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997화 (997/1,277)

##  997화

버스로 가면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를 종혁은 30분 만에 데려다주었다.

자가용이 특별히 더 빨리 달리는 건 아니지만 정거장을 거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시간 절약이 상당히 된다.

집 앞에 서서 세연이 내리자 종혁이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따라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종혁은 그저 손을 흔들 뿐이었다.

「오빤 같이 안 올라가세요?」

「나야 뭐…… 아까 교수님 뵈었으니까.」

「그래도요.」

바로 가야 하더라도 잠깐 올라가서 인사 정도는 하고 가면 좋을 텐데.

그러나 종혁은 자신이 가 봐야 방해만 될 것이라는 듯 짧게 말했다.

「레슨 잘 받아.」

「……데려다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긴 뭘.」

설득해서 같이 올라가는 건 불가능했다.

세연이 일부러 예의를 차려 고개를 숙이자 종혁은 답지 않은 짓 하지 말라며 크게 웃더니 곧 차를 끌고 사라졌다.

왜 종혁이 그냥 가 버렸는지 약간은 알 것 같았다.

교수와 종혁은 이제 서로 사제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주 안부를 묻고 가깝게 지내는 관계였지만, 3월이 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교수는 평소 인자하지만 3월만 되면 사람이 약간 바뀐다.

물론 세연에게 내색하는 일은 없지만, 종혁과 있으면 어두운 분위기가 되는 걸 곧잘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종혁은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준 것이다.

세연이 콩쿠르 프로그램 레슨을 받아야 하는데 괜히 교수님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세연에게도 피해가 갈 테니까.

‘차라리 내가 있을 때 이야기하지…….’

하지만 세연은 자신이 피해를 입는다기보다는 차라리 완충제 역할을 하더라도 교수와 종혁이 안 좋은 무언가를 떨쳐 내길 바랐다.

아직까진 잘되지 않았지만…… 우선 콩쿠르에서 어느 정도 결과를 얻어 낸다면 그걸 빌미로 자리를 만들어 볼 생각도 있었다.

고등학생인 세연의 생각으론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교수님, 저예요.」

「들어오려무나.」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교수가 미소로 맞이했다. 몇 년이 지나도 항상 그 모습 그대로인 분이시다.

세연이 문을 닫고 신발을 벗자 교수는 그녀의 뒷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찾는 눈치다.

‘이것 봐, 찾으시잖아요.’

이미 도로를 달리고 있을 종혁에게 핀잔의 텔레파시를 날린 뒤 세연은 빠르게 말했다.

「종혁 오빠는 절 데려다주고 갔어요. 대신 인사 전해 드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바쁜 일이라도 있나 보군…….」

뭔가 자꾸만 변명해 주게 된다. 그 자체로도 긴장감이 들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멀뚱히 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레슨실로 들어가서 세연이 코트를 벗자 박 교수가 물었다.

「계속 연습하다가 온 것 같구나.」

「예. 보자…… 오늘은…… 오전에 학교에서 3시간, 그리고 오후에 5시간 했어요.」

「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했거늘.」

「에헤헤.」

일단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잔뜩 어필하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교수 역시 그런 세연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었다.

세연이 최대한의 시간을 끌어 쓸 수 있도록 도와준 건 다름 아닌 교수이기도 했으니.

절대적인 연습 시간은 중요하다. 무대에서 단 30분 연주를 하기 위해 연주자는 그것의 백 배는 되는 시간을 투자해야만 한다.

아무리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라 하더라도 연습 없이 무대에 오를 순 없다.

물론 모든 피아니스트가 똑같은 시간으로 똑같은 결과를 뽑아내진 않는다. 거기에서 천재성이 차이나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집중도 잘했죠.」

세연은 스스로 천재라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귀가 조금 밝고, 집중력과 인내심이 좋을 뿐이다.

자신있어하는 세연의 모습을 보며 교수는 피아노 앞으로 손을 펼쳤다.

「그럼 한 번 볼까.」

그 말을 일종의 신호로 알아듣고, 세연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일부러 손을 풀거나 웜업을 하진 않는다. 무대에 오른 피아니스트에겐 손을 풀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모든 연습은 실전처럼 할 필요가 있었고, 교수 앞에서의 연습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빠르게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으로 준비를 마치자마자 세연이 건반을 짚었다. 오후 내내 연습하던 곡이다.

저번 레슨 때 지적 받았던 부분들은 말끔하게 고쳐 왔다. 그리고 거기에서 세연은 그치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결코 그 음악은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완벽하게 소화한 다음 다시 만들어 내야만 비로소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 되는 것이다.

그 완성도를 추구하는 방식은 경애하는 피아니스트인 타티아나로부터 배웠다.

타티아나는 그 어떤 것도 밋밋하게 연주하는 법이 없었다. 모든 곡에 자신의 의지와 영혼을 밀어 넣는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해 온 세연은 지금 아주 작은 실마리 정도는 붙잡고 있었다.

「…….」

그렇게 연습해 온 연주를 끝마쳤다. 악보를 들고 엄격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교수는 한 손만 들어 보이며 말했다.

「거기, 프레스토부터 다시.」

세연은 교수가 그렇게 요청하리란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아무 말 없이 다시 연주를 반복했다.

마지막 음을 누르자마자 단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다시.」

무언가 혼자서 깨달아 보라는 건가?

하지만 세연은 이미 스스로 깨우친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 이 연주야말로 현재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해석이다.

최대한 단점을 찾아 고치고 또렷하게 연주해보려 해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다시 빠르게 연주를 마치고 나니 살짝 힘들어졌다.

박 교수는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세연에게 물었다.

「저번에 나와 이야기했던 것과는 다른데?」

「아, 약간…… 하다 보니.」

「하다 보니 그리되었다는 건 이유가 안 된단다. 어째서 이런 해석으로 연주했어야 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연주자 본인만 할 수 있으니까.」

설명을 해 보란 말을 듣자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물론 음악이론이나 음악사, 시대상, 작곡가의 배경 등 여러 가지 공부한 것들에서 적당한 이야기들을 끌어내어 이유로 삼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세연은 자신의 연주를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기 싫었다.

「설명…… 어, 음…… 음악으로…….」

「이미 음악으로 다 말했다고 하려고?」

예리하게 찌르는 듯한 말에 세연이 움찔했다. 아직 연습 중인 곡으로 너무 잘난 척하는 듯 굴었던 것 같다.

조금 움츠러든 세연은 교수의 눈치를 살폈다. 엄격한 교수님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앞으로 잔뜩 혼이 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 교수는 피식 웃더니 들고 있던 악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들리긴 하더구나.」

「……예?」

「어떤 레퍼런스와 방향성을 가지고 해석을 쌓아 올렸는지 잘 들렸단다.」

세연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아직 미숙함이 많아서 대체 왜 이렇게 연주했는지 이유나 들어 보자고 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말을 잇지 못하는 세연을 보며 교수가 짧게 박수를 쳤다.

「잘했다. 세연아.」

「그럼 방금 절 혼내려고 하시던 건요……?」

「어디서 들은 이야기를 줏대 없이 하면 혼내려고 했지.」

그제야 세연은 이 모든 것이 시험이었음을 깨달았다. 연주도, 그 이후의 질문도 전부 세연이 연주자로서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잔뜩 긴장해 있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세연은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치며 말했다.

「교수님도 정말! 놀랐잖아요!」

「하하하, 혼 좀 나면 어때서?」

배우는 입장이니 당연히 자주 혼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세연이 열심히 하는 건 교수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였다. 합당한 이유 없이 괜히 긴장되는 상황은 겪기 싫었다.

그런 세연의 마음도 알겠다는 듯 교수가 웃으며 사과했다.

「그래, 그래. 알았다. 앞으론 시험 같은 것 안 하마.」

「정말이신가요?」

「이게 교수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습관이 좀 되어서…….」

「하신다는 거네요?」

「나도 모르겠구나.」

박 교수는 무책임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세연은 오늘 확답을 들어야겠다는 듯 교수를 바라보았으나 결국 웃고 말았다.

예전보다 교수는 조금 더 엄격해졌다. 진지하게 세연을 피아니스트로서 성장시키려고 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마치 진짜 음대 교수님처럼.

세연은 그 태도 변화가 무척이나 기뻤다.

예전에도 교수는 세연을 열심히 지도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심하게 하지 못하고 조심스러워하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보단 지금이 좋았다. 가끔 시험을 당하거나 혼나더라도 세연은 조금 더 믿음직스럽고 가르칠 보람이 있는 제자가 되고 싶었다.

「아무튼…… 오늘 긴 시간 연습하면서도 집중력 잃지 않고 열심히 한 것이 귀로 들리는구나.」

「다행이네요. 티가 안 나면 어떻게 하나 조마조마…….」

「살짝 티를 내려고 하는 구석도 들리긴 했는데…….」

「윽.」

역시 아직도 부족한 부분들이 많았다. 박 교수는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껄껄 웃으며 책상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전체적으로 잘했으니 칭찬을 받아 마땅하지. 음, 그래. 초콜릿이라도 하나 줄까.」

「제가 어린애인 줄 아세요?」

「좋아하더만 뭘.」

「……좋아하긴 해요.」

제자이자 피아니스트로 가르침 받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세연은 아직 조금은 더 어린애 취급당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굉장히 일관성 없고 멋대로인 마음만 가득이었다.

세연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정말 변덕스럽다고 생각하며 교수가 주는 초콜릿을 받았다.

「세연아.」

「예?」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대답하자 교수가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도 네 목표는 러시아에 있는 네 친구인 거겠지?」

참 곤란한 질문이었다.

피아니스트로서 당연히 추구해야 할 것은 음악 그 자체나 혹은 역사적 거인들이어야 한다.

같은 또래의 자그마한 아이를 쫓아 봤자 시야가 좁다는 소리밖에 못 들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세연은 지금 세상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타티아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건 도저히 거짓으로 꾸밀 수 없는 진심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겠죠……?」

「아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란다.」

세연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교수는 고개를 저으며 이어 말했다.

「네가 그 아이를 목표로 했던 것이 불과 몇 년 전 일이지. 그런데 단기간에 이만큼이나 성장한 것을 보면서 난 너희를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단다.」

타티아나란 피아니스트를 알았기에 세연도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교수도 그것을 분명히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 더 열심히 해서 그 애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 당연히 세연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교수의 말은 그 이후를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지…… 콩쿠르가 전부인 건 아니란다.」

「……예?」

「그러니까 콩쿠르가 끝나더라도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면서 음악이 아닌 대화도 많이 했으면 좋겠구나. 음악으론 할 수 없는 이야기도 많을 거야.」

음대 교수님의 말씀이라기엔 어색하다. 마치 음악을 불신하는 듯한 느낌이지 않은가?

그러나 세연은 박 교수가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라 하여 지나치게 음악을 과신하고 맹목적이 되지 말란 충고였다.

단순히 피아니스트로의 교육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들을 전달해 주려는 박 교수에게 세연은 깊은 감사를 느꼈다.

「많이 하고 있어요. 작년에 저 모스크바에도 갔다 왔었잖아요?」

「그래, 그랬었지. 그래서 너라면 잘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란다.」

그제야 박 교수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연이 타티아나를 단순히 라이벌이나 음악적 지표 같은 것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친구라 여기고 있음에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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