 시간은 최소화하는 게 제일 좋기 때문이었다.

콩쿠르에서 입상하면 세 배로 갚아야겠다 생각하며 세연은 말했다.

「여기 학교 앞 연습실이에요.」

위치는 이미 종혁도 알고 있는 곳이라서 그렇게만 이야기하니 알겠다며 그가 전화를 끊었다.

세연은 다시 마지막으로 피아노 건반을 오르내리며 손을 푼 뒤 코트를 입고는 연습실을 나왔다.

장기 대여 중인 이 연습실은 사람이 없어서 그냥 문을 닫고 나오면 자동으로 전자 도어 록이 잠긴다.

밑으로 내려오자 이미 종혁이 길가에 차를 세우곤 조수석 창문을 내려놓고 있었다.

「타.」

「어휴.」

기껏 태우러 왔으면 좀 착하게 말해 주면 안 될까? 무슨 짐짝 싣듯 말하니 괜히 타기 싫어진다.

그래도 빨리 레슨을 받으러 가는 것이 최우선이라 되뇌며 세연은 조수석 쪽에 올라탔다. 종혁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벨트 매.」

「매려고 했어요.」

「오랜만이네, 너 태우고 가는 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세연은 벌써부터 기억력에 문제가 있냐는 투로 물었다.

「저번 주에도 태워 줬었잖아요. 집에 갈 때.」

「그랬었나.」

하지만 종혁은 아무렇지 않게 흘려 버리더니 이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니까.」

타자마자 투덕거리는 것도 잠시, 세연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장난도 서슴없이 잘 치는 종혁이 가끔 이런 태도를 보일 때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무언가 빚이라도 진 듯이, 아니면 세연의 성취를 도와야 할 의무가 있기라도 한 것 같다.

그것이 박 교수님과 얽힌 무언가라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거기서 비롯된 어떤 기대를 받는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세연은 그런 걸 부담스럽게 느끼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구는 건 부담스러웠다.

「그렇진 않…….」

「아, 그보다 진짜 고루하고 재미없는 거 하나 물어봐도 돼? 연습은 잘되어 가?」

세연이 이런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종혁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실수를 덮어 버리듯 얼른 다른 말을 꺼냈다.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을 굳이 붙잡고 늘어질 필요는 없다. 세연도 좌석에 몸을 묻으며 대답했다.

「그럭저럭요.」

「오, 협주곡 리허설 준비는 어때? 교수님 말로는 다음 주쯤 이야기하시던데.」

「으아.」

「초견 훈련은 제대로 하고 있어?」

「아아아!」

그렇다고 갑자기 이렇게 머리 아픈 소리를 해도 되는 건가?

세연은 양쪽 귀를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물론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귀 막아도 소용없어. 어차피 해내야 하는 거니까. 해낼 거고.」

「준비를 조금 더 일찍 할 걸 그랬나 봐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까지 남은 기간은 두 달.

물론 DVD 심사 통과를 전제로 놓고 그 전부터 계속 연습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집중력에서 차이가 확 벌어진다.

심지어 학교 수업을 계속 듣고 있기도 했고.

안 그래도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불리할 것 같은데, 이래서야 더 불리해질 것 같단 억울함이 살짝 올라왔다.

하지만 그런 억울함도 결국 변명이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타티아나는 같은 콩쿠르를 준비한다고 하면서도 작년 말에 음반까지 낸 것이다.

심지어 뭇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퀄리티의 음반을.

세연이 약간 심경이 복잡한 표정을 짓자 종혁은 키득거리며 웃더니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아예 4년 더 준비하는 게 낫겠지.」

「하지 말란 거예요?」

「아니. 불완전함에 겁먹지 말란 거야. 넌 이번에 만나고 싶은 애가 있어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거잖아? 그 노력이 널 여기까지 올려놓았고.」

그 말대로였다. 세연은 타티아나의 음악에서 무언가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둘이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기도 했지만, 수많은 청중들이 있는 큰 무대에서 치열하게 음악의 무게를 달아 보고 싶다는 충동도 느꼈다.

그 상반된 바람이 대체 무엇일까 한참이나 고민해 본 세연은 이윽고 해답을 찾아냈다.

세연은 타티아나를 감동시키고 싶었다.

그렇게나 강인하면서도 꼭 세연 앞에서만 유난히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 피아니스트에게 그간 갈고닦은 실력을 선보이고 싶었다.

어째서 몇 번이나 숙제를 내어 주고 지켜보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 세연이 샌드위치로 점심을 떼우고 5시간 내내 연습실에서 피아노와 씨름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그런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종혁은 그걸 알면 되었다는 듯 말했다.

「그 목표나 집념이라는 게 피아니스트에겐 생각보다 굉장히 중요하거든.」

만약 타티아나라는 사람을 몰랐다면 세연은 사실 이렇게까지 힘내서 하진 못했을 것 같았다.

물론 피아노 소리를 좋아하니까 혼자서 열심히 해 봤겠지만 분명 적당한 수준까지 올려놓은 후엔 방향을 잃었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바로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세연은 다시금 그녀의 음악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옆의 종혁에게 물었다.

「제가 그 애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했었죠?」

「뭐, 불가능한 건 아니겠던데.」

「그 음반을 듣고서도 말이죠.」

「그랬지.」

그 말도 안 되는 실력의 음반을 듣고 세연은 경외심만 느꼈다.

하지만 종혁은 세연의 목표와 그 목표의 실력을 확인하고도 비웃거나 하지 않고 진지하게 할 수 있을 거라 말할 뿐이었다.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가.

세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는 건 그때 오빠가 그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차 태워 주는 게 전부라고 하진 마세요.」

「……그래.」

종혁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어딘가 약간 기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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