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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998화 (998/1,277)

##  998화

등교해서 연습실로 가기 전에, 잠깐 교실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수업을 듣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에 얼굴도 비추지 않고 곧장 연습실로 갈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케스트라와 리허설도 해 봐야 하지 않아?”

“다음에 연습 보러 가도 돼?”

오가는 이야기는 온통 나와 아나스타샤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연습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의상은 어떻게 준비하는지, 콩쿠르 측에서 또 무언가 연락 온 것은 없는지 등 친구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은 디테일하게 많았다.

여기 있는 모두 지금은 자기 단련을 하는 것을 택했지만 몇 년 후엔 큰 무대에 갈 준비를 하는 연주자들이었다. 미리 궁금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 잠시만요. 메시지가.”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이, 스마트폰으로 오는 연락들도 있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로부터 온 메시지엔 여러 서류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지난달 음반 판매량에 대한 보고와 그에 대한 이익 등이었다.

“……천만?”

그 액수를 보니 이건 해도 해도 너무 많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최근엔 돈이 필요한 일이 있기도 했다.

아델리나에게 의뢰한 의상의 대금도 치러야 했고. 하지만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정도의 금액이라서 약간 어지러웠다.

아직 학생인 난 이런 돈을 쓸 곳도 딱히 없었다.

대신 내가 아닌 다른 곳에 쓰는 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음악가가 사회를 위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난 공헌하고자 하는 의지가 많은 사람이었다.

예전에 자선 연주회로 거액의 기부금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 기억은 아직도 내게 좋게 남아 있었다.

난 학생이지만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의 공익 연주자이기도 하니까…… 나중에 협회 매니저인 발레리 르포비치에서 문의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

다른 메시지는 빅토르에게서 온 것이었다. 또 다른 인터뷰를 요청하는 곳이 있다는 것 같은데, 일단은 거절해 달라고 부탁했다.

국제 콩쿠르 출전이라는 큰 이벤트를 놓고 스포트라이트가 쏠리는 것도 이해한다.

매스컴에 얼굴을 자주 비춰서 콩쿠르에 대한 관심도를 끌어 올리는 것도 공로 예술가로서 해야 할 활동일지도 모르고.

그러나 자꾸만 콩쿠르 자체가 아니라 나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아서 약간 피하고 싶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일단은 보류다. 콩쿠르에서 결과를 낸 다음엔……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뭔가 다 미뤄 버리게 되네.’

콩쿠르가 이제 정말 두 달 앞으로 다가와서인지 어려운 일은 별로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았다.

모든 시간과 집중력을 온전히 피아노에 쏟지 않으면 피아노의 신이 노하셔서 천벌을 내리고 말 것이란 생각이 날 지배하고 있었다.

정말 근거 없기도 하고 고지식한 생각인 건 알지만…… 이제 와서 생각을 달리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시간을 보니 8시 40분이었다. 이제 슬슬 연습실로 가 보려는데, 마침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앗.”

멀리 있는 또 한 명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자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아직도 인사말은 러시아어에 다른 문장은 영어로 된 메시지였지만 난 세연과 이런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에 무척이나 익숙했다.

‘지금 그쪽은 3시쯤이려나.’

이젠 시간을 계산하는 것도 빨라졌다. 자연스레 세연이 연습실에서 연습하다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뭔가 연습이 잘 풀리지 않은 걸까?

혹시나 싶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콩쿠르 준비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뭐 하니? 타티아나.”

“아, 세연과 이야기 중이었어요.”

“세연? 아.”

아나스타샤도 세연을 잘 안다. 두 사람은 SNS를 하기 때문에 심지어 나보다 더 자주 교류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재미있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작년에 미국에서 봤을 때도 혹시나 싶었는데…… 진짜 큰 무대에서 보게 되었네. 신기해.”

“후후, 그렇네요.”

난 직접 보지 못했지만, 포트워스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서 두 사람은 대결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땐 아나스타샤가 우승이고, 세연이 준우승이었으니 실력 차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불과 재작년만 하더라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연은 5위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참가자들에 차이가 있으니 똑같은 비교라 할 순 없겠지만, 세연은 정말 해를 거듭할수록 굉장히 빠른 속도로 실력이 좋아지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도 관심이 있는지 내 옆에 달라붙어선 물었다.

“곡 뭐 한대?”

“글쎄요.”

“안 물어봤니?”

합격자 명단이 나오고 나서 세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정이나 학교 수업에 대한 행정 처리 등 콩쿠르 참가자들끼리 공유할 수 있는 공감대가 많았던 덕분이다.

그러나 그사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직접 가서 들어 보고 싶어서요. 대신 의상 관련한 이야기만 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네요.”

아나스타샤도 그 부분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사실 음악적인 내용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공유하진 않기 때문이었다.

라이벌 의식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이유가 컸다.

항상 함께 음악을 교류해 왔던 우리들이기에 큰 무대 위에서 서로의 영향을 최소화한 음악으로 제대로 부딪쳐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음악가로서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고양감이었다.

“의상은…… 음, 우리랑 겹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닐까?”

“겹치면 싫겠죠?”

“그런 의미에서 싫다는 게 아니라.”

아나스타샤는 자기 어깨 부근을 손으로 잡아 올리곤 팔락였다.

“돋보이고 싶을 것 아냐. 피아니스트로서, 그리고 라이벌로서도.”

역시 아나스타샤도 친구라 할 수 있는 사람들과 무대에 서는 것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알고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난 그녀가 이렇게 강한 사람이라서 좋았다.

“그 마음은 이해가 되네요.”

“나도 그래.”

이제 두 달 남은 콩쿠르를 생각했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하루도 낭비하지 않고 차근차근 피아노 연주자로서 강해지고 있었다. 아마 멀리 있을 세연도 마찬가지겠지.

최선을 다할 준비를 마친 세연과 벨기에에서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편에서 발렌티나가 갑자기 와락 덮치며 칭얼거렸다.

뭔가 불안함을 해소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모습이라서 난 그녀를 다독이듯 물었다.

“다음 주쯤엔 발표 나오죠? 발렌티나.”

“응. 미칠 것 같아.”

3월 중순 경엔 쇼팽 콩쿠르의 DVD 심사 결과가 나온다. 거기서 뽑힌 진출자들은 곧장 4월 중순의 예선에 참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발렌티나는 이미 쇼팽의 음악들을 연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발표는 늦는데 콩쿠르 시작은 이르니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별로 여유가 있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발렌티나보다는 나은 처지라서 좀 더 달래 주려고 하는데 아나스타샤가 이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장난을 걸었다.

“합격해도 미치는 건 똑같을 걸? 당장 준비할 게 산더미…….”

“너 진짜 자꾸 그럴래!”

“맞잖니?”

“맞다고 하더라도!”

제발 그만 겁주라는 듯 발렌티나가 아나스타샤를 붙잡고 항의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아나스타샤가 눈 하나 깜짝할 사람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어린애들처럼 투덕거렸다.

난 말려야 하나 생각하다가도 그냥 조용히 구경만 했다.

이 순간만큼은 발렌티나의 표정에서 긴장감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일주일이 더 지나자 날씨는 한층 더 포근해졌다.

여전히 눈발이 내리는 날이 있기도 했지만, 땅에 닿으면 금방 다 녹아 버려서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늘 꽁꽁 싸매고 다니던 사람들의 옷차림도 조금 더 가벼워졌고, 나 역시 약간은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마음까지 풀어 놓을 순 없었다.

단 하루도 헛되게 보낼 수 없단 마음가짐으로 모든 시간을 스케줄로 관리하며 보냈다.

지금까지 연주회 등을 하면서 무대를 준비할 때 시간 관리를 했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이건 여러 사람들이 내 편의를 봐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제 콩쿠르에 참가 중이라는 상황을 굳이 이용하려고 하지 않아도, 모두가 내게 방해가 될까 봐 조심스럽게 피해 주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게까지 할 건 없는데……. 어쨌든 연습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으니 따로 다른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콩쿠르 준비를 하는 나와 아나스타샤에 비견될 만큼 열심히 피아노 연습에 힘을 쏟는 아이들도 있었다.

오늘은 그 연습이 빛을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 확인하는 날이었다.

“오후 1시에 발표한다고?”

“왜 굳이 그렇게 한다니?”

“폴란드에서 정오에 발표하나 봐.”

쇼팽 콩쿠르의 DVD 심사 발표는 모두에게 큰 이슈였다.

참가 신청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5년 만에 돌아오는 이 굉장한 축제에 어떤 연주자들이 참가했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친구들이 도전장을 냈으니 관심이 더더욱 쏠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떴어!”

식사 후에 모두들 각자 환담을 나누다가 그중 한 명이 소리치자마자 우르르 몰려들었다.

가운데에 앉은 아이가 쇼팽 콩쿠르 홈페이지를 띄워 놓고 있었고, 모두들 그 작은 화면을 보려고 가까이 붙었다.

이럴 거면 각자 스마트폰으로 보면 안 되나 싶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궁금해서 기웃거리고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쇼팽 콩쿠르의 DVD 심사 통과자는 백 명도 훨씬 넘었다. 그중에서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내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화면을 내리면서 유명한 연주자들을 찾아내기도 하다가 이윽고 딱 멈춰 섰다.

“와! 발렌티나 여기 있어!”

“바르바라도 바로 밑에 있는데? 둘 다 합격했어!”

“그럼 우리 반에서 네 명이야? 진짜로?”

폭죽이 터지듯 아이들은 환성을 내질렀다. 난 뒤편에 서서 박수로 축하를 보냈다.

발렌티나만 합격한 것이 아니라 함께 신청을 한 바르바라도 합격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마 10학년에서 이렇게 많은 인원이 국제 콩쿠르에 출전하는 건 처음일걸?”

그 말대로 대단한 일이었다. 모두들 한 교실에서 공부하고 연습하면서 서로 좋은 영향을 많이 주고받은 덕택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이런 환경이 아니었다면 아마 훨씬 더 고생했을 것이다.

박수를 멈추지 않고 이어 나가며 난 환하게 웃었다.

“축하해요, 두 분 모두.”

“…….”

“어…….”

발렌티나는 예상했던 대로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있어서 축하해 주기 편했다. 그런데 바르바라의 표정엔 약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러시나요? 바르바라.”

“솔직히 안 될 것 같아서 연습 거의 안 했는데…… 망했다.”

“…….”

이번엔 내가 당황스러웠다.

DVD와 신청서를 보내고 나서 합격 통보를 기다리는 것 자체도 스트레스이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기다리는 아이들도 있긴 한데, 그래도 연습은 조금 해 두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합격했다는 건 심사 위원회로 보낸 DVD가 제대로 인정받았단 뜻이다.

바르바라도 실력이 나쁘지 않으니 못할 건 없었다.

“지, 지금부터 열심히 하시면 되죠. 다행히 쇼팽 콩쿠르는 예선과 본선 사이 기간이 길잖아요?”

본선 준비는 반년에 걸쳐 할 수 있으니 그렇다 치고, 일단 예선만 생각해도 머리가 아픈지 바르바라는 잠깐 주위를 빙글빙글 돌더니 갑자기 나를 휙 돌아보며 물었다.

“타티아나. 나도 수업 뺄 수 있을까? 오늘부터 연습해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긴 하죠……. 그런데 그건 시험을 치셔야…….”

“어떻게 해? 우리 선생님한테 말하면 되는 거야?”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 선생님께 쇼팽 콩쿠르 DVD 심사 통과를 말씀드리면 무척 기뻐하시면서 아마 알아서 행정 처리 등을 도와주실 것이다.

옆에서 축하를 받던 발렌티나도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불쑥 끼어들더니 바르바라에게 말했다.

“나도 해야겠다. 이렇게 된 김에 같이 할래? 바르바라.”

“우린 경쟁자잖아?”

“그런 건 폴란드 가서 생각하자고.”

“그럴까.”

콩쿠르에서의 경쟁자라는 건 사실 그렇게 아름답게만 들리는 단어는 아니다.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이 될 수 있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잔인하게 될 수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콩쿠르, 특히 국제 콩쿠르라면 그야말로 정글이나 다름없는 곳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냐며 웃으며 힘을 합칠 수 있는 관계도 있기 마련이다.

난 가까이에 이렇게 멋진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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